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52화 (52/172)

#051.

부작용 7

방문을 꽉 닫으면 나중에 토토가 들어오기 힘들 것 같아 약간 열어 두고 침대에 눕자 전면 창으로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이 보였다.

우르르릉- 쿠르르르릉-

먹구름 가득한 잿빛 하늘에서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눈이나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곧 둘 중 하나가 쏟아질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대격변 초기엔 거의 매일 저런 하늘이었는데…….’

최근 들어 대격변 시기가 자주 떠오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하늘이 당시의 하늘과 흡사해 보여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5년 전 1월에 일어난 대격변 이후로 3월까지 맑은 날이 이상하리만큼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1주일 중 4~5일은 대부분 저렇게 우중충하고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일 정도로 우중충하고 음울한 날씨가 이어졌다.

모든 게 아수라장인 도심에서 벗어나 마땅한 쉘터를 찾지 못해 전복된 관광버스에 들어가 깨진 유리를 막고 다 같이 모여 덜덜 떨며 잠들었던 날도 있었다.

그날 지수는 너무 춥고 배고파서 얼룩덜룩한 자국이 묻은 차창 밖으로 펄펄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일 자신이 눈뜰 수 있을지 걱정했었다.

“…….”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린 짧은 사이 눈송이가 하나둘 흩날리기 시작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던 지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전면 창문 앞에 자리 잡고 누웠다.

유리문을 조금 열자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얼음 여왕 던전이라도 입장한 것처럼 방 온도가 순식간에 훅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담요를 덮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 지수는 눈을 깜빡이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처음엔 눈송이가 셀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흩날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함박눈이 되어 시야를 뒤덮는다.

펑펑 쏟아지다 못해 순식간에 눈보라 치기 시작한 변덕스러운 날씨를 멍하니 바라보던 지수는 등 뒤에서 제 몸을 꽉 안아 주던 이의 품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종일 자고 일어나 한 거라곤 죽을 먹은 것밖에 없는데, 뭐가 그리 피곤한지 또 잠이 쏟아졌다.

조금 전에 떠올렸던 날처럼 창문 사이로 흘러 들어온 눈송이가 졸음에 취한 지수의 이마와 콧등에 닿았다.

어차피 곧 녹을 거라 그냥 방치해도 상관없는데, 강재윤은 굳이 눈송이를 다 털어 주곤 했다.

눈송이뿐만이 아니었다. 제 몸에 묻은 게 뭐든 굳이 그걸 다 하나하나 떼어 주고 털어 주려 했다. 살포시 툭툭 털어 주던 조심스러운 손길을 떠올린 지수는 저도 모르게 힘없이 웃었다.

또 다른 눈송이가 날아 들어와 이번엔 볼에 내려앉았다. 지수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손대지 않고 방치한 채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잠들 무렵, 이제 완전히 의식의 끈을 놓으려는 순간. 매우 부드러우면서 조심스러운 손길이 볼을 보듬었다.

“……!!”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은 지수가 뒤를 돌아봤다.

정하진이 기척 없이 온 줄 알았는데 방엔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방문 사이로 토토와 정하진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혼란스러운 얼굴로 볼을 만지작거리며 방 안을 둘러본 지수는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재윤이 형?”

그 이름을 육성으로 낸 순간, 거실에서 들리던 작은 소음이 뚝 멎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지수는 자리에서 비실비실 일어나 뭔가에 홀린 듯 방 안을 둘러봤다.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 머리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절대 헷갈릴 수 없는 애틋한 손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비실비실 일어난 지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제 볼을 더듬으며 방 안을 둘러봤다.

조금 열린 방문과 창문.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담요와 슬리퍼.

한쪽 구석만 조금 흐트러진 침대.

아무리 유심히 살펴보아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혼란함을 애써 다스린 지수는 다시금 속삭이듯 그를 불러본다.

“……형?”

짧은 순간. 온갖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오래전 시공간을 초월해 책장의 책을 떨어뜨려 메시지를 전했던 SF 영화처럼 혹시 그런 현상은 아닐까?

지금껏 공략도 하지 않은 던전이 자연 소멸한 사례는 없었으니, 어쩜 강재윤은 인간이 아직 이해하지 못할 광활한 우주의 초자연적 현상에 휩쓸린 건 아닐까?

