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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44화 (44/172)

#043.

뭔가 사정이 있을 게 분명하다

침만 안 흘렸지, 입까지 쩍 벌리고 대놓고 감탄했으면서, 놀라서 그랬다며 굳이 핑계를 덧붙이며 다시 흘긋 바라보자 정하진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딱히 미소 짓는 것도 아닌데, 그의 눈빛이 다정해진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정말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얼굴을 보고 이렇게 감탄하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빤히 봤죠…….”

참으로 칠칠치 못하고, 그에게 실례되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 지수가 급히 사과했다.

직업상 잘생긴 사람은 꽤 많이 보고 살았는데도 이런 실례를 저지른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며 속으로 자책하고 있는데, 앞에 앉은 남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이런 반응 정도는 귀엽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한결 유해진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익숙합니다.”

“…….”

정말 괜찮다고 한 말에 지수가 오히려 더 수치스러워하자 그는 목소리를 더 부드럽게 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그리고 저야말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체를 숨겨서 죄송합니다.”

“……아뇨…… 그런 것치고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는데요, 뭐…… 음…… 사정이 있었겠죠, 근데 왜…… 음……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어, 아니, 그러니까, 여기 계신 게 싫다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왜…….”

쓰급이나 되는 귀한 몸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냐는 질문을 어떻게 해야 부드럽게 들릴까 싶어 횡설수설하고 있으니, 정하진이 알아서 고민을 덜어 주었다.

“쉬고 싶었습니다.”

“…….”

“한지수 가이드 옆에서요.”

“……네?”

일순 표정 관리를 못 해 뭔 소리야. 딱 이렇게 쓰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눈을 맞춘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미 눈치는 채셨겠지만.”

“……?”

“제가 한지수 가이드 팬입니다.”

“……???”

정하진은 ‘대체 뭘 눈치챘단 말인가. 전혀 몰랐다.’ 딱 이렇게 써 둔 것 같은 표정으로 얼빠진 지수를 향해 자원한 이유를 조금 더 덧붙였다.

대격변 이후 5년간 쉴 틈 없이 달려온 터라 조용히 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한지수가 가이드 폭주에 시달리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 본인이 도움 될 만한 스킬을 보유한 데다가, 김현아가 믿을 만한 능력자를 찾고 있기에 자원했다.

정체를 굳이 숨긴 이유는 자신이 정하진이라는 것을 알면 한지수가 부담감에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아서 김현아와 말을 맞췄다고 털어놨다.

“……그게…….”

“진짜입니다.”

“……어, 음…… 그…… 네…… 팬이시라고요……. 자원하셨고…….”

“예. 맞습니다.”

얼떨떨했다. 내용만 들으면 대단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그가 러비스 한지수의 팬이어서, 또 제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알고 휴식기를 가질 겸 자원했다, 정도로 들렸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팬은 전혀 아닌 것 같지만, 아니 이건 그렇다 쳐. 명색이 쓰급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지수는 일순, 그가 쓰급인 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졌다. 애초에 그는 각성자이기 전에 사람이었다. 쉬는 동안 뭘 하든 그건 정하진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도움이 필요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주변의 믿을 만한 사람들이 나서서 저더러 문제가 있다고 하고, 쉬어야 한다며 걱정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음…… 네. 일단, 알겠어요. 조금 얼떨떨하긴 한데…… 그, 음…… 네.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아닙니다. 한지수 가이드가 호전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 네…… 조금…… 과분한 관리를 받는 것 같긴 하지만요…….”

민망함에 괜히 할 말이 없어 그렇게 말하자, 정하진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분한 게 아닙니다. 아직도 가이드 폭주 증상이 증명되지 않았다고들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꼭 눈에 보여야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

“주제넘은 참견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한지수 가이드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당황한 지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가이드 자살이 워낙 많아서 잊고 있었는데…….’

워낙 빈번한 일이라 까맣게 잊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3년 전에 매칭률이 88%나 되는 페어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였다.

가이드 폭주 증상에 시달리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렸던 정하진의 페어 가이드는 그가 S급 던전에 들어간 사이 자택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정하진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의 편지를 남긴 채.

