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달콤한 꿈 4
성하진은 최성훈 교수가 지금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이 아닌,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는 스킬을 사용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의사로서 중요한 정보를 넘기기 전에 신중하고자 자신의 말을 판별하는 것이었기에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당연히 진실로 판별되었을 텐데도, 최성훈 교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보호자라고 하신 게 거짓이 아닌 건 알겠습니다만, 이쪽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습니다. 최소한 제 진료실에선 본인의 모습을 보이셨으면 좋겠군요.”
“…….”
그 말에 성하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변신 스킬을 해제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건장한 체격은 그대로였지만, 짧은 스포츠머리가 조금은 길어지고, 서구적으로 각진 턱도 살짝 갸름해졌다. 이어 흑요석처럼 새카맸던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더니, 맑고 투명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그의 어깨 위에 힘없이 앉아 있던 토토는 모습을 바꾼 집사 2호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런 동요 없이 얌전하게 있을 뿐이었다.
“3년 전 동생분 검진 이후 처음 뵙는군요. 정하진 에스퍼.”
“……예. 그날 이후 처음입니다.”
“…….”
어려운 대답도 아닌데, 조금 지체한 답변을 들은 최성훈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정신계에서 능통한 에스퍼답게 상대가 뱉은 말의 진실 판별 외에 수많은 정보를 파악을 할 수 있었기에, 지금 상황이 조금은 의아했다.
조금 전, 정하진 본인이 한지수의 보호자라는 주장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100% 진실로 판별되었지만, 지금 인사치레 건넨 말에 돌아온 대답은 미묘한 불확실함이 깃들어 있었다.
거기에 정하진은 최성훈 교수에 대해 반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왜 저를 반가워하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최성훈은 프로답게 내색하지 않았다.
정하진이 자신을 반가워할 이유를 궁금해하기보단, 지금 저 의료용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할 조치가 더 시급했다. 그래서 최성훈은 지체 없이 바로 운을 뗐다.
“일단 한지수 가이드에게 제가 건 스킬 중 핵심은 망각입니다. 망각 스킬의 효과는 아시죠?”
“예.”
“원래라면 앞으로 며칠 더 지나야 강재윤 에스퍼 생각이 조금씩 나다가, 보름쯤 되면 자연스럽게 기억을 떠올리며 그에 대해 슬픈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렇게 소모하도록 조절한 스킬입니다만…….”
최성훈 교수는 지금 상황을 정신계 스킬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듯 쉽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가 의사로서 익힌 습관대로 잠시 배려의 말을 고르는 사이, 정하진이 먼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한지수 가이드는 교수님이 예상하신 것 이상으로 망각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당신이 전문가이긴 하나 이번 판단은 틀렸다는 뜻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었지만, 최성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을 보니 그런 것 같군요.”
“……예, 그러니…….”
“2단계를 고려해야겠군요. 이런 경우엔 일정 시일 동안 기억을 잠시 삭제했다가 복구하는 방법을 쓰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 기억 삭제란 완전 삭제가 아닌…….”
“죄송하지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
망각 스킬의 효과가 약했다고 여겨 아예 기억의 일시적 삭제 후 복구를 고려하던 최성훈 교수는, 정하진이 말까지 자르며 강하게 부정하는 게 의아해 안경을 추켜올렸다.
대외적이긴 하지만, 정하진 에스퍼와 한지수 가이드가 일면식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는 지금 진심으로 한지수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단순히 걱정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과했다. 걱정을 넘어서서 한지수라는 사람이 절대로 잘못돼선 안 된다고 여기는 강박이 느껴질 정도였다.
최성훈 교수가 그의 기운을 파악하는 동안 잠시 말을 고른 정하진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한지수 가이드에게 있어 기억 삭제는 오히려 더 독이 될 겁니다.”
“독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군요?”
“예. 우선 망각 스킬을 거둬 주십시오. 한지수 가이드의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제가 24시간 돌보겠습니다.”
“흠…… 정하진 에스퍼. 지금 한지수 가이드가 정신적인 폭주 상태로 돌입한 건 알고 있죠?”
