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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48화 (48/172)

#047.

부작용 4

꿈이 소실된 자리를 채운 것은 한지수의 방 창문이었다. 눈을 깜빡이자 큰 창밖으로 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비라도 내리는 건지, 아니면 곧 쏟아질 건지, 회색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중충하네.”

하늘이 저래서 그런지 몸도 찌뿌둥한 것 같았다. 전부 다 귀찮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이대로 다시 잠들어 꿈을 이어 꾸고 싶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토토의 훈수 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모른 척하고 다시 잠을 청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토토. 자꾸 당근만 던지는데, 그만하고 여기 내려놔라.”

“찌!”

“잘게 다져서 맛도 나지 않게 익혀 줄 테니까 이리 줘.”

“찌잇!”

토토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한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부스럭부스럭 비닐 소리와 함께 정하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새 당근이라면 여기 얼마든지 있다.”

“쮜, 쮜익……!!”

분하다는 듯이 우는 토토의 소리에 지수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제 반려몬을 달래 줘야 할 것 같았다.

한지수가 비척비척 방에서 나오자 입에 당근을 잔뜩 쑤셔 넣은 토토가 한쪽 앞발을 들고 인사했다.

“찌!”

“토토야, 잘 잤어? 정하진 에스퍼, 잘 잤나요?”

그 물음에 정하진은 잠시간 지수를 바라보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푹 잤습니다. 한지수 가이드는 푹 주무셨습니까?”

“네, 나름대로 잘 잔 것 같아요. 이번 약은 꿈까지 제어하진 않는지, 오래전 꿈도 꿨어요.”

“그렇습니까……. 혹시 꿈자리가 좋지 않다면 꿈을 꾸지 않는 약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 아뇨! 나쁜 꿈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좋은 꿈이었어요. 너무 짧아서 아쉬울 정도로.”

그렇게 대답하며 습관대로 짧게 웃은 지수가 정하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온갖 야채를 잘게 다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죽에 넣으려는 것 같았다. 지수는 앞으로 정하진이 괜한 수고를 하지 않게 지금이야말로 진실을 밝힐 때가 됐음을 깨닫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기…… 정하진 에스퍼.”

“예.”

“어…… 요리해 주시는 거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토토가 자꾸 당근 가지고 귀찮게 굴죠?”

“귀찮은 수준까진 아닙니다.”

“아, 그, 그래요? 어, 음…… 근데…… 토토가 저러는 이유는 사실 저 때문이에요.”

“…….”

“제가 당근을 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토토가 자꾸 저러는 거예요. 그, 그러니까 앞으로 당근은 안 넣으셔도 돼요…….”

“익혀서 특유의 향이 나지 않는 당근은 드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제가 그런 것까지 말했나요?”

당황한 지수가 저도 모르게 바로 되묻자, 정하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러비스 너튜브 자컨(자체 컨텐츠)에서 일본 투어 갔을 때, 자유 시간에 카레 가게에서 그렇게 말씀하셔서 익힌 당근은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까?”

“…….”

정하진의 막힘없는 대답에 지수는 물론이고 토토까지 입을 쩍 벌렸다. 당황해 멍하니 서 있던 지수는 맞은편에 토토의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주황색 당근을 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네. 맞아요. 냄새가 나지 않으면 먹긴 하는데…… 아니, 그래도 어떻게 그걸 다 알아요?”

“팬이니까요.”

“……아…….”

누가 팬이라는 것을 저렇게 다부진 어조로 진지하게 말한단 말인가.

지수는 그가 제 팬이라는 걸 여전히 믿기 힘들었지만, 저렇게까지 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 대충 넘기며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지수의 미지근한 반응을 본 정하진이 뭐 문제라도 있냐는 듯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여 왔다. 기분 탓인지 지금 저 표정도 그렇고, 직전에 팬이라고 말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 뻔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뭐…… 당근 냄새만 나지 않으면 상관없으니 된 건가…….’

어쨌든 요리를 해 주는 건 정하진이니, 그가 해 준 밥을 군말 없이 먹을 생각이었다.

