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 3
“그때 챙겨 온 뿌리들은 기증했는데, 대부분 연구 재료로 쓰이고, 이 뿌리만 따로 설치해 뒀어요.”
또 한 차례 인공 바람이 정원을 쏴아아아 훑으며 지나갔다. 흩날린 머리카락을 정돈해 귀 뒤로 넘긴 지수는 앞꿈치로 바닥에 이끼를 비비며 눈을 내리떴다.
자신이 선명하게 기억하는 대부분의 기억엔 언제나 강재윤이 있었다. 지금 이 뿌리에 앉은 것조차 그를 떠올릴 정도로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강재윤이라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더 많은 부분에서 그를 떠올리게 되고, 그때마다 상실감을 느끼겠지. 한지수가 자신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을 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연못에 장식한 돌무더기 중 분홍색 돌은 제가 기증한 겁니다.”
“……? 저 큰 돌이요?”
지수가 저게 맞냐며 연못 주변을 장식한 돌 중에 솜사탕처럼 분홍색과 연보라색이 섞인 돌을 가리키자 정하진이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던전에서 색이 예쁜 거로 몇 개 챙겨 왔는데, 평화 길드에 아는 여동생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몇 개 기부했습니다.”
“와, 진짜요? 저 돌은 제가 이 정원에서 제일 좋아하는 돌이에요. 날 좋은 날에 표면이 엄청 예쁘게 반짝거려서 저기서 토토 사진도 많이 찍었어요.”
“예. SNS에서 본 적 있습니다.”
“…….”
그런 것까지 봤냐는 듯이 다소 불경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정하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팬이니까 토토의 계정도 당연히 챙겨 보고 있습니다.”
“……아, 네.”
그런 것치고 정하진의 폰엔 SNS 앱도 없었지만, 굳이 토 달지 않았다. 대충 눈을 가늘게 뜨고 정하진을 바라보던 지수가 다시 돌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예쁜 색의 돌이었다.
지금은 날씨가 안 좋아서 덜하지만, 맑은 날 햇빛을 받으면 돌 표면에 펄이 묻은 것처럼 온통 반짝이며 빛을 반사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분홍색 빛 덩어리 같아 길드 내에서도 인기가 좋은 돌이었다. 사실상 돌이라기보단 바위에 가까운 크기였지만.
“저렇게 큰 돌을 일부러 챙기신 거 보면, 좋아하시나 봐요. 예쁜 거.”
“예. 집안 내력인지 저와 제 여동생도 그렇고, 남동생도 예쁜 거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정하진이 말한 그의 여동생이자 S급 바람 속성 에스퍼인 정하영은 지수도 몇 번 만나 봐서 아는 사이였지만, 남동생의 최근 소식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동생은 잘 있냐는 안부를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그의 남동생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적었던 탓이었다. 지수가 아는 거라곤 그의 어린 남동생이 대격변 시기에 사고를 겪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SS급 정하진과 S급 정하영이 워낙 유명한 쌍둥이 에스퍼다 보니 종종 둘을 소개하는 이야기에 남동생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대격변 당시 알 수 없는 증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은 익히 들었지만, 5년이 넘는 지금껏 깨어났다는 소식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뭐라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발로 애꿎은 이끼만 비벼 대자 정하진이 말을 이었다.
“남동생이 특히 저런 분홍색이나 연보라색, 연노란색 같은 파스텔 색을 좋아해서 보일 때마다 하나씩 모으다 보니 인벤토리가 솜사탕 색으로 가득합니다.”
“아하하, 궁금하네요. 엄청 예쁠 것 같아요.”
옅은 미소조차 지을 줄 모르는 남자의 인벤토리가 파스텔 빛으로 가득하다니,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지수는 타인의 인벤토리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한번 보여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벤토리는 각 개인 고유의 것으로, 타인의 인벤토리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건 상식이었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그 알록달록한 인벤토리를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기며 우스갯소리로 넘기려던 지수에게 정하진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방법을 찾으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
나중.
그게 언제일까?
그 ‘나중’이라는 미래에도 내가 이 남자와 연락을 주고받을까? 아니, 그 전에 내가 존재는 할까?
지수는 궁금함을 내색하지 않고 흐리게 웃었다. 그러자 내내 인공 연못을 바라보던 정하진이 고개 돌려 지수를 바라봤다. 지수 역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집에서 보는 것보다 더 무뚝뚝한 얼굴로 변신한 남자는 풍기는 기백과 다르게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수를 향해 약속하듯 말했다.
