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부작용 2
“……저기…… 정하진 에스퍼.”
“예.”
“……음, 물 정도는 제가 알아서 챙겨 마실 수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돼요.”
“혹시 불편합니까?”
“아뇨, 오히려 고맙고 감사해요. 그런데, 미안하잖아요. 제가 물도 못 떠 마실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고…….”
“그런 이유라면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챙겨 드리겠습니다. 한지수 가이드는 수분 섭취가 너무 적으니까요. 그리고 미지근한 물이 몸에도 좋습니다.”
“…….”
움찔.
굳이 물을 스스로 떠 마시겠다는 이유를 들킨 지수가 옆에 앉는 정하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곧은 자세로 앉아 지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가 얼음물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 그래요……?”
“예. 미지근한 생수는 비려서 마시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 맹물보단 차 종류나 커피를 더 좋아하는 것도 압니다. 차는 쓴 차보다 고소한 차와 가향 차를 좋아하는 것도 압니다.”
“……!!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요?”
세세한 취향 파악에 놀란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정하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팬이라고.”
“……아…… 하하…….”
저 얼굴로 하는 말은 다 진실처럼 들리는데, 유독 자신의 팬이라는 말만큼은 믿기 힘들었다. 아마 이것도 따로 조사한 것 같다고 생각한 지수가 민망함에 괜히 미지근한 보리차를 홀짝였다.
“으…….”
미지근한 물이 아무리 몸에 좋아도, 지수는 역시 얼음 동동 띄운 차갑고 청량한 물이 더 좋았다. 그래도 굳이 가져다준 성의를 봐서라도 몇 모금 마시는 데 성공했다.
컵을 내려 둔 지수는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처음 리모컨을 잡았을 때 정하진이 제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지만, 다른 채널을 틀지 않고 바로 넷플러스를 실행해 최신 영화 목록을 뒤지며 말했다.
“정하진 에스퍼. 같이 영화 볼래요?”
“좋습니다.”
“어떤 장르 좋아하세요?”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봅니다.”
지수는 뭐든 다 좋다는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몰라 무난하게 대격변 전부터 쭉 이어진 시리즈 영화를 골랐다.
원래도 좋아했던 미국의 거대 히어로 세계관에서 새롭게 나온 영화였다. 시리즈 중 최신작답게 돈 많이 바른 화려한 전투 신이나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시리즈의 주인공들의 깜짝 등장 등 볼거리가 다양했다.
영화는 주인공의 선택으로 대형 사고가 터져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시공간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다른 히어로를 찾아가 무사히 시간을 되돌리지만, 결국 뒤틀린 과거 때문에 미래에서 또 다른 희생이 따르게 된다.
이미 다른 영화에서도 다뤘던 소재고, 특별할 것 없이 흔한 전개를 심드렁하게 감상하던 지수는 문득 자신의 손끝이 간지러워 시선을 내렸다. 정하진의 가운뎃손가락이 제 새끼손가락에 살짝 닿아 있었다.
손을 빼지 않은 것을 거부하지 않는 거라고 판단한 건지, 그의 긴 중지가 슬그머니 지수의 새끼손톱 위로 올라와 손가락 마디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
시선만 내리고 있던 지수가 아예 정하진을 향해 고개 돌렸다. 그러자 TV에 집중하던 그 역시 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맞췄다.
“…….”
“……? 왜 그러십니까?”
뭐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물은 정하진은 지수가 시선을 내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크게 당황한 듯 황급히 손을 치웠다. 먼저 건드린 건 저면서 왜 저리 놀라나 싶었던 지수는 문득 자신이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아, 맞다. 저 지금 방사 가이딩 하고 있었죠?”
“……예. 죄송합니다. 무의식중에 제가…… 아니, 정말 죄송합니다.”
자신이 방사 가이딩 중인 것을 재차 상기한 지수는, 정하진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정중히 사과하려는 고지식한 에스퍼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아예 그의 손을 잡았다.
정하진의 팔이 흠칫 떨리는 게 보였지만, 지수는 손을 떼지 않고 힘줄이 굵직하게 돋은 그의 거친 손등을 보듬으며 슬그머니 손바닥 아래로 제 손을 밀어 넣었다.
“…….”
