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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37화 (37/172)

#036.

달콤한 꿈 8

통통한 소년의 모습이었던 보스 몬스터가 겁에 질려 나무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제대로 서지도 못해 결국 엉금엉금 기어 거리를 벌리며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변한 외형은 김현아가 익히 잘 아는 모습이었다.

지석민의 동생 지희민보다 조금 큰 키에 바짝 마른 몸으로 변한 소년은 한국대 병원 환자복을 입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

김현아가 제 기운을 다시 갈무리하고 지그시 바라보자, 내내 목 졸린 것처럼 컥컥 기침하고 헐떡이던 레미니센스가 “헉…… 허억…….” 숨을 몰아쉬며 애절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SS급 에스퍼의 기운이 증발하듯 사라지자 정신 차린 레미니센스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김현아의 눈치를 살폈다. 김현아는 별다른 표정 없이 서 있었다. 무감한 얼굴을 올려다보던 레미니센스는 살기가 전혀 없다는 것을 파악하곤 조심스레 대상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혀, 현아야……?”

“……응. 현서야. 오랜만이네.”

김현아가 대상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자신에게 감화되었다고 착각한 레미니센스의 얼굴에 환희가 비쳤다.

“아, 혀, 현아야! 진짜 놀랐잖아……! 언제 왔어?”

저 반응에 김현아는 그저 쓰게 웃었다. 자신이 대답하자마자 바로 상황극 모드에 들어가는 레미니센스가 어처구니없었지만, 레미니센스의 몸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금 막 왔어.”

“어제 말한 책은? 사 왔어?”

‘책 뭐였더라? 걔가 부탁한 책이 한두 권이어야지.’

잠시 고민한 김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 깜빡했어. 내가 무슨 책 사다 주기로 했더라?”

“……숲의 마법사 한정판 사 주기로 했잖아!”

“아…… 그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눈앞에 가녀린 남자의 눈매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김현아는 지석민처럼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과 역할극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현서야.”

“으응?”

김현아는 왜 그러냐는 듯, 저를 향해 해사하게 웃는 제 쌍둥이 오빠 김현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레미니센스는 짐짓 여유 있는 것처럼 제 혈육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조금 전 느꼈던 위압감 때문인지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미소 지은 입술도 잘게 떨렸지만, 애써 아닌 척 앙다물고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참 곱고 예쁜 얼굴이었다. 김현아와 반대로 조금 처진 눈꼬리, 오뚝한 코, 작은 입술……. 그리고 오랜 병상 생활 탓에 손등에 가득한 주삿바늘 자국까지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래서 김현아는 의아했다.

“현서야.”

“어? 왜?”

“참 이상해.”

“응? 뭐가?”

되물은 레미니센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김현아는 인벤토리에서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장검을 꺼내 쥐며 말을 이었다.

“난 지금…… 큰오빠를 생각하고 있거든.”

“…….”

“현서 네가 아니라. 현우 오빠를 생각하고 있다고.”

“…….”

“그런데 넌 왜 현우 오빠 모습으로는 변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현아야…….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겠어…….”

“변해 봐.”

“…….”

“내 큰오빠로 변해.”

“……현…….”

“그럼 살려 줄게.”

“……!!”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막 감정을 추스른 지석민의 눈에도 레미니센스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처음 김현아의 요구를 듣고 의아해했던 지석민은 일순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레미니센스를 바라봤다.

레미니센스는 어느새 손을 무기화한 채 바들바들 떨면서도 여전히 스무 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평화 그룹 차남 김현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 못 변할까?”

“……으…… 으읏…… 혀, 현아야…….”

레미니센스는 바짝 다가온 죽음 앞에 생리적인 공포로 벌벌 떨며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애원했다. 현아 너 대체 왜 이러냐고, 너 이러는 거 무섭다고 울먹울먹 말하면서도 여전히 평화 그룹 장남으로 변하지 못했다. 눈앞의 펼쳐진 광경에 김현아가 실험하고 싶다고 했던 게 뭔지 명확하게 알아차린 지석민이 입을 틀어막으며 침음했다.

“말도 안 돼…….”

지석민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탄식을 들은 김현아가 보통 사람이라면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팔을 휘둘렀다.

서걱-

김현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레미니센스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통제를 잃은 몸이 무너지며 녹아내림과 동시에 깨끗하게 잘려 나간 머리는 공중에서 산화되듯 땅에 닿기도 전에 전부 증발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던전 소멸까지 남은 시간 3Day 23:59]

보스가 사망하자마자 던전 중앙에 크게 뜬 팝업을 확인한 김현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석민의 탄식에 뒤늦은 대답을 했다.