“예.”
“뇌 과부하로 인한 폭주 상태에 돌입한 가이드가 미각성자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우울증 환자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예. 잘 압니다.”
“그런데도 스킬을 해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24시간 곁에 있을 겁니다.”
“…….”
최성훈 교수는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끔 정신을 제어한 상태에서 새근새근 편안하게 호흡하는 한지수를 바라봤다. 비록 얼굴이 피떡이 되었을지언정, 표정은 편해 보였다. 몇 초 정도 한지수를 바라보던 최성훈이 다시 정하진과 눈을 맞추며 운을 뗐다.
“일단…… 각성자 뇌 전문의로서 대답한다면 그건 절대 안 될 일입니다.”
“보통 경우라면 그렇겠지요.”
“한지수 가이드는 보통 경우가 아니다?”
“……예. 교수님께선 훌륭한 분이시고, 이 분야의 가장 뛰어난 의사입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도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한지수 가이드에게 있어 강재윤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입니다. 막연히 알고 계신 것보다 훨씬 큰 존재죠. 단순히 망각하고, 일시적으로 기억에서 지운다고 해서 완전히 잊을 수 있는 크기의 존재가 아닙니다.”
“…….”
“교수님도 이미 아시겠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절대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가이드 폭주로 죽기 전에 훨씬 더 빠르게 살아갈 의지를 잃게 될 겁니다. 지금 한지수 가이드가 강재윤 에스퍼를 빠르게 떠올릴 수 있었던 것 역시 뇌가 계속해서 세뇌 스킬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최성훈 교수가 턱을 매만지며 정하진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정하진은 자신의 추측을 그럴싸하게 말한 게 아니었다. 100% 확신하고 있었다. 강재윤을 잊은 한지수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말이다.
최성훈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사람이 무언가를 100% 확정 지어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확신이 있을 때뿐이었다. 모든 이들이 어떤 확실한 정보를 듣고 말하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전까진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는 게 정상인 법인지라 저 남자의 반응이 미묘하게 느껴졌다.
정하진은 자신을 살피는 최성훈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최성훈 교수가 지금 저가 뱉은 말을 판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하게끔 가만히 놔두었다. 정하진이 아는 이 훌륭한 의사는 똑똑한 만큼 자신이 납득해야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니까.
내내 턱을 어루만지던 손을 멈춘 최성훈이 이번엔 책상 위에 올려 둔 펜을 집어 들고 휘리릭 휘리릭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행동을 본 정하진은 겉으로 절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최성훈 교수가 펜대를 돌린다는 건, 타인의 의견에 거의 설득당해 마지막으로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며 보이는 습관이었던 탓이다.
* * *
아주 천천히,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을 떠다니는 남자가 있었다.
모든 의욕을 잃은 그는 빈껍데기와 마찬가지인 상태로 바다를 부유하는 해파리처럼 무의 공간을 부유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있고 싶었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오래전에 했던 약속이 없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예감했다.
이대로 이곳을 부유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소멸할 거라는 것을.
사라질까?
그때.
진지하게 소멸을 고려하는 그에게 누군가 다가와 귓가에 세 음절을 속삭였다.
남자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들은 순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지수.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 무의식을 부유하다 문득 자신의 이름을 떠올려 낸 남자는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내 이름…….’
그걸 인식하고 나니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졌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낯선 천장도 아니고, 처음 보는 방도 아니었다. 그저 온통 새하얀 공간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펼쳐졌다.
이게 보인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들어 보자, 제 손은 또 멀쩡하게 보였다. 자신의 몸은 여전한데, 바닥도 천장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본 순간 지수는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꿈은 또 처음이네…….’
지수는 허공인지 바닥인지 모를 공간에 책상다리하고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이 없는데 어떻게 앉을 수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지만, 지수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홀로 앉아 있었다.
허상의 공간을 보니 꿈 같긴 한데, 그런 것치고 정신이 너무 멀쩡했다. 아무리 선명한 자각몽이라고 해도 이렇게 현실적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지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죽은 건가? 어 뭐야, 목소리도 나오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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