“……손잡아도 돼요. 어차피 제가 조절 못 하고 질질 흘리는 건데, 아깝잖아요.”
“…….”
한지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 반응을 지켜본 정하진 역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제 손바닥 밑으로 파고든 한지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향기처럼 은은하게 퍼지던 방사 가이딩이 순식간에 맞잡은 손으로 집중되더니 접촉한 부위를 타고 정하진에게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선명한 기운의 가이딩에 정하진의 눈썹이 꿈틀댔다. 분명 한지수의 손을 제가 잡고 있는데도, 그의 부드러운 손이 제 손등부터 팔뚝을 훑으며 어깨까지 타고 올라와 부드럽게 제 몸을 보듬는 것처럼 노골적인 가이딩이 이어졌다.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었지만, 막상 한지수가 영화에 집중한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이 역시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정하진은 한지수의 가이딩 기운이 제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볼을 쓰다듬고, 간질이고, 그대로 귓가를 스칠 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반대편 손을 주먹 쥘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기운이 느릿하게 뒷덜미를 쓰다듬다가 다시 앞으로 이동해 쇄골로 내려올 즘엔 영화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이젠 영화 내용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한지수의 손길, 아니. 한지수의 가이딩에 온 신경이 쏠렸다.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입술을 달싹인 정하진은 가능하다면 잠시만 당신을 끌어안아도 되겠냐고 묻고 싶었다.
길게는 말고, 잠시만. 아주 짧게 몇 초라도 끌어안고 싶다고, 한지수 가이드 당신만 괜찮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허락해 줄 수 있겠냐고 굳이 애절한 표정으로 묻고 싶은 에스퍼로서의 충동이 들끓었다.
그러자 일순, 본능적으로 가이드를 원하게 된 에스퍼를 농락하듯, 그의 탄탄한 몸을 어루만지던 가이딩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맞잡은 손에만 은은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덕분에 갈증이 한층 더 짙어진 정하진이 입술을 달싹이며 한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저 멀리 자신의 방문 뒤에 숨어 얼굴을 반만 내밀고 있는 털 뭉치와 눈이 마주쳤다.
“…….”
“…….”
뾰족하게 눈을 뜬 토토는 작은 앞발로 자기 눈을 톡톡 가리키더니, 이번엔 정하진을 향해 삿대질하듯 톡톡 허공을 쿡쿡 찔렀다.
정하진은 저 토실토실한 햄스터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반대편 손으로 소파 팔걸이를 쥐어짜며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 * *
깊은 밤.
정하진은 한지수가 새로 바꾼 약을 먹고 별 탈 없이 잠들어 가이딩이 더는 새어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도 잠시간 그의 곁에 서 있었다.
토토가 빨리 불이나 끄고 나가라는 뉘앙스로 찍찍 울어서 쫓기듯 나오긴 했지만, 한지수와 떨어지는 행위가 본능적인 아쉬움을 끌어낸 것은 명확했다.
정하진은 이 아쉬움이 자신의 이성이 아닌, 에스퍼로서 가이드를 원하는 본능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때문에 본능이라는 그럴싸한 이름 뒤에 숨은 짐승 같은 욕구를 씻어 내고자 방에 딸린 욕실에서 꽤 오랜 시간 찬물로 샤워해야만 했다.
제 스킬까지 더해 몸에서 냉기가 뿜어 나올 정도로 체온을 낮추고, 그것도 모자라 대충 바지만 걸친 그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웠다. 혹시라도 한지수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할까 봐,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탓인지 골이 살짝 지끈거렸다.
이번엔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훅 들어온 탓에 동요했지만, 앞으로 계속 신경 쓰면 오늘 같은 일은 없을 거라고 여기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려던 찰나, 정하진의 팔이 허공에서 멈췄다. 한지수의 방 쪽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제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방문을 바라보자, 토토가 찍찍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반려몬의 애타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노크도 없이 정하진의 방문을 열었다.
“……한지수 가이드?”
“…….”
비틀거리며 천천히 다가온 한지수는 약에 취해 눈에 초점이 없었다. 멍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정하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넓은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한지수 가…….”
“형…….”
“…….”
나지막하면서도 애절한 부름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침대 위로 올라온 토토가 찍찍대며 집사의 잠옷을 잡아당기는 데도 이젠 아예 정하진의 목을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재윤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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