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45화 (45/172)

#044.

부작용 1

정말 문제가 없는 게 맞는 걸까 싶었지만, 정하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제 의지와 관계없이 고개가 끄덕여지고 입에선 저런 실없는 대답이 나왔다.

지수는 자신이 머리로 생각하고 대답한 게 아니라, 그의 얼굴에 홀려 휩쓸리다시피 긍정해 버린 걸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정하진은 지수가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며 자연스레 컵에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김현아 에스퍼는 한지수 가이드 곁에 100% 신뢰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능력 있는 사람을 붙이길 원하고.”

“…….”

“아시다시피 저는 그럴 능력이 충만합니다.”

“…….”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지수 가이드께서도 제가 싫은 게 아니라고 하셨으니.”

“…….”

“기쁜 마음으로 한지수 가이드와 함께하겠습니다. 전 한지수 가이드의 팬이니까요.”

“…….”

맑은 물이 절반 조금 넘게 채워진 컵을 바라보던 지수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다 저도 모르게 쓰게 웃어 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제 팬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놀란 제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한 선의의 거짓말일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저를 돌보려는 이유가 100% 납득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정하진은 휴식기 동안 제 곁에 있길 원한다. 그리고 자신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며 그가 싫지 않다. 이 사실만 두고 봤을 때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엔 그의 얼굴을 보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짧게 생각하고 결론 내린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한 정하진은 주머니에서 토토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둘이 대화하는 내내 조용해서 자는 줄 알았는데, 정하진의 손을 짚고 선 토토가 말똥말똥한 얼굴로 지수를 바라봤다.

“토토야~ 잘 잤어?”

“쮜-!”

“어이구, 잘 잤어~ 아빠랑 미음 먹을까? 토토 미음 안 먹어 봤지? 이거 먹어 볼래?”

“……쮜?”

지수가 숟가락을 들고 미음을 떠 보여 주자, 토토톳 가까이 다가온 토토가 코를 씰룩였다.

그러다 일순 미간을 찌푸리며 미묘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아예 미음에게서 숨겠다는 듯이 정하진의 손바닥 아래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손을 살짝 오므려 토토에게 임시 은신처를 만들어 주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토토는 저 말고 다른 남자에게는 저렇게 잘 안 가는데 신기하네요.”

지수의 중얼거림을 들은 정하진은 토토가 안락하게 은신할 수 있도록 손을 조금 더 둥글게 오므리며 끄덕였다.

“예. 토토도 저를 허락한 것 같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지수 가이드.”

“……네. 정하진 에스퍼. 잘 부탁해요.”

이제야 그와 제대로 인사를 나눈 것 같은 새삼스러운 기분에 푸스스 웃은 지수가 미음을 한 입 떠먹었다. 속을 달래기 위해 만든 미음은 굉장히 담백한 맛이었다. 좋게 말하면 담백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

할 수만 있다면 저도 토토처럼 그의 손 아래로 도망쳐 숨고 싶은 맛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정하진이 만들어 준 음식 중 유일하게 맛없는 음식이 될 것 같았다.

정하진의 감독 아래 미음을 한 사발 해치운 지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토토와 사진을 찍었다. 개인 SNS에 올릴 안부 포스팅을 위한 사진이었다.

제 휴대폰은 토토가 어딘가에 꼭꼭 숨긴 터라, 사진 촬영과 업로드 모두 정하진의 휴대폰으로 진행했다.

SNS를 하지 않는 그의 휴대폰에 처음으로 인별을 설치하고 로그인까지 한 지수는 어쩐지 자신이 정하진의 깨끗한 휴대폰에 오점을 남긴 기분을 느꼈다.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직접 게시글을 작성하려 했지만, 사진과 올릴 내용은 이미 평화 길드 언론 대응팀에게 받은 게 있다며 그가 대신 올려 주었다. 받은 내용이 있다는 것치곤 직접 타이핑해 작성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음…… 아무래도 언론에서 열심히 까고 있나 보네…….’

지수는 정하진과 토토가 제게 폰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를 그렇게 결론 내렸다.

뇌수면 치료를 하는 동안 뭔가 시끄러운 이야기가 나왔거나, 언론이 한지수라는 이름 석 자를 먼지가 될 때까지 두드려 패는 상황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 저 둘이 갑자기 저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이돌 활동을 하던 당시에도 종종 이런 경우가 있었다.

가끔 회사나 그룹에 이슈가 생기면 형들은 개복치 같은 멘탈을 가진 막내가 일부 팬 반응에 상처받을까 봐 휴대폰을 숨겨 두곤 했다.

