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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54화 (54/172)

#053.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 2

“……?”

자신이 건드린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바람결이 만든 발광도 아니었다.

일순 지수는 아까 뺨에 느껴졌던 감촉을 떠올렸다. 설마 그게 진짜 시그널이었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의식이 쏠리기 전, 이끼밭 전체에 찌그러진 감자 모양의 빛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어?”

“삐잇?”

어깨 위의 토토도 놀라 고개를 갸웃했다. 대충 8자 혹은 눈사람 비슷하게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발광하는 자리에 물방울이 맺힌 걸 본 지수는 반사적으로 정하진을 올려다봤다. 그는 집중하는 표정으로 이끼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 성하진 에스퍼. 저거 혹시…….”

“…….”

진지한 얼굴을 본 지수는 더 말 붙이는 대신, 다시 이끼로 시선을 돌렸다.

찌그러진 동그라미 중 위에 있는 작은 동그라미에 점 두 개가 생겼다. 아마 눈 같았다. 그리고 양쪽 눈 사이 조금 아래쯤에 작은 마름모가 그려지더니, 중간에 가로줄이 생겼다.

저렇게 두고 보니 꼭 작은 새 같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전히 감자같이 생겼지만. 그래도 지수는 눈과 부리 형태를 보고 은근히 물었다.

“……이거 토토예요?”

“예. 알아보셨군요.”

“삐, 삐잇!?”

“공략팀 멤버들이 이끼 던전만 가면 이렇게 낙서하기에 저도 시도해 봤는데, 생각보다 어렵군요.”

“……쀠이…….”

실망감 느껴지는 토토의 울음에 지수가 급히 수습하고자 감탄하며 말했다.

“토토야, 저기 봐! 우리 토토가 반짝이네~!”

“……삐잉?”

정하진은 더 디테일을 살리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이끼를 노려봤다. 그러자 감자의 머리와 몸통을 잇는 오목한 부분에 어설픈 리본이 생겼다.

지수야 저게 리본이라는 걸 아니까 리본으로 인식한 거였지, 토토 눈엔 어째 올가미를 목에 두른 것처럼 보였다.

“삐이익……!”

지수는 리본을 보자마자 부르르 떨기 시작한 토토를 손으로 살짝 감싸 잡고 정하진에게 내밀며 말했다.

“토토야, 우리 토토 열심히 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자.”

차마 양심상 예쁘게 그려 줬다고는 못 하지만, 그가 노력한 건 맞으니 ‘열심히’에 좀 더 힘을 주며 말했다. 목 졸린 듯 빠듯하게 묶인 그림을 노려보던 토토가 정하진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더니, 곧 그의 정수리 위로 뽀로롱 날아 올라갔다.

“토토도 고마운…… 으악, 토토야!”

“쀠익!!!”

잔뜩 심술 난 토토가 정하진의 정수리를 부리로 쪼기 시작했다. 식겁한 지수가 토토를 데려오려 했지만, 정하진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말했다.

“토토의 피드백은 달게 받겠습니다.”

“아, 아니, 아니에요! 토토야……! 그만해!”

“쀠이잇!!!”

콕콕! 코코콕! 열심히 부리질하는 토토를 정수리에 매단 정하진이 먼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지수도 곧바로 그를 따라 걸으며 계속 토토에게 그만하라고 눈치 줬지만, 토토의 부리부리한 작은 눈알이 이끼밭으로 향했다.

지수 역시 고개를 돌려 다시 보자, 그 짧은 사이 물이 조금 증발했는지 더 해괴한 모양새로 빛나는 그림이라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 형태를 본 토토는 오목눈이 새가 아니라 딱따구리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빠르게 부리질을 했다.

정하진은 자기가 쪼일 만했다고, 앞으로 더 연습하겠다며 토토에게 넌지시 사과했다. 저 둘을 지켜보던 지수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으면서 한편으론 재미있는데, 어째서인지 큰 소리로 웃기도 머쓱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정하진에게 미안해서도 있지만, 그보단 그저 자신이 지금 이렇게 웃고 떠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더 강해서기도 했다. 소리 내어 웃고 싶은데 웃기 싫었다. 이 순간이 조금은 즐겁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러웠다.

기분이 좋아지려던 것도 잠시 다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감정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입술을 굳게 다문 지수는 그에게서 두 걸음 정도 거리를 벌린 채 떨어져 걸었다.

앞서 걷던 정하진은 갑자기 걸음이 느려진 한지수를 흘긋 돌아봤다. 땅만 보고 걷는 한지수는 반짝이는 이끼를 보고도 더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한지수는 과거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소중한 이가 없는 세계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다.