현재도 가이드 폭주 증상이 제대로 인정받은 건 아니지만, 당시엔 훨씬 더 심각했다. 무기력해하고 힘들어하는 가이드들이 생기면 일단 주변 동료들로부터 비난이 시작됐고, 이어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 인터넷에 공론화되는 등 사회적으로 몰매를 맞았다.

그중 정하진의 페어 가이드는 유명세 때문인지 몰라도 유독 심하게 공격당했다. SS급 에스퍼의 페어면서 번아웃으로 일을 쉬는 게 말이 되냐며 인터넷 뉴스에 하루를 거르지 않고 그의 이름 석 자가 오르내렸다.

저런 뉴스가 쏟아지면서 시민들 사이에선 정신력이 없다며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가 만들어 두기만 하고 거의 하지도 않는 SNS에는 허구한 날 악플이 달려 결국 댓글 창도 전부 막았지만, 온갖 곳에서 비난은 지속됐다.

물론 정하진은 늘 제 페어 가이드를 배려해 충분히 쉬도록 했고, 언제나 자신이 권한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그럼에도 비난의 화살은 정확하게 그의 가이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무려 SS급의 페어 가이드로 편하게 살면서 남들은 다 힘들어도 참고 버티는 걸 혼자 힘들다고 유난 떨며 버티지 못한다고 매도하고 그를 정신력 없는 나약한 존재로 취급했다.

유독 한 개인을 향한 여론이 과열되자, 이례적으로 정신계 전문가들이 에스퍼나 비각성자에 비해 가이드의 자살률이 월등히 높은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다들 그냥 감수성 예민한 우울증 환자로만 취급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사람이 아직 월등히 많지만 말이다.

‘정하진 에스퍼는 그 후로 페어 가이드를 안 만들었지…….’

매칭률이 높거나 상성이 잘 맞는 가이드와 에스퍼는 ‘각인’이라는 정신적인 깊은 교류를 통해 페어가 된다.

이 경우 가이드가 가이딩을 하지 않아도, 각인하게 된 가이드와 에스퍼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에스퍼의 폭주 수치가 소폭 줄어들거나, 에스퍼가 힘을 개방해 능력을 사용해도 폭주 게이지가 현저히 늦게 오르는 현상이 여러 사례에서 확인되었다.

모든 페어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각인하게 되면 두 사람이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정신적으로 워낙 깊게 연결되기 때문에 대부분 서로를 끔찍하게 아꼈고, 상대를 온전히 이해했으며,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구는 이들이 8할 이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른 연인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페어끼리 결혼까지 골인하는 게 보편적인 일이었다.

반면 이러한 이유로 매칭률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페어가 되는 것을 꺼리는 예도 있었다. 이는 페어인 두 사람이 무조건 커플일 거라고 확신하는 사회적인 시선 탓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페어를 잃으면 그 상실감에 제대로 살 수가 없으니까…….’

각인으로 깊게 연결되고 친밀한 관계일수록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남은 쪽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반쪽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과 누구도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끝없는 슬픔, 그리고 절망감이 홀로 남은 이를 미치게 만들었다.

지수는 강재윤을 잃은 자신도 이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는데, 자신의 반쪽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눈앞의 남자가 새삼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제 짝을 잃고도 묵묵히 버티면서 자신이 할 일을 하며 살아온 남자가.

생각보다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비극을 떠올린 지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눈앞의 남자가 곤란해하는 것을 대번에 파악한 정하진이 먼저 운을 뗐다.

“그 외에도 복합적인 이유가 얽혀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지수 가이드만 괜찮으시다면, 휴식기 동안 제가 곁에 있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지수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정하진이 곁에 있다고 제 슬픔이 나아질까? 정말 SS급 에스퍼인 그를 단순히 자기처럼 별것 아닌 B급 가이드 하나 구제하겠다고 묶어 둬도 되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게 하려는 찰나, 정하진이 말을 이었다.

“한지수 가이드는 혹시 제가 불편하거나 싫으신 겁니까?”

“……!?”

화들짝 놀란 지수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누가 갑자기 내가 싫으냐고 물었을 때 단번에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 지수는 그가 싫은 게 아니었다. 단지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다. 급히 부정하느라 세차게 고개 젓는 지수를 본 그의 눈매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럼 문제없겠군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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