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부작용 6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목과 표정을 갈무리한 그는 제 목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침을 크게 삼킨 후 말을 이었다.
“제가…… 조금이라도 희망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정하진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란 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당신이 사과할 일이 전혀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침통한 얼굴로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아니, 침통한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한 게 하나 없는데도, 대체 뭐가 그리 미안한지 죄스러운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지수는 제 손등을 덮은 그의 큰 손 위로 다른 손을 올려 잡으며 말로 제 마음을 표현했다.
“정하진 에스퍼가 왜 사과해요……. 오히려 제가…… 제가 혹해서 이상한 거 물어봐서 죄송해요.”
“…….”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는 건데…… 놀라서 이성적이지 못했어요. 그런 거 당연히 가짜일 게 뻔한데…… 근데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예요.”
“…….”
냉정히 따지고 보면 당연히 가짜일 게 뻔한 이슈가 나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가 휴대폰을 숨긴 토토를 말리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지수는 속상함과 동시에 몹시 부끄러웠다. 자신만 해도 평소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에 쉽게 선동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찼으면서, 정작 저가 그 꼴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에겐 언론 반응 따위에 상처받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1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휘둘린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을지…….
‘언론이라고 무조건 믿고 휘둘리는 사람들 전부 바보라고 생각했으면서…… 내가 제일 한심해.’
아이돌 활동 당시 실장도 항상 강조했다.
지수 넌 솔직히 말해서 똑똑한 편은 아니라, 잘 휩쓸리고 상대 말에 쉽게 넘어갈 수 있으니까 뭔가 말하기 전에 항상 생각하고 말하라고. 아무리 단순한 말이라도 꼭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두 번 이상은 생각하고 말하라고 말이다.
특히 카메라 앞에선 더 조심해야 한다고, 아리송하다 싶으면 그냥 멘트 치는 건 형들에게 맡기라고. 넌 그저 형들 옆에서 예쁘게 웃기만 해도 중간은 가니까, 네가 잘하는 걸 하라던 실장의 충고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았는데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물론 러비스 멤버들은 실장이 하는 말은 그냥 한 귀로 흘리라고 늘 지수를 격려해 주었다. 실장은 원래 자기 마음대로 안 돌아가면 안 좋은 이야기 하면서 상대방 자존감 깎는 소리나 하는 한심한 어른이라며 위로했지만, 지수는 내심 실장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었다.
어려서부터 제 부모조차 늘 똑똑한 형과 저를 비교하며 한심하다는 듯 말하곤 했으니까.
특히 아버지가 술을 마신 날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제 형의 반도 못 따라가는 덜떨어진 자식이라는 욕을 매일 들어야 했다.
안 그래도 과거의 경험에 짓눌린 자존감이 뭉개지다 못해 짓이겨질 법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지수는 조금 걱정이 들었다.
제 팬이라고 주장한 정하진이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실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한지수가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자, 내내 얌전히 있던 토토가 정하진의 몸을 타고 식탁을 내려갔다. 곧바로 거실로 향한 토토는 소파 밑으로 쏙 들어가더니, 낑낑대며 네모난 물건을 밀어냈다.
“찌…….”
“……우리 토토가 숨기는 기술이 좋네.”
휴대폰 위치를 확인한 지수는 정하진의 손에서 제 손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내내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는데, 여전히 얼굴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약간 창백하게 질린 것 같기도 했다.
지수는 제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딘가 아파 보이기까지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제 잘못 하나 없으면서 왜 저렇게까지 미안해하는 걸까?
정하진의 과한 반응에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 지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하진 에스퍼.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이야기는 저도 잊을게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토토와 휴대폰을 함께 들고 온 지수는 조금 전 나눈 대화 주제를 잊기로 결심했다.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세뇌 스킬이 유지 중이라면 알아서 다른 생각을 하도록 했을 텐데…….’
세뇌를 제발 거둬 달라고 울면서 부탁할 땐 언제고 지금은 또 아쉽다니. 아주 배부른 소리가 따로 없었다.
자기가 봐도 어처구니없는 변덕이라는 생각에 자조한 지수는 습관적으로 왼손 중지를 어루만지며 휴대폰을 흘긋 봤다. 전원이 꺼져 새카만 액정엔 정하진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지수는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 숙인 채 괜히 토토를 쓰다듬으며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토야.”
“쮜?”
“아빠 핸드폰 잠시 토토 인벤토리에 넣어 줄래?”
“……쮜!!”