만약 강재윤이 제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라면?

혼자 슬픔에 절어 자기 연민에 허우적거리느라 그 신호를 눈치 못 챈 거라면?

쿵-

쿵-

가슴이 욱신거릴 만큼 심장이 두방망이질 칠 때마다 고막에도 맥동이 울린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달리 한지수의 몸을 들락이는 호흡은 없었다. 지독하게 혼란한 마음에 본인이 숨을 참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한지수는 제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다시 눈알만 굴려 방을 살피다 보니, 약간 열린 창문이 보였다. 한지수는 멍한 얼굴로 벽면 창문으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눈보라가 들이닥치며 시야를 어지럽혀도 한지수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밖에 설치된 투명한 보호 장치가 있는 것을 알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이대로 한 발만 앞으로 내디디면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지수는 그대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작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가 투명한 벽에 부딪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 장치가 발동한 순간, 들이닥치던 눈보라도 투명한 벽에 막혀 그대로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쿵-

쿵-

여전히 심장은 곧 터질 기세로 요란하게 뛰고,

“으윽…….”

무의식중에 내내 숨을 참은 탓에 호흡이 달린다.

왜 이리도 숨이 막히는지 원인을 눈치채지 못해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분명 볼을 쓰다듬은 것 같았는데, 잠결에 착각한 걸까?

지금 어깨에 이 손길도 착각일까?

의구심이 미처 다 피어오르기도 전, 또 다른 부드러운 손길이 이번엔 투명한 벽과 한지수의 이마 사이로 파고들어 고개를 뒤로 젖힌다.

“…….”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몸이 그대로 무너질 뻔했지만, 등 뒤에 버티고 선 단단한 몸에 닿아 나자빠지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헉! 흐윽!”

두서없는 생각이 휘몰아치던 머리가 잠잠해지며 참았던 숨을 터뜨리자 물에서 건져진 사람처럼 숨이 급해졌다.

숨을 참고 있던 건가? 대체 왜?

제 몸인데도 이유를 몰라 혼란한 와중에도 뒤에서 굳건히 지탱해 주는 이를 돌아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기댄 자세로 앞만 보고 서 있자 이마를 덮은 손이 떨어져 내려가더니 편히 기대라는 듯이 허리를 감싸 뒤로 당긴다.

벅찼던 호흡이 다시 안정될 때쯤 창문이 스르르 닫히기 시작했다. 어째 닫히는 속도가 느리다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은 털 뭉치가 거대한 창문을 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꽉 맞물리게끔 닫힌 창문에 비친 정하진은 언제나처럼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지수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고,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지수는 자기가 왜 창밖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는지, 숨은 또 왜 참고 있었는지 일단 아무렇게나 해명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입을 열기 전 그가 먼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밖에 나가고 싶은 겁니까?”

“……네?”

당황한 지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 위험하게 왜 그랬냐고 혼내는 건가 싶어 우물쭈물 망설일 뿐.

창문에 비친 지수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정하진은 제 질문 의도를 오해했다고 파악했다. 그래서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되물었다.

“잠시 바람 쐬러 나갈까요? 날씨가 안 좋긴 하지만, 산책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 지금, 밖에 눈이 저렇게…….”

기가 막혀 말을 맺지 못한 지수가 창밖을 가리켰다. 당신 눈엔 저 눈보라가 보이지 않냐는 듯이. 지수의 당황스러움 가득한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받은 정하진이 창문 잠금 장치를 채우며 덧붙였다.

“뭐, 가끔 인간 눈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

지수는 지금 이 사람이 설마 농담한 건가? 싶어 돌아섰지만, 더없이 진지한 눈빛을 한 남자가 보였다.

‘내가 요즘 너무 누워만 지내서 그런가…….’

잠시 정하진의 눈치를 본 지수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나가면 10초 안에 눈사람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날씨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집에 있어도 된다고, 나갈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데 창문에 찰싹 붙어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토토가 눈에 들어왔다.

“…….”

“토토도 외출을 원하는 것 같군요. 가볍게 나가 볼까요?”

“쮜!”

“…….”

지수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점점 심각할 정도로 짙어지는 눈보라 때문에 지상은 고사하고 근처 다른 빌딩조차 보이지 않았다. 직장인처럼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런 날씨에 자발적으로 밖에 나가는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좋아요. 나가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