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 1
갑작스레 외출하기로 결정한 셋은 멀리 가지 않고 평화 길드 옥상에 위치한 인공 정원으로 향했다.
일반적인 건물 옥상이었다면 정하진 말대로 인간 눈사람이 되었겠지만,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돔 형태 결계가 적용 중인 옥상은 반전된 스노우볼 같았다.
눈보라 때문에 하늘이 전혀 보이지 않는 돔 밖을 바라보던 지수가 질린 얼굴을 했다. 큼지막한 눈발이 어찌나 매섭게 휘몰아치는지 아포칼립스 영화 배경으로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올라온 것 같네.’
한지수는 평화 길드 옥상의 공중 정원을 좋아했다.
365일 내내 초봄 날씨를 유지하는 것도, 던전에서 뿌리째 뽑아 온 온갖 식생들이 가득한 것도 전부 좋았다.
바닥에 깔린 풀부터 나무, 꽃, 돌, 자갈, 인공 연못의 물 등 무엇 하나 지구의 것이 없었다. 덕분에 이 공간만큼은 지구가 아닌 다른 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숲 같았다.
특히 겉보기엔 짧고 부드러운 잔디같이 생겼으면서, 손으로 쓰다듬거나 밟으면 자극이 가해진 부위가 반짝반짝 발광하는 빛 이끼 바닥이 상당한 인기였다.
평소의 토토라면 저 이끼에 달려들어 뒹굴고 마구 몸을 비비거나 뛰어다녔을 텐데, 지금은 지수의 어깨에 가슴을 내밀고 위풍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내 집사는 내가 지킨다는 비장함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주변 정찰에 여념 없는 토토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준 지수는 주변을 쭉 둘러봤다. 여기 올 때마다 쉬며 산책하는 길드원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시간이 어중간해서 그런지 저 멀리 몇몇을 제외하곤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변신 스킬을 사용해 김지수의 모습으로 걷던 한지수는 제 옆에 정하진을 바라봤다. 정하진 역시 지수처럼 성하진의 모습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내내 이끼를 계속 밟으며 걷는 지수와 달리 그는 자갈을 밟으며 걸었다.
정하진 너머로 보이는 돔 밖의 눈보라가 아까보다 짙어진 게 확연히 보였다. 원래라면 해가 중천에 떴을 시간인데 눈발이 돔을 뒤덮어 마치 저녁 같았다. 덕분에 이끼가 평소보다 더 반짝이며 선명하게 발광했다.
지수는 오늘처럼 어두침침한 날에 하는 산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괜히 발을 끌어 봤다. 발이 그린 곡선을 따라 바닥의 이끼가 초록빛과 푸른빛 그리고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몇 초간 발광하던 이끼가 다시 빛을 잃고 사그라든 것을 확인한 지수는 괜히 같은 곳을 또 밟았다. 꾹 밟고 뒷걸음질 치며 비빈 자리가 이번엔 푸른빛을 약간 머금은 은색에 가까운 빛으로 발광했다. 지수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몇 번 더 발로 장난치듯 이끼를 건드리던 지수는 고개를 들어 제 옆의 남자를 불렀다.
“정…… 아, 아니. 큼!”
무의식중에 정하진이라고 부를 뻔한 지수가 괜스레 헛기침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해도, 청각 좋은 에스퍼가 있거나 특수 아이템을 쓴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지수는 제 실수를 탓하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그를 불렀다.
“성하진 에스퍼.”
“예.”
“저 가고 싶은 곳 생겼어요.”
“어디입니까?”
“이끼 던전이요. 이번에 가이드 등록하면서 채집권 받았거든요. 식물류 D등급 이하만 가능한 거긴 하지만, 이끼는 더 낮은 등급이 많으니까 충분할 것 같아요.”
던전 부산물이라면 전부 다 큰돈이 되는 시대. 평화 길드는 길드원들에게 복지 혜택으로 낮은 등급의 던전에서 채집할 수 있는 채집권을 매년 발급해 주었다.
물론 이 채집권을 사용할 시 인벤토리엔 넣지 못하고, 길드에서 나눠 준 크로스백에 담아 갈 수 있을 정도만 채집해야 하는 제약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가방 하나를 채우는 재료가 뭔지에 따라 벌 수 있는 금액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래서 몬스터 테이밍 자격증이 있는 비전투계 에스퍼들은 주로 일반인들에게 인기 많은 초식형 소동물 몬스터를 테이밍해 한두 마리 데려와 펫으로 분양했다. 반면에 물리계 에스퍼들은 하급 몬스터를 사냥해 하급 마정석을 추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스킬이 없는 비각성자 길드원들이나 몬스터 테이밍을 통한 펫 사업에 반대하는 각성자들은 나무껍질이나 꽃, 약초를 채집했다. 식물류가 그나마 채집하기 쉬우면서 종에 따라 큰돈을 벌 수도 있고 무게도 적어 소지가 편했으니까.
평화 길드와 계약한 ‘김지수’ 역시 이 채집권을 하나 발급받았으니, 공략이 끝나 식생 채집 목적으로 유지 중인 하급 던전이라면 지금 김지수의 신분으로도 갈 수 있을 터였다.
