#055.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 4
다정함이 잔뜩 어린 목소리를 들은 지수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곧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꺼냈다.
“……제 동생 이름은 지율이에요.”
“지율이도 예쁜 이름이군요.”
“그렇죠? 율자 들어가는 이름은 다 예쁜 것 같아요. 제 이름은 형이 지었고, 지율이 이름은 저랑 형이 지었어요. 그땐…….”
한지원. 한지수. 한지율. 셋 다 이름 예쁘지 않냐고, 그 당시엔 율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유행인 시기였는지 비슷한 이름이 많은 것 같다고, 우리 형제 중에 동생 이름이 제일 예쁜 것 같다고 말하려던 지수는 목이 메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동생의 이름 두 글자를 입에 담았을 뿐인데 형과 밤새 동생 이름을 고민했던 날이나, 무관심한 양친보다 훨씬 더 동생을 많이 돌봤던 날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열 살 차이 동생을 형과 둘이 키우다시피 했으니 줄줄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추억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다급히 고개 숙인 지수는 손등으로 눈가를 짓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 그리움에 옷소매는 젖어 들고 마음은 가라앉는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대격변을 저 혼자 겪은 것도 아니고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격변의 날,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앞을 보고 걷는 길을 택했다.
저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는 어중간하고 답답한 삶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며 더 나은 날을 위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소중했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고 가끔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지만, 분명하게 추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강재윤은 고사하고 대격변 날에 잃은 형과 동생이나 러비스 멤버 형들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도 힘들었다. 다른 이들은 그럭저럭 버티며 잘 사는 것 같은데, 저는 왜 아직도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스스로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이 사람 앞에서 또 이런 모습을 보이는구나. 원래 이렇게 눈물 많은 사람이 아닌데, 또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한심하게.
온전히 슬퍼하지도 못하고 자책하기 시작한 지수의 허벅지로 작은 무게가 실렸다. 울먹이며 다리를 내려다보자, 부리를 앙다문 토토가 보였다. 제 반려몬을 향해 억지로 웃으려다 실패한 지수가 토토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만약 지율이가 살아 있었다면……, 토토를 정말 예뻐했을 거예요. 지율이는 햄스터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삐이.”
평소와 달리 차분한 얼굴로 지수를 올려다보던 토토는 눈을 지그시 감고 집사의 손바닥에 몸을 비볐다. 평소에도 토토가 이럴 때면 어린 동생이 제 손바닥을 베고 누워 볼을 비비며 치대던 게 떠오르곤 했던 탓일까,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아, 진짜 그만 좀 울고 싶다…….’
역시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애써 마음을 추스르려는 찰나, 시야에 뭔가 불쑥 내밀어졌다. 저도 모르게 움찔 놀란 지수는 정하진이 내민 것이 손수건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받았다.
테두리 레이스가 굉장히 화려하고, 손으로 한 땀 한 땀 놓은 게 분명한 꽃무늬 자수가 예쁜 손수건이었다. 설마 정하진 에스퍼가 직접 만든 걸까? 궁금함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그를 돌아본 지수는 어쩐지 머쓱한 듯이 제 시선을 은근히 피하는 남자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
“…….”
“……저, 이 손수건 혹시 직접…….”
“작년 가을에 S급 스토리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 중 하나입니다. 중세도 아니고 이름 모를 시대가 뒤섞인 것 같은 던전이었습니다. 드레스 입은 귀족 여성에게 얻었는데, 자기가 이 자수를 놓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며 따지더군요.”
“…….”
그답지 않게 말이 조금 빠르다 싶을 정도로 우다다 쏟아져 나왔다. 지수는 이름 모를 예쁜 꽃 자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벤토리에 마침 손수건이 그것밖에 없지만, 사용한 적 없는 새것입니다. 안심하고 쓰셔도 됩니다.”
“……아, 네.”
혹시나 직접 자수를 놓았다고 해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데…….
구태여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톡톡 찍은 지수가 대화 주제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은 주제로 말을 꺼냈다.
“……전……, 스토리 던전은 딱 두 번 가 봤는데 좀 힘들더라고요. 정신계 저항 스킬을 다 켜도 타격이 엄청나서 오래 기억에 남거든요.”
원래도 인간형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은 꺼렸지만, 그게 스토리 던전이라면 더 그랬다.
스토리 던전은 말 그대로 특정 스토리를 진행하며 공략해야 하는 던전으로 이 던전에 나오는 인간 또는 그 세계의 종족들은 모두 이지를 가지고 있다.
마치 연극을 진행하듯 가끔은 그들과 힘을 합쳐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빠르면 당일에 끝나기도 하고 길면 며칠간 던전에 머무르며 진행할 때도 있었다.
