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부작용 5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지수는 점차 눈에 띄게 진정했다.
조금 전엔 덜컥 흔들렸지만,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게 맞았다. 게다가 태산은 중국의 역사가 깃든 장소이자 관광지였다. 그런 중요한 곳을 고의로 폭파해 훼손하면서까지 던전을 감추려는 이유가 있을까? 지수가 생각해도 근거 없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런데요, 정하진 에스퍼. 클리어하지 않은 던전이 터지지도 않고, 몬스터 웨이브도 없이 그대로 소멸한 것도 태종대가 처음이었잖아요?”
“…….”
“……물론…… 이것도 보고하지 않은 나라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은 처음이었잖아요? 그럼…… 같은 던전이 다시 생기는 확률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100%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저도 아는 바가 없으니까요.”
“…….”
한지수는 정하진의 저 대답이 누구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
보통 공략을 마치지 못한 던전은 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터지거나, 혹은 게이트가 벌어지며 안에서 몬스터가 파도처럼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웨이브’ 현상을 보이곤 했다.
저 두 현상 중엔 압도적으로 후자의 경우가 많았다.
다른 나라가 감추고 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지수가 알기로는 태종대처럼 클리어하지 않은 던전이 소멸하며 주변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사라진 사례는 없었다. 게다가 게이트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괴이한 소리를 내는 경우도 말이다.
태종대 게이트 소멸 당시 영상이 공개됐을 때, 해외에서도 저런 괴현상은 처음 본다며 특종으로 다룬 걸 봐선 해외에서도 드물거나 없는 사례일 확률이 높을 터였다.
“그 너튜버 같은 사람들은…… 모든 정보를 오픈하지 않은 나라들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하는 거고요?”
“1%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
지수가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정하진은 하필 던전이 나타난 곳이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이라 더 그런 것 같다며 덧붙였다.
그의 말을 들은 지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곧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주요 국가 중 한국, 미국, 일본, 유럽 연합의 경우 각성자 수나 던전 생태계, 몬스터 정보 등 모두 활발하게 공유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나 중국이나 인도 등 몇몇 국가는 정확한 각성자 수조차 제대로 발표하지 않았다.
현재 공식적으로 밝혀진 SS급 에스퍼는 미국에 둘, 한국의 정하진과 김현아, 그리고 중국에 마지막 한 명까지 총 다섯 명이었다.
다만 중국의 경우, 발표한 총 각성자 수 자체가 워낙 적어 그 많은 인구 중에 각성자가 저렇게 적은 건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실제 확인된 각성자 관련 이슈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등급 속이기였다.
중국에서 A급이라고 발표했던 에스퍼가 미국으로 귀화하며 자신은 사실 S급이었고, 정부의 지시대로 A급 행세하며 활동했다고 밝혔을 땐 적잖은 논란이 있었다. 해당 에스퍼는 미국 각성자 센터에서 재측정했을 때 등급이 S로 측정되었고, 덕분에 중국의 각성자 리스트 조작 의혹이 더 커졌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간 중국의 이슈들을 떠올린 지수는 저도 모르게 무언가 납득한 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중국은 각성자 수도 제대로 발표 안 했으니까…… 던전 은폐도 했을 확률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네요. 아, 물론 중국이 꼭 그렇게 했다는 게 아니라요……. 다른 쪽에서 조작한 전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 너튜버가 한 발언이 언론에 잘 먹힌 것 같다고 생각해요.”
황급히 덧붙인 말을 들은 정하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한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제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지수가 용기를 얻은 듯이 조금 더 말을 보탰다.
“……진짜 이상하지 않나요? 그냥 소멸할 게이트였다면 중국에서 굳이 왜 주변에 폭탄을 인위적으로 터뜨려서까지 던전이 터진 척을 할까요?”
“애초에 폭탄을 터뜨렸다는 것 자체가 너튜버의 주장일 뿐입니다.”
“아…….”
제 생각과 달리 긍정하는 답변이 아닌 칼 같은 부정에 일순 멈칫했지만, 멋쩍은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재차 조심스레 정하진의 의견을 물었다.
“그럼 정하진 에스퍼는…… 인위적인 폭발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마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척, 담담한 척하며 물었지만, 어쩔 수 없이 원하는 바가 묻어나는 애처로운 질문이었다.