평소처럼 자신이 하자고 하면 무조건 알겠다고 대답할 거라는 지수의 예상과 다르게 정하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끼가 갖고 싶은 겁니까?”
“……아? 네에. 꽃도요. 색상별로 채집해서 방에 장식해 두고 싶어서요. 토토가 던전 꽃 말린 걸 좋아해서 간식으로 줄 겸.”
“그럼 던전 식물을 취급하는 꽃시장에 가는 건 어떻습니까? 다양한 품종 이끼를 취급하는 가게를 알고 있습니다. 몬스터 간식용 꽃 종류도 많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냥 한번 날 잡고 던전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토토가 마음껏 뛰놀게 풀어 두려고요. 토토가 이끼밭에서 뒹구는 걸 좋아하거든요.”
토토 핑계를 댄 지수는 만약 그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싶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괜한 우려였는지 정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강원도에 평화 길드 소유 D급 이하 채집용 개방 던전이 있을 겁니다. 채집 신청 가능한지 이따 확인해 보죠.”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본 지수는 안도감에 평소보다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끼로 시선을 돌렸다. 원하는 답을 얻어서인지 정원에 설치된 바람 수정 덕분에 인공적으로 나부끼는 풀과 나무가 내는 소리도 평소보다 더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빛멍 하는 사람들이 안 보이네.’
빛멍은 평화 길드 길드원들 사이에서 나온 유행어로, 옥상 정원에 앉아 바람이 스친 자리를 따라 파도치듯 발광하다 사그라드는 이끼를 멍하니 구경하는 행위를 뜻했다.
지수 역시 빛멍을 좋아했지만, 아무래도 알아보는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옥상 정원보단 이끼 던전에서 하는 야영을 더 좋아했다. 빛이 강한 낮은 온 세상에 펄 가루를 뿌려 둔 것처럼 반짝이는 풍경이 절경이었고, 밤엔 바람결이나 물리적인 자극이 닿는 곳마다 다채로운 색을 머금은 빛이 피어나는 게 현실성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던전 생태계가 대부분 그렇듯 밤하늘엔 언제나 무수히 많은 별이 떴다. 조금만 어둠에 익숙해진다면 굳이 조명 장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수많은 별빛이 길을 비춰 주었다. 곧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슨 별자리인지 모를 큰 별에 멋대로 자기들만의 별자리를 만드는 이들도 있었다. 저건 무슨 자리, 저건 내 자리, 네 자리 떠들며 말이다.
지수 역시 밤이 오면 강재윤과 이끼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하늘을 구경하곤 했다. 가끔 저건 토토 같지 않냐고, 용감한 햄스터 별자리 같다고 말하면 강재윤은 이끼 위에서 무아지경으로 뒹구는 토토를 물끄러미 지켜보며 ‘쟤가?’라며 되묻곤 했다.
지수는 토토가 뒹구는 대로 반짝반짝 발광하는 빛을 보는 게 좋았다. 그래서 손이나 나뭇가지로 이끼를 자극하며 장난치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강재윤이 염력을 사용해 넓은 이끼밭에 그림을 그려 주곤 했다.
그는 드넓은 이끼 위에 큼지막하게 한지수 이름 석 자를 써 주기도 하고. 토토 이름을 쓰거나 어설프게나마 햄스터를 그려 보기도 했다. 지수는 눈코입 달린 조랭이떡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지수가 볼 때 강재윤의 그림 실력은 자신이 가진 얕은 지식으로 해석할 수 없는 현대 미술 같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강재윤이 이끼밭에 그려 주는 추상적인 그림이 좋았다. 그의 넓은 어깨에 기대앉아 쿡쿡 웃으며 다른 것도 그려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럴 때마다 강재윤은 최선을 다해 그려 주었다.
그렇게 한지수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공략팀 사람들이 몰려와 자기들 이름도 써 달라며 조르곤 했다. 그럴 때면 짓궂은 강재윤은 비싸게 굴며 시큰둥하게 굴었었다. 그래도 계속 조르며 한 번만 써 달라고 하면 궁서체로 <공략팀> 세 글자를 써 주곤 했는데, 그게 뭐가 그리 웃겼는지 한지수를 포함한 공략팀 멤버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
짧은 순간, 지수의 시야를 가득 채웠던 던전 속 드넓은 이끼밭이 서서히 증발하며 옥상 정원의 이끼밭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원에 장식된 이끼 중엔 강재윤과 자신이 퍼 온 이끼도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모든 건 다 그대로 있는데, 강재윤만 없는 이 현실이…….
여전히 아침이 오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지고, 추운 날엔 눈이 내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맑기도 했다. 세상 흘러가는 게 변한 게 하나 없었다. 심지어 이 옥상 정원만 해도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있는데, 강재윤만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골이 지끈거렸다. 눈가가 시큰거리며 아픈 게 골까지 번졌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지수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뭐라도 담고 억지로라도 그걸 생각하려는 의도였는데, 온갖 희귀한 것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러다 또 정하진에게 한심한 꼴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 다른 조경 구역으로 이동하려던 순간. 한지수의 발에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지점의 이끼가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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