“그러게요. 정말 말이 안 되는군요.”

지석민은 자기가 본 게 대체 뭘 뜻하는지, 감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섣부르게 무언가를 확정하는 대신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아무래도 S급 정신계 저항 스킬이 있는 각성자 대상으로 실험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언데드나 악마에 능통한 에스퍼를 초대해야겠군요.”

“각협에 몬스터 연구 부서 중 악마형과 언데드팀이 각각 있긴 합니다. 평화 길드에서 공식적으로 협조 요청하시면…….”

“아뇨. 각성자 협회의 정보력은 훌륭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문적이어야 합니다.”

“하긴 그렇죠. 그렇다면 떠오르는 곳은 하나군요.”

지석민의 대답에 김현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정확히 그가 생각한 곳을 언급했다.

“바티칸에 연락해야겠습니다.”

* * *

“흑…… 훌쩍…….”

한지수는 여전히 어딘지 모를 순백의 공간 허공에 널브러져 힘없이 훌쩍였다.

울음이 터진 이후 내내 오열한 탓에 지쳐 진이 다 빠진 터라,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그저 눈물이 나오는 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이젠 엉엉 소리 내며 울 힘도 없는 주제에, 눈물은 계속 흘렀다. 아무래도 눈물샘이 고장 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순간, 오래전 기억이 또 하나 떠올랐다.

첫 콘서트에서 팬들이 준비한 종이비행기 날리기 이벤트에 놀라고 감동해 눈물을 많이 흘렸던 날의 기억이었다. 그때 강재윤은 지수의 눈물을 닦아 주며 “오늘 우리 지수 눈물샘 고장 났나 봐요, 수도꼭지가 따로 없네.”라고 농담해 저와 팬들을 웃게 했었다.

이어 “여러분, 우리 지수가 이렇게 눈물이 많아요!”라며 제 목을 끌어안고 웃던 강재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최성훈 교수가 걸었던 세뇌 스킬이 모두 해제된 후, 강재윤과 나눈 추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어 기뻤는데, 이젠 이 기억을 혼자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슬펐다.

‘머리도 나쁘면서 뭘 이렇게 많이 기억하고 있는 건지…….’

다른 건 금방 잊고 잘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유독 강재윤에 대한 기억만큼은 모든 것이 선명했다.

지수는 자신의 기억력이 강재윤이라는 존재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만큼 그가 소중하고, 또 둘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당연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껏 늘 함께였으니까.

강재윤이 제 곁에 있는 게 당연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었다. 강재윤은 강한 사람이니까 죽어도 저가 먼저 죽지, 이렇게 강재윤이 먼저 사라질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평소 늘 그렇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가이딩을 하며 강재윤의 품에 안겨 잠드는 날이면, 습관처럼 형은 절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된다고 말했었다. 이기적일 수 있겠지만, 형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럼 그는 다정함을 잔뜩 머금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형은 지수가 죽으면, 바로 다음 날에 따라갈게. 지수가 없는 세상 따위 지켜서 뭐 하겠어. 형한테 아무 가치도 없는데.” 하고 장난스레 대답하곤 했다.

서로 농담처럼 말하고 웃곤 했지만, 적어도 두 사람 모두 진심이었다.

지수는 강재윤마저 없는 세상을 혼자 버틸 자신이 없었고, 강재윤 역시 한지수가 전부였다. 그러니 네가 없는 세상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토토한테 미안한 생각이지만…….’

제 곁에 저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차고 넘쳐도, 또 다른 가족인 귀여운 토토가 있다고 해도 그가 없는 세상을 홀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토토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코가 꽉 막혀 입으로 숨을 쉬고 있을 때, 지수의 시야에 마치 놀라지 말라는 듯 푸르스름한 창이 느릿하게 나타났다.

“흑……?”

느릿하게 생겨난 상태 창은 아무런 메시지도 없이 그저 공중에 떠 있었다. 흐느끼던 지수가 허공을 짚고 몸을 일으켜 앉자, 그제야 중앙에서부터 텍스트가 천천히 생기기 시작했다.

“……훌쩍…… 안……식……?”

천천히 생기는 글자를 따라 읽던 지수는 상태 창에 생기기 시작한 은색 빛을 띤 글을 읽기 위해 젖은 눈가를 거칠게 비벼 닦았다.

선명한 색도 아니고 하필 은색이라니…….

색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텍스트는 한술 더 떠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하듯 한 글자, 한 글자 느리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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