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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47화 (47/172)

#046.

부작용 3

“…….”

침대 시트를 짚은 정하진의 손등과 팔뚝에 힘줄이 빡 돋아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한지수가 약을 먹어 강제로 가이딩이 차단된 상태라는 거였다.

덕분에 이성을 유지한 정하진이 조심스레 지수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무척 서글픈 목소리가 그의 몸을 구속하듯 붙들었다.

“안아 줘…….”

“…….”

어깨를 잡아 떨어뜨리려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러자 제 집사의 잠옷을 잡아당기던 토토가 뽀로로 옆으로 다가오더니 정하진을 올려다보며 눈을 뾰족하게 떴다.

“…….”

“……찌!”

이 상황에 굳은 정하진이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본 토토가 이젠 그의 허벅지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쮜잇!”

“…….”

짧은 앞발로 번갈아 가며 때릴 때마다 몸이 좌우로 마구 흔들렸는데, 덕분에 어지러웠는지 뒤로 발라당 자빠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일어나 뒷발 차기까지 야무지게 날렸다.

“쮜!”

“……큼. 알았다. 걱정하지 마라. 한지수 가이드.”

“……으응…… 왜?”

“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싫어……. 형이랑 잘래…….”

“……일단, 잠시 몸을 안겠습니다.”

“응…… 안아 줘…….”

울먹울먹 뭉개지는 발음으로 아파도 상관없다고, 망가져도 좋으니 꽉 안고 놓지 말아 달라고 중얼거린 한지수가 몸을 더 찰싹 붙이며 단단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왼팔로 한지수의 등을, 오른팔은 엉덩이 밑을 받쳐 단단히 안은 정하진이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너른 품에 달랑 안긴 지수는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뜻을 몸으로 피력하듯 정하진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놓지 말라고 속삭이며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금세 옆방에 도착한 정하진은 품에 안은 지수를 침대에 눕히려 했지만, 울음을 삼키며 같이 눕자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일순 몸을 굳혔다.

“…….”

그는 이 울음기 가득 머금은 애원이 저를 향한 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구태여 난 네가 원하는 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한지수를 안은 상태로 천천히 침대에 옆으로 누워 팔베개해 주었다.

느릿하게 등을 쓸어내리며 어서 자라는 듯이 보듬자, 단단한 팔뚝에 볼을 비비며 눈물을 훔쳐 낸 한지수가 정하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하진은 별다른 말 없이 젖은 눈가를 조심스레 손으로 닦아 주었다.

한지수는 자연스럽게 그 손길에 볼을 비비며 몸을 더 밀착하려 들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붙어 있으려는 반응을 확인한 정하진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이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

얼굴에서 손이 떨어지자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는 한지수의 눈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짧게 몇 초 망설인 정하진은 이내 결심한 듯, 한지수의 가느다란 목을 살포시 잡아 봤다.

그대로 손에 살짝 힘을 줘 봤지만, 한지수는 반항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풋 미소 지으며 왜 그러냐는 듯이, 이건 무슨 행위냐는 듯 순수한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적당한 악력이 유지되자 조금 힘든 듯 작게 기침하며 어깨를 살짝 움츠리다가도 곧바로 또 생긋 미소 짓는다. 제게 닿는 시선은 여전히 탁하고 초점 없었지만,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다.

눈앞의 대상이 누군지 제대로 구분도 하지 못하면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하진은 입이 썼다.

“…….”

지금은 이미 떠나고 없지만, 한때는 제게도 저를 이렇게 바라봐 주던 이가 있었다.

이 무방비한 남자를 보고 있자니, 예전엔 그저 추측만 했던 것이 점점 가시화되는 듯싶었다. 강재윤과 한지수가 비밀 연애를 했던 게 아니냐고 단순하게 말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마주하자 비로소 한지수가 강재윤을 잃고 그토록 처절하게 괴로워했던 이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뿌리 깊은 애정. 본인이 약해졌을 때조차 곁을 허락하는 관대와 수용. 상대가 자신을 절대로 해칠 리가 없다고 믿는 굳은 신뢰.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결론으로 도달했다.

한지수는 자신이 반려를 잃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형…… 빨리 안아 줘.”

“…….”

목을 쥔 손에 힘을 푼 정하진이 한지수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러자 작게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지수는 고개를 살짝 들고 정하진의 손바닥에 간질이듯 입을 맞추고 안겨 온다.