그리곤 그날 종일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어 주고, 소화가 되면 격한 안무 연습으로 지수의 진을 쏙 빼놓은 후, 뜨거운 물로 벅벅 씻기고 기절시키듯 재웠다.

잠시 그리운 추억을 떠올린 지수는 현실로 돌아와 지금 상황을 유추해 보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이 입원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고, 그로 인해 온갖 걱정 많은 기자들의 의견이 쏟아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너튜브는 말할 것도 없고, 평화 길드에서 고작 B급 가이드인 한지수에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는 반응도 있을 것 같았다.

‘시간 지나면서 나아질 줄 알았는데 더 심해졌나?’

태종대 사건 직후 집에 틀어박혔던 동안에도 휴대폰은 가끔 확인했었다.

딱히 다른 이들이 보낸 메시지를 보거나 한 건 아니었다. 매일 특정 시간 도착하는 상담 선생님의 메시지에 꼬박꼬박 답하는 것 외엔 오직 강재윤과 톡방에 들어가 주고받은 메시지를 죽죽 올리며 읽어 보고, 그와 찍은 사진을 보는 것 정도였다.

맞춰 둔 알람이 울리면 토토 밥을 주고 엎어져 울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지면 대충 두유나 던전 식량으로 나온 에너지바로 식사를 때우고 울고, 다시 알람이 울리면 토토 밥을 챙기고 널브러져 울고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문득, 제정신이 아닌 상태임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가끔 강재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보낸 메시지 옆엔 전부 읽지 않았다는 표시로 숫자 1이 쓰여 있었다.

이후 결국 한국대 병원에 입원하고, 정신계 스킬 치료를 받은 후엔 강재윤과 톡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문득문득 떠올라 들어가서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라도 먹을라치면, 세뇌 스킬이 발동해 우선 휴대폰을 넣고, 다른 쪽으로 신경을 쏟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휴대폰을 멀리하던 지수는 어느 날, 강재윤에 대한 생각 없이 우연히 자신의 인별에 알림 배지가 999+ 이상 찍힌 걸 보고 들어갔다가, 100년 정도 더 장수할 것 같다는 감상을 받고 끄기도 했었다.

SNS엔 물론 지수를 응원하는 격려의 글이 훨씬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슴 시리게 만드는 말도 너무 많았다. 더 속상했던 것은 지수도 어느 정도 그들의 말에 공감한다는 거였다.

강재윤과 한지수.

둘 중 꼭 죽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신이 맞다고,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맞장구쳐 주고 싶었다.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르는 당신들보다 내가 훨씬 더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적어도 강재윤이 그렇게 가선 안 되는 거였다고 대댓글을 달아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다.

슬픔에 절은 와중에도 실낱같은 이성이 남아 있는 데다가 세뇌 스킬이 금세 우울을 분산시켜 그런 답변을 올리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했다. 둘 중 하나라면 그건 바로 자신이었어야 한다고.

‘시간을 돌리는 아이템은 왜 없냐…….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대격변 이후 인류가 던전을 공략하고 클리어하기 시작하며 온갖 종족과 아이템에 대한 정보가 무수히 쏟아졌지만, 유독 ‘시간’ 관련 아이템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간을 다루는 에스퍼 사이에서 몇몇 공간의 균열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걸 봐선, 아마 누군가 그런 아이템을 구해 이미 사용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간을 되돌리는 아이템은 구경한 적이 없었기에 저 가설은 그저 그들만의 헛소리로 무시되어 왔다.

한지수가 세상에 진짜 그런 아이템이 존재한다면 자신은 망설이지 않고 당장 썼을 거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얌전히 앉아 있던 토토가 소파를 내려가더니 갑자기 우다다 달리기 시작했다.

“토토야. 쳇바퀴 꺼내 줄까?”

“쮜이잇-!”

잠시 멈춰 서서 괜찮다는 듯이 대답한 토토가 거실 끝에서 지수의 방까지 우다다 질주했다. 침대 구석 끄트머리까지 달려간 토토는 다시 거실로 달려 나와 이번엔 반대편 끝을 찍고 턴 하며 정하진의 방으로 달려갔다. 지수의 곁을 지키고 있던 토토가 떨어지니 이번엔 정하진이 다가왔다. 그는 보리차를 담은 컵을 내밀며 옆자리에 앉았다.

“……? 아,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정하진이 준 컵은 어중간하게 미지근했다. 컵에서 느껴지는 보리차의 온도를 확인한 지수가 조심스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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