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저 얼굴로 거짓말을 한다면
‘벌써 어둡네.’
지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창밖은 이미 어두웠고, 자신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지수는 제 몸을 덮은 두툼한 담요와 배 위에 엎드려 잠든 토토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까와 달리 토토의 홀쭉해진 볼을 보고 주변을 살폈지만,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숨겼나 보네.’
몸에 힘을 빼고 편히 누운 지수는 기억이 비는 구간이 없는지 확인하고자 오늘 일과를 순차적으로 떠올렸다.
꿈에서 깬 후 퇴원 직전에 최성훈 교수와 마지막으로 면담하고, 성하진이 가져다 둔 차를 탔던 것까진 기억났다. 숙소로 돌아갈 땐 날아가지 않아서 아쉽다고 그에게 시답잖은 농담했던 것도 같기도 한데, 이후 대화한 기억이 없었다.
다행히도 중간에 기억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듯 사라진 게 아니라, 서서히 끊긴 걸 보면 아마 퇴근 시간이라 막히는 차 안에서 잠들었던 것 같았다.
그대로 잠든 자신을 성하진이 소파에 옮겨다 두고 이 담요를 덮어 준 것으로 추정한 지수는 조금 뒤척이며 주변을 살폈다.
성하진은 거실에 없었다. 주방에도 없는 걸 보면 아마 자신의 방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 씻은 건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그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검은색 운동복 바지와 몸에 붙는 흰색 반소매 티를 입고 나온 그를 본 지수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흘릴 뻔했다. 딱 보기에도 몸이 좋은 건 알았는데, 저렇게 붙는 옷을 입고 있으니 근육 라인이 다 보여서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시선을 흐렸다.
“일어나셨군요. 미음을 만들어 뒀습니다. 바로 드릴까요?”
“……아, 그전에 먼저 씻고 싶어요. 입원한 내내 씻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것치고 온몸이 보송보송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씻고 싶었다. 성하진은 뭔가 말하려는 것 같더니 곧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지수에게 다가와 담요 위에 잠든 토토를 집어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퍽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둘이 며칠 동안 진짜 친해졌나 봐…….’
꽤 훈훈한 광경이었다. 시간이 지나 자신이 성하진과 더 친해진다면 그에게 토토를 맡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애초에 자신이 잘못되면 토토는 김현아가 맡아 주기로 했지만, 후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토토에게 더 좋은 일일 터였다. 멋대로 반려몬의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을 때, 성하진이 그럼 실례하겠다며 담요를 치우고 지수의 몸을 안아 들며 말했다.
“……!?”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한지수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딱 이렇게 쓰인 얼굴로 입을 쩍 벌린 채 바라보자, 설명이 부족했다 느낀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닷새 넘게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놀랄 수 있습니다. 씻다가 갑자기 경련이라도 오면 넘어질 수 있고…….”
“네!? 아니, 괜찮아요! 저 혼자 씻을게요!”
“그래도 만에 하나 욕실에서 넘어지면 큰 사고로 번질…….”
“아뇨!!! 정말 괜찮아요! 그…… 그, 아! 욕조! 욕조에 걸터앉아 씻을게요……!”
“…….”
그렇게 말했지만, 성하진은 지수를 방 욕실까지 안아서 옮겼다. 그리곤 지수가 말한 대로 욕조에 앉히더니, 욕실 수납장을 열어 무언가 꺼냈다.
지수는 그가 꺼낸 것이 조립식 환자용 샤워 의자라는 것을 알고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는 완강했다.
얌전히 이 의자에 앉아 혼자 씻을 것인지 VS 성하진에게 씻겨질 것인지 선택지를 받았을 때 지수는 당연히 전자를 선택했다.
철컥철컥 순식간에 조립을 마친 그가 의자를 두고 나가며 지수를 돌아봤다. 영 걱정스러운 표정에 지수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알아서 잘 씻을게요…….”
“예. 혹시 모르니 욕실 문은 조금 열어 두어도 되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세요.”
“잠옷은 욕실 앞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아니, 그냥 제가 나가서 꺼내 입어도 되는데…….”
“…….”
“……네…… 가져다주세요.”
“예.”