아주 작은, 단 1%의 희망이라도 좋으니 긍정적인 답변을 원하면서도 그 희망이 사실이 될 순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한지수의 표정은 좋은 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하진은 부러 평소보다 담담하게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예. 태산 던전 폭발 건은 너튜버의 관심 끌기용 발언일 뿐, 중국의 인위적인 폭발이 아닙니다.”
정하진은 그 너튜버의 주장이 완전 헛소리라고 확신하듯 즉답했다.
그의 단호하면서도 확신이 깃든 대답을 들은 한지수는 조금 전보다 더 진정했는지 훨씬 편해진 호흡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그래도 저런 말이 나온 건 뭔가 작은 거라도 의심 가는 게 있어서 꼬투리 잡은 것 같으니까…… 아예 이런 말이 안 나오게 정확하게 확인시켜 준다면 좋을 텐데…….”
여전히 미련을 보이며 말끝을 흐렸지만, 정하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하게 현 상황을 설명했다.
“태산 지역은 던전 소멸 당시 폭발로 인해 현재 낙석이 심하고, 산사태 위험도 있어서 일대를 봉쇄 중입니다. 복구될 때까진 외부 접근을 막으며 철저히 관리할 겁니다.”
“…….”
“또 중국은 자국 내 사건에 타국 인력을 투입하지 않으니, 파견 조사도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지수는 설령 태산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화 길드에서 비전문가인 자신을 보내 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허탈하게 웃었다.
‘간다고 하더라도…… 보면 내가 뭐 아나, 던전 전문가도 아닌데…….’
인위적인 폭발과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폭발을 제대로 구분할 줄도 모르니, 제가 간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전문가들이 어련히 조사하겠지……, 내가 뭘 안다고…… 싶다가도, 자꾸만 자신 역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만약 진짜 같은 던전이라면…….’
정하진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지수의 손등을 계속 부드럽게 보듬으며 곁을 지켰다. 토토 역시 지수의 손목 근처에 털푸덕 주저앉아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잠시간 혼자 열심히 고민한 지수가 생각을 마쳤는지 고개를 살짝 들고 정하진을 향해 말했다.
“정하진 에스퍼.”
“예.”
“이게…… 좀 이상한 소리라는 거 아는데요. 재윤이 형이……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 가이딩 포션이랑 식량 키트를 많이 사 줬어요.”
그 말을 들은 정하진의 눈매가 조금 움찔하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강재윤 에스퍼의 인벤토리에 식량 키트와 가이딩 포션이 많은 것도 이미 방송에서 언급됐습니다.”
“아…… 그래요…….”
“예.”
“……어…… 그런데요……. 정하진 에스퍼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제가…… 하는 말이 바보같이 들리시겠지만…… 그냥…… 만약에요……. 정말 만약에…… 아까 말한 것처럼…… 1%라도…… 확률이 있진 않을까요?”
정하진은 이번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잔뜩 물기를 머금어 먹먹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런 질문을 하는 그가……, 당장이라도 울고 싶으면서 타인과 얼굴을 마주했다는 이유로 습관처럼 애써 담담한 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선이 저절로 추락했다.
지금 시점에서 정하진이 한지수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도움 안 되는 위로뿐. 이런 상황에서 그가 오랜 습관 때문에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정하진은 시선을 내리깐 채 한지수의 얼굴이 아닌 손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지수 가이드. 쉽게 믿긴 어렵겠지만, 태산 던전은 부산 태종대에서 소멸한 던전과 같은 던전이 아닙니다.”
“…….”
“그리고 앞으로, ……큭!”
“…….”
잠시 말을 멈춘 정하진이 목에 뭐라도 걸린 듯이 작게 잔기침했다. 일순 눈에 띄게 놀란 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하진을 올려다봤다. 딱 봐도 그는 무척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작은 덩어리를 삼켜 낸 듯 정하진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이후에도 목을 가다듬는 그의 표정은 무척 괴로워 보였으나, 고개를 살짝 숙인 탓에 지수에겐 잘 보이지 않았다.
밑에서 정하진의 얼굴을 고스란히 본 토토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그를 살피며 코를 킁킁거리며 의아해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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