부탁을 이해한 토토는 저 요청이 기꺼웠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휴대폰을 삼켰다.
휴대폰은 그대로 토토의 입 속으로 사라졌는데, 병실에서처럼 볼 주머니가 볼록해지거나 하진 않았다. 인벤토리에 잘 수납된 것을 확인한 지수가 잊지 않고 토토를 칭찬해 주었다.
“고마워. 역시 우리 토토가 최고다.”
“쮜잇!”
지수는 힘없이 웃으며 토토를 더 열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 작고 소중한 털 뭉치를 제외하면, 제 멘탈이 나갔다고 해서 핸드폰을 숨겨 줄 이들은 이제 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토토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휴대폰은 머리가 차게 식을 때까진 저대로 토토에게 맡겨 두고, 부산 던전 공략팀도 제 상태가 더 안정되었을 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 자신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지수가 제 우울함을 달래는 동안 정하진은 죽과 토토 몫의 찐 야채와 과일을 가져왔다. 죽은 지수 몫만 끓였는지 본인 접시엔 단백질이 풍부한 A급 몬스터 고기를 담아 왔다.
“……쮜.”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본 토토가 제 접시를 놔두고 정하진의 접시로 다가갔다. 지수가 놀라 말리려 했지만, 정하진이 먼저 고기를 한 덩어리 썰어 토토의 접시에 올려 주며 말했다.
“토토와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양념은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음…… 토토야? 감사합니다~ 해야지.”
반려 몬스터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니, 누가 들으면 웃을 만한 반응이었다.
지수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 주는 그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또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제법 공손하게 앞발을 모은 토토가 정하진을 올려다보며 힘차게 울었다.
“쮜잇!”
“그래. 먹고 부족하면 말해라.”
“찌!”
“…….”
토토가 고기부터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정하진을 흘긋 봤다.
“…….”
“…….”
아무렇지 않게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고기를 써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지금 이 대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자신뿐인가 싶었다.
침착하게 숟가락을 들고 죽을 입에 넣으려던 지수는 저도 모르게 “큽…….” 하고 작게 침음을 흘려 버렸다.
저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은 토토가 귀를 쫑긋거리며 지수를 바라봤지만, 정하진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제 식사에 집중하며 나지막하게 말을 덧붙였다.
“한지수 가이드도 부족하면 말씀하시죠.”
“……큽, 네, 네. 감사합니다. 부족하면 꼭 말씀드릴게요.”
“예.”
“쮜!”
“……으흡!”
* * *
정하진은 먹자마자 눕는 지수를 말리는 대신 담요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추가로 식사 직후에 누울 거면 몸의 왼쪽이 아래로 가게끔 누우라는 조언까지 해 준 후 토토의 운동을 봐 주기 시작했다.
“토토. 배에 힘을 더 줘야 한다.”
“쮜…… 쮜잇……!”
“배가 땅에 닿으면 운동 효과가 없다.”
“쯔읏……!”
“그대로 유지, 배가 또 나온다. 배에 힘주고. 옳지. 그렇지.”
거실 맨바닥에서 플랭크 자세를 짧은 다리로 힘겹게 유지하는 토토와 그 옆에 엎드린 정하진을 지켜보던 지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넣었다.
잘생긴 얼굴이 바닥에 눌릴 정도로 납작 엎드린 그는 진지한 얼굴로 토토의 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등 펴고.”
“쮜, 쮜익……!”
“엉덩이 내리고. 어깨와 허리를 쓴다는 생각으로 힘을 줘야 한다.”
“찍!!!”
햄스터의 신체 구조상 결국 배가 땅에 닿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정하진은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지수는 저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아가는 토토를 멍하니 바라보다 살포시 눈을 감았다.
죽을 잔뜩 먹어 배 속은 따뜻하고 몸을 덮은 담요는 더없이 포근했다. 바로 코앞에 S급 몬스터와 SS급 에스퍼가 있어서 그런지 두려운 것도 없었다.
노곤함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밥을 먹자마자 누우면 안 된다고 잔소리하며 제 몸을 억지로 일으키거나, 그대로 안아 들고 나가 산책시키던 이의 부재가 유독 실감 났다.
그 어떤 간섭 없이 소중한 이를 떠올린 지수는 담요로 얼굴을 가리려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토토와 정하진이 흘긋 올려다봤지만, 굳이 시선을 맞추지 않고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전 방에서 좀 쉴게요.”
“예.”
“쮜.”
담요를 대충 집어 든 지수는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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