성하진은 정말로 욕실 문을 다 닫지 않고 5cm 정도 열어 두고 나갔다. 그리곤 30초도 지나지 않아 욕실 문 앞에 잠옷을 뒀다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욕조에 걸터앉아 있던 지수는 잘 조립된 환자용 샤워 의자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전에도 기숙사 생활을 해 봐서 알지만, 이 환자용 샤워 의자는 기숙사에 기본적으로 제공된 물품이 아니었다. 따로 요청해야 받는 물품이었는데, 이를 요청한 이가 토토일 리는 없으니 누가 신청했는지 분명했다.
“하아…….”
아무래도 성하진은 자신을 중환자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뇌는 그런 상태일지 몰라도, 몸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이러다 저가 씻고 나가면 미음까지 떠먹여 주려 들지도 몰랐다.
‘우선 씻고…… 몸만큼은 멀쩡하다는 걸 보여 줘야겠어. 어차피 병원에서 근력 감소 방지 수정도 걸어 뒀을 텐데…….’
천천히 옷을 벗어 욕실 밖으로 던져둔 지수는 무의식중에 문을 탁 닫으려다가 살짝 열어 두었다. 그리곤 거울 앞에 서서 손으로 자신의 몸을 쓸어 봤다. 기름진 곳 없이 보송보송하고 깔끔했다. 닷새 넘게 씻지 못한 것치곤 쿰쿰한 냄새도 전혀 안 났다. 머리카락도 떡 진 곳 없이 보송보송했다.
자는 동안 케어 서비스라도 받은 건지 깔끔한 상태였지만, 역시 직접 씻고 싶어 바로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자 욕실 안이 금세 차오른 수증기로 뿌옇게 변했다.
아무 생각 없이 씻던 지수는 시야에 들어온 의자를 보고 괜히 궁금해져 슬쩍 앉아 봤다. 플라스틱이라 엉덩이가 아플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내친김에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고개 숙인 채 멍하니 물줄기를 맞고 있자니, 이 의자…… 생각보다 편했다.
“…….”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처럼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에게 딱 맞는 물건이었다.
몸을 닦을 때만 빼고 샤워하는 내내 성하진 말대로 의자를 애용한 지수는 상쾌해진 기분으로 욕실을 나왔다.
잠옷을 입고 거실로 나가자, 성하진이 노골적으로 지수를 살펴봤다. 지수는 멀쩡하게 잘 걸어 나온 모습을 보이기 위해 평소보다 더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와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성하진이 막 데웠다며 미음을 가득 담은 그릇을 건네주었지만, 지수는 숟가락을 드는 대신 고개를 들고 성하진을 올려다봤다.
“성하진 에스퍼.”
“예.”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 물음에 성하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지수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지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내 생각했던 것을 물었다.
“제 질문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긴 한데요……. 혹시…… 정하진 에스퍼세요?”
“…….”
“…….”
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꽤 오래갔다.
지수는 제 앞에 입을 굳게 다문 성하진을 살폈다. 처음부터 그랬듯 늘 한결같이 무표정한 사람이다 보니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얼굴만으로 기분을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지금의 그는 조금 놀란 듯이 보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린 걸 봤으니까.
사실 미세한 동공 지진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성하진과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됐어도 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바로바로 즉각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각성하기 전 오래 군 생활을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언제나 지수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을 했다. 그런 성하진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 묻자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음, 말하기 어려우신 거면 굳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말하면서도 웃기는 소리 같아 조금은 민망했다. 맞다 아니다 중 하나의 답밖에 나올 수 없는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니…… 지수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성하진에게 ‘말하지 않아도 네가 숨기는 건 알고 있어.’ 정도로 들릴까 봐 조금 신경 쓰였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라고 덧붙이려는 찰나, 눈앞의 성하진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가 조금씩 길어지고, 다부지게 각진 턱은 갸름해졌다. 콧대는 더 날렵해지고, 굵직한 편인 눈썹과 입술은 얇아졌다. 그와 눈을 맞출 때마다 굉장히 까맣다고 느꼈던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맑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큰 가슴, 탄탄한 팔 등 전체적인 체격은 그대로였지만, 얼굴이 바뀌니 확실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제 눈앞에 본연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정하진을 본 순간 지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고 탄성을 흘렸다.
“……아…….”
정하진이라는 남자가 잘생긴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각성자 행사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가 진짜 잘생겼다는 말을 한마디 했다가, 강재윤에게 밤새도록 집요하게 놀림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그때보다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이게 원숙미라는 건가?
혹시 미의 신이 강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평소 하지도 않는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무의식중에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뜯어보던 지수는 놀라 급히 시선을 옆으로 흐렸다.
“……!! 아니, 그…… 갑자기 변해서, 놀라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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