깨어난 이후 줄곧 그랬다. 조용히 웃다가도 금방 웃음을 거두거나, 토토를 대할 때가 아니면 아예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의도한 것도 아니고, 무의식중에 말이다.

정하진은 한지수에게 소중한 이를 먼저 보낸 사람이 이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그러니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지수는 자신과 성향이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부산 던전이 소멸한 날로부터 20일이 지났지만, 저 기간 중 한지수가 제정신으로 깨어 있는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대부분 병원 신세를 지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지냈으니까.

정하진은 지금 한창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며 걸음을 늦춰 한지수와 나란히 걸었다.

어느덧 느려진 보폭을 눈치챈 한지수가 고개를 들어 정하진을 올려다봤다. 눈가가 평소보다 유독 붉었지만, 눈물은 맺히지 않았다. 정하진은 그런 한지수를 향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저기 앉을까요?”

정하진이 가리킨 던전산 나무뿌리 벤치로 시선을 돌린 한지수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상대의 얼굴을 살피던 정하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불편하시다면 다른 곳에 앉아도 괜찮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저기 앉아요.”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어진 나무뿌리 한쪽에 자리 잡고 앉은 지수는 변신해 길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눈을 내리떴다.

몸이 옆으로 쏠리는 자리임에도 지수는 늘 이 위치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은 이가 어깨를 빌려주면 기댔을 때 딱 편한 각도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몸이 치우치니 불편함보다 강재윤의 부재가 더 와닿았다. 바로 옆 조금 평평한 부분으로 위치를 바꿔 앉으려는 찰나, 정하진이 한지수의 옆에 붙어 앉으며 말했다.

“제게 기대셔도 됩니다.”

“…….”

단순히 기대앉으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지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지수와 잠시 눈을 맞춘 정하진은 뿌리 벤치 앞에 인공 연못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편하게 기대셔도 됩니다. 그 자리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

이상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단순히 팬이라는 이유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궁금하면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되는데, 어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지수는 그에게 기대는 대신 평평한 곳으로 조금 이동해 앉았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지만, 정하진은 더 권하지 않았다.

각자 편한 위치에 자리 잡은 두 사람과 새 한 마리는 말이 없었다. 지수는 정원에 부는 인공 바람을 맞으며 돔 밖의 눈보라를 멍하니 바라보거나, 빛 이끼처럼 바람결에 따라 수면이 온갖 색으로 반짝이는 인공 연못을 구경했다.

토토는 정하진의 정수리에 편하게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분 정도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한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자리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순수한 궁금증을 담은 질문에 정하진은 곧바로 대답했다.

“제 거처 중 한 곳이 평화 길드 근처라, 가끔 비행 스킬로 주변을 지나가며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이 봤어요?”

“거처 마련 후 3년간 총 대여섯 번 정도 본 것 같으니, 많이 봤다고 하긴 어렵겠군요.”

“음, 그래도 그 정도면 많이 보셨네요. 맞아요. 이 자리 좋아해요. 이 뿌리…… 그 사람이 던전에서 직접 잘라 온 거거든요.”

“그렇습니까.”

주변에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 재윤이 형이라는 이름 대신 그 사람이라 부른 지수는 정하진처럼 연못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날 던전에서 한 가이드가 이 뿌리에 걸려 넘어졌었어요.”

“…….”

“에스퍼였다면 멀쩡했겠지만, 그 가이드는 조금 덤벙대는 기질이 있어서 코피도 나고, 손바닥도 찢어지고 난리가 났었죠. 공략팀에 힐러가 많아서 바로 응급 처치 받고 잘 지나가나 했는데, 그 가이드의 반려몬이 나무뿌리를 쥐어 패기 시작했어요.”

정하진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거대한 나무뿌리를 퍽퍽 때리는 햄스터를 상상했다. 모두가 귀여워하며 바라봤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한지수가 말을 이었다.

“다친 가이드를 아꼈던 에스퍼는 반려몬에게 질 수 없다며, 가이드를 넘어지게 만든 원인인 나무뿌리를 전부 다 토막 내기 시작했고요.”

“…….”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꼭 땔감으로 쓰겠다며 인벤토리에 전부 챙겼죠.”

“재미있었겠군요.”

단조로운 대답에 쿡쿡 웃은 한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재미있었어요.”

짧게 대답하고 잠시 말을 멈춘 지수는 먹먹해지는 기분을 다스리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곤 제 마음이 슬픔에 젖지 않게 애써 추스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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