“대격변 이후 기술은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언젠가 타인의 인벤토리를 구경할 수 있는 장치도 분명 나올 겁니다.”
“…….”
그가 하는 말이 100% 확신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닌데도, 은근히 확신에 찬 것같이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혹시 이미 개발은 끝났는데, 상용화 전이라 공식 발표하지 않은 내용을 전직 비밀 요원이라 알고 있는 걸까? 지수가 점점 상상에 살을 붙이고 있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개발만 된다면 제일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 인벤토리에 모은 잡동사니들은 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니까요. 직접 보면 아마 놀랄 겁니다.”
“…….”
부드러운 인공 바람이 다시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지수는 그의 진지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함께 눈을 맞추고, 다음에 꼭 보여 주고 싶다고 멋대로 미래를 약속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요. 볼 수 있게 된다면, 꼭 보여 주세요.”
진심이었다. 볼 수만 있다면 보고 싶었다. 이 남자가 동생을 위해 하나둘 모아 이룬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의 세상이 궁금했다. 타인의 인벤토리를 볼 수 있는 기술이 나올 때쯤의 미래에 자신이 존재할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근시일 내에 가능해진다면 꽃분홍으로 꾸며진 정하진 에스퍼의 개인 공간을 구경해 보고 싶었다.
정하진에게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뗀 지수는 돔 너머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올려다보며 내내 망설였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창문 열고 누워 있을 때, 눈이 들어와 볼에 닿았어요.”
“예.”
“귀찮아서 그냥 놔뒀어요. 어차피 금방 녹아 흘러 증발할 테니까.”
“그렇군요.”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정하진이 곧바로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지수는 이토록 훌륭한 청자를 곁에 뒀으면서 다소 기운 없어 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누가 볼을 닦아 준 것 같았어요. 분명 무언가 볼에 스친 느낌이 났거든요. 놀라서 일어났는데…… 방엔 아무도 없더라고요.”
“…….”
“혹시 재, 음. 그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한지수는 시야에 비친 정하진이 제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알았지만, 그와 굳이 시선을 맞추지 않고 여전히 돔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잠결에 착각한 거겠죠? 가끔 자다가 누가 다리를 확 잡아당겨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기분이 들어서 놀라 깨는 것처럼……, 이것도 그런 착각이겠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착각이라고.
하지만 정하진은 착각이라는 말에 긍정하는 대신 지수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덕분에 그의 정수리에서 졸고 있던 토토가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물론 그가 재빠르게 손으로 잡아 허벅지 위에 올려 둬 그런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삐잇…….”
불만스레 작게 운 토토가 다시 얌전히 몸을 웅크렸다. 이번에도 대화의 공백이 찾아왔다. 하지만 어색함이나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지수는 다시 불어오는 인공 바람을 맞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돔 밖은 여전했다. 진짜 서울 상공에 얼음 여왕 던전이 터진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독한 눈보라가 멈추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같은 곳을 올려다보던 정하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제 생각엔 착각보단 뇌가 꺼낸 기억의 파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의 파편이요?”
“예. 너무 보고 싶어서 뇌가 그 사람의 손길이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참고로 저도 수면 상태에 빠지기 직전에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기척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SS급 에스퍼인 정하진도 그런 경험이 종종 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전까지 심란했던 기분이 약간은 괜찮아진 것 같았다.
일종의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수는 제가 이상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게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목소리가 들리면 그냥 무시하시나요?”
“제 경우엔 보통 잠들기 직전이면 혼자 있을 때가 많아서, 그냥 대답합니다.”
“…….”
“사실 동생의 목소리라고 해 봤자 희미하게 ‘형아.’ 하고 부르는 게 들리는 정도라서……, 그럴 때면 저도 “응. 하율아.” 하고 대답합니다. 대부분은 그러다 그냥 잠드는데, 가끔 운이 좋으면 꿈에서 동생을 만나기도 합니다.”
“…….”
‘응. 하율아.’
단지 이렇게 대답한다고 예시로 읊조린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고 다정하게 들렸다. 동생이 띠동갑이라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와 제 동생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건 알고 있었다.
“……이름 예쁘네요. 하율이.”
“예. 여동생과 제가 같이 지었습니다.”
정하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동생을 향한 그리움과 짙은 애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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