강재윤은 알았을까? 자신이 한지수와 각인했다는 것을?

가이드인 한지수는 모를 수 있어도, 가이딩 받는 입장의 그는 알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두 사람은 평생 함께할 거라는 굳은 자신감인가?

“…….”

아니면…… 정말 낮은 확률이긴 해도, 그가 몰랐을 가능성도 있긴 했다. 한지수에 대해 여러 기록을 뒤지며 조사한 바로 두 사람은 대격변 첫날부터 함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암흑기라 불리는 끔찍한 시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각성자라는 개념이 없던 혼돈의 시기를 견디며 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각인되었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서로 모르는 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애초에 둘은 오래 알고 지냈고, 워낙 애틋한 관계였으니 그저 관계가 더 돈독해졌다고 여겼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쪽이 더 가능성 있었다.

큰 지진이 연이어 일어나고, 땅이 갈라지고 싱크홀이 생기고 허공에 균열이 생기며 무시무시한 괴물이 쏟아져 나오는 나날.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을 갖게 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여러 분쟁과 폭력 사태. 식량과 괴물을 피할 수 있는 쉘터를 두고 벌이는 싸움……. 온갖 악조건 속에서 가장 의지하는 상대와 생사를 넘나들고 교감하며 저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서로의 영혼을 묶은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한지수가 이렇게까지 자신이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를 가까이서 보고 나서야 확신이 든 정하진은 눈을 내리뜬 채 한지수의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약에 완전히 취한 상태를 보아하니 어차피 잠에서 깨어나면 지금 상황은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대로 그가 푹 잠들었으면 했다. 비록 온전한 정신이 아니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부질없는 시간이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깊은 무의식의 어딘가, 저 구석이라도 좋으니 한지수가 강재윤의 품에 있었다는 망각의 조각을 하나 심어 두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반려를 잃은 이 가여운 남자에게 작은 위안을 줄 수 있다면, 뭐든 기꺼이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정하진은 잠결에 제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한지수의 요망한 손길을 모른 척해 주었다.

* * *

1월 중순의 겨울.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 소수의 생존자들은 저들이 내는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산속 계곡 근처에 자리 잡고 모닥불 주위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추락한 비행기 잔해에서 몇 개 가져왔다며 건너편 여성이 준 항공 담요를 덮은 채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한지수는 보글보글 끓는 죽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닥불 위에 올려 둔 단단한 편수 냄비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멀쩡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찌그러져서 영 볼품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냄비 바닥에 구멍이 난 것은 아니라 여전히 음식 만드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돌멩이 따위로 밑을 고정해 균형을 맞추는 게 아니면 제대로 쓰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져 버렸다.

-……그 이상한 고릴라 같은 괴물 팰 때, 냄비로 패는 게 아니었는데.

-하하. 그래도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았잖아. 그리고 원래 이런 냄비에 해 먹는 음식이 더 맛있는 법이야.

강재윤의 말에 한지수는 푸흐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춥다는 핑계로 그에게 더 가까이 기대앉아 손을 잡았다.

강재윤은 네 손이 너무 차다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사이사이 얽어 깍지 껴 잡고 반대편 손으로 손등을 비벼 주며 호호 불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맞은편에 앉은 노부부와 아주머니들이 두 사람은 참 사이가 좋다며 한두 마디씩 했다. 닥친 처지에 비해 평온한 웃음소리는 또렷하게 들리는데 그들의 얼굴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한지수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다른 이들의 이목구비가 또렷하지 않아도 대충 넘겼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들을 떠올릴 시간에 강재윤과 손을 잡고 이렇게 있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평생.

그런 지수의 마음을 모르는지, 강재윤은 무심한 말을 뱉었다.

-지수야. 슬슬 일어날 시간이야.

-……알아. 그래도 형이랑 더 있을래.

조금만.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는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젠 강재윤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졸졸졸 흐르던 계곡의 물소리는 언제부터인가 들리지 않았고, 밤의 숲은 뭉개져서 안개처럼 흐려져 버렸다.

지수의 뇌가 이를 인식한 순간 꿈의 모든 배경이 전반적으로 옅어진다. 이대로 깨고 싶지 않다고 바라면 꼭 정신이 맑아지고, 보이는 풍경도 바뀌게 된다는 것을 지수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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