스토리 던전은 일반적인 던전과 다르게 공략이 끝나 공략팀이 퇴장하면 그 즉시 던전이 소멸하므로 이후 드나들거나 채집을 할 수 있는 유예 기간도 없었다.
그래서 던전을 공략하고 퇴장하기 직전, 그들에게 배웅받을 때 눈물을 보이는 각성자들이 꽤 많았다. 본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그들에게 정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종 깊게 정이 들어 그들을 테이밍해서 펫으로라도 던전 밖에 데려가려고 시도하는 이들의 사례도 있다곤 했다. 애석하게도 스토리 던전에선 테이밍이 불가능한 건지 감화에 성공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여러 이유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던전이다 보니, 스토리 던전은 정신계 저항 스킬이 높은 각성자 위주로 팀을 꾸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스토리 던전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고 얻은 보상 외에 다른 전리품은 잘 챙기지 않는 추세였다. 어차피 만날 수 없는 이들에게 받는 선물은 그리움만 남기는 법이니까.
지수는 정하진이 이 손수건을 볼 때마다 속상하진 않을까 싶어졌다. 하지만 모든 것은 기우라는 듯이, 정하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스토리 던전은 싫어합니다. 원래라면 전리품도 챙기지 않지만, 이 손수건을 가져온 이유는 그 귀족이 제 검집에 직접 묶어 주며 가지고 나가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받아 달라고 요청했다고요?”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엔 보스 공략을 위해 제가 요구했습니다. 해당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상대편 기사로 출전하는 다크 나이트였는데, 여성 귀족에게 손수건을 받은 사람들만 보스전에 참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귀족에게 손수건이 있다면 달라고 정중히 요청해서 받았습니다.”
“와…….”
“보스 공략 후에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괜찮다면 가져가 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이제 자기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면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자수 놓느라 힘들었다고 투정까지 했다면서, 그냥 가지라는 것도 아니고 이젠 자신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니.
“……혹시 그 귀족은 자기가 소멸할 걸 알고 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 손수건은 자길 기억해 주길 바라며 준 걸지도 모르겠네요.”
“…….”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지수는 아, 이건 너무 우울한 주제인가. 괜히 말했나……, 싶은 기분에 은근히 정하진의 눈치를 살폈다. 지수의 걱정과 달리 정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예. 저도 그렇게 느껴서 받아 왔습니다.”
“…….”
“확실하진 않지만, 부디 가져가 달라는 말을 하던 모습은 어느 정도 끝을 예감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그저 ‘던전’이라는 세계에 속한 사람이고, 공략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 중 하나라는 걸 눈치챘다면 어떤 기분일까? 곧 소멸할 저들을 두고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며, 그들이 언젠가 자신을 떠올려 주길 바라며 이런 선물을 주는 걸까?
혹시 지구도 그런 한 편의 스토리 던전 중 하나일 수 있는 걸까? 어느 날, 미지의 존재가 지구에 찾아와 스토리를 공략하고 떠난다고 한다면, 곧 소멸할 지구에 존재하는 게 한지수 본인이었다면 그런 선물을 담담하게 건넬 수 있을까?
둘 다 생각만 해도 정신적 소모가 심했다. 지수는 만약 자신이 스토리 던전에서 공략 대상에게 이런 선물을 받았다면 씁쓸한 마음에 인벤토리에서 꺼내지도 못했을 텐데, 정하진 이 남자는 멘탈까지 SS급인지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고 더 나아가 부러웠다.
젖은 눈가를 마저 톡톡 두드려 닦아 낸 지수는 나중에 아이템 전문 시설에 의뢰해 잘 세탁해서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하며 인벤토리에 손수건을 넣었다. 특정한 누군가를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은 언제나 유일한 법이니까.
* * *
빙하기가 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독했던 눈보라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그쳤다.
덕분에 늦은 저녁 시간쯤엔 중부 지방 전역이 눈에 뒤덮인 채 빙판이 된 상태였다. 아늑한 거실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늘어져 앉은 지수는 습관적으로 오늘 기억에 비는 구간이 없는지 점검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죽 먹고, 옥상 정원 산책하고. 점심도 죽 먹었고. 쉬다가 상담도 받았지.’
점심 식사 후 늦은 오후엔 길드 건물 내 케어 센터에 방문해 필수로 받아야 하는 심리 상담도 받았다. 이는 페어가 사망하거나 공략팀 중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여러 사건 사고로 인해 각성자가 정신적인 케어가 필요할 때 필수로 받아야 하는 시스템 중 하나였다.
만약 상담 일에 출석하지 않으면 나중에 두 배로 상담 시간이 늘어나거나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제약이 생기는 등 다소 강제적인 페널티가 있어서 꼬박꼬박 받는 게 중요했다.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선생님 시간만 뺏은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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