굳이 당근에 대해 말한 이유도 매번 토토랑 마찰이 생기는 걸 막고자 끼어든 것뿐, 당근 특유의 향만 느껴지지 않는다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안 먹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지수는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다시 요리에 집중하는 정하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또 새벽에 운동이라도 하고 온 건지 아침부터 잔뜩 성난 상체 근육 때문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셔츠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저런 남자가 오래전 러비스 자컨까지 전부 다 보고 에피소드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게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물론 대격변 전 러비스는 1군 아이돌답게 많은 팬이 있었다. 그러니 정하진이 팬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어째서일까…….

‘팬이라서 아는 것보단, 마치 주입식으로 열심히 공부한 것 같단 말이지?’

당연히 물증이나 아무런 근거 없이 의심만 하는 거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결론적으로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그리고 따져 보면 그가 제 팬인지 아닌지는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별다른 꿍꿍이 없이 제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본인에겐 좋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린 지수는 어제의 그를 떠올렸다.

매번 침착했던 그가 저도 모르게 제 가이딩을 취하려다 소스라치게 놀랐던 순간을.

“……정하진 에스퍼.”

“예.”

“저 지금도 방사하고 있나요?”

“예.”

“음…… 역시 전 모르겠거든요. 이게 언제쯤 조절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시험해 봐도 될까요?”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잘게 다진 야채를 전부 냄비에 쏟아 넣은 정하진이 불 조절을 한 후 손을 씻었다. 먼저 토토를 식탁에 올려 둔 그는 지수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토토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바라봤지만, 정하진은 저 찌릿한 시선을 은근히 모른 척하며 제 손만 바라봤다.

지수는 잔 흉터가 많은 정하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거친 손이었다. 손바닥과 손등 모두 셀 수 없이 많은 흉터가 있었다.

이 손으로 많은 일을 했겠지. 얼마나 아팠을까. 애초에 이런 흉터가 생길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단지 에스퍼에 대한 가이드의 본능적인 연민이 피어오르며 온갖 안타까운 생각이 밀려왔다.

한지수는 자신이 지금 가이딩을 잘하고 있는지, 제대로 조절하고 있는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 역시 과부하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상했다.

만약 정말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어쩌지. 섣부른 고민이긴 했지만 어쩐지 술렁이는 마음에 그의 손을 천천히 보듬으며 시선을 든 순간, 한지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정하진의 표정은 평소처럼 여전히 무뚝뚝하고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이었지만,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었다. 얼굴색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의 귀와 목부터 쇄골까지 셔츠 밖으로 드러난 부분이 매우 붉었다.

게다가 목과 붙들지 않은 다른 팔엔 핏대까지 서 있었다. 숨을 쉴 땐 평소보다 흉통이 훨씬 더 크게 부푸는 걸 보면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어때요? 방사 말고 접촉 가이딩으로 잘하고 있나요?”

사실 저 반응만 봐도 대답은 들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한지수는 굳이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다른 이유나 짓궂은 장난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본인이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필요했다.

가이드로서 본능이 앞서 그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고 싶었는데, 이 마음이 잘 닿았는지, 결론적으로 이 에스퍼가 제 가이딩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지수에게 내준 손을 바라보던 정하진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굳게 다문 입을 열고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평소에도 느꼈지만,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충만해지는 가이딩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긍정적인 평가였다.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답을 얻은 지수는 여전히 정하진의 손을 맞잡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네요. 음, 그리고 정하진 에스퍼. 이따 같이 외출해요.”

“예, 좋습니다.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누굴 좀 만나고 싶어서요. 아, 제 휴대폰도 주시면 좋고요. 저 언론에서 쥐어 패도 잘 버티는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정하진은 언론도 언론이지만, 한 너튜버 어그로 때문에 난리 난 인터넷 자체를 못 보게 하고 싶었기에 구구절절 해명하는 대신 말을 살짝 돌려 질문했다.

“그렇군요. 만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굽니까?”

“일단 다들 스케줄이 있을 테니까 연락 먼저 해 보고, 시간 맞는 사람부터 만나려고요.”

한둘이 아니라는 의미였고, 정하진은 한지수가 만나고자 하는 리스트가 대충 예상 갔지만,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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