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달콤한 꿈 2
그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서 성하진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되는데 그게 뭐라고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이상하게 멍하고,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심각한 상황이 맞는데, 심각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고, 꼭 말해야 하는데, 갑자기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제 상태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걸 떠올리면서도 지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군가 제 생각의 흐름을 강제로 차단한 것처럼 생각이 이어지지 않고 어지러웠다.
‘……재윤이 형……. 형이 옆에 있다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강재윤이 옆에 있다면 벌떡 일어나 형, 형, 하고 그를 부르며 나 지금 뭔가 이상하다고, 기억이 끊겼다고,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다고, 가이드 전문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강재윤은 걱정 가득한 눈빛을 애써 갈무리하며 침착하게 제 머리를 연신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고, 볼을 보듬으며 혹시 두통이 있냐며 묻고, 열이 나는 건 아니냐며 이마를 맞대고 열을 재겠지. 사실상 열을 잰다기보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습관과도 같은 행위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당장 병원에 가자며 자신을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했을 게 분명했다.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는 내내 괜찮을 거라고 속삭이며 제 어깨를 안고 보듬어 줄 것 같았다.
본인도 초조하면서 아닌 척,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고, 형이 옆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모습도……. 깍지 껴 잡은 손을 들어 올려 중지에 낀 반지에 입을 맞추며 저를 향해 장난스레 웃어 줄 강재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다 문득, 한지수는 깨닫는다.
‘……어……? 지금…… 재윤이 형…… 생각을 할 수 있어……?’
강재윤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억눌렸던 기억들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최근 기억부터 떠오르는 게 아니라, 마치 자신의 기억을 시간순으로 세분화해 나눠 둔 것처럼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차근차근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녕, 한지수라고 했지? 난 강재윤이야. 근데 몇 살이야? 중학생?’
실장의 캐스팅으로 갑자기 뒤늦게 끼어든 저를 견제하는 연습생들과 달리 먼저 다가와 상냥하게 인사하며 웃어 주던 모습.
‘지수야, 조금 더 먹어. 그거만 먹으면 이따 연습할 때 힘들어.’
본격적인 안무 연습 전, 자신의 접시에 고기반찬을 수북하게 덜어 주던 모습.
‘음…… 그, 지수야. 사실 품위 유지비는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안 돼……. 실장님이 말씀 안 해 주셨어? 아니,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음, 연습생이라고 다 회삿돈 받는 게 아니거든. 어느 정도 데뷔 확정된 애들 중에서 당장 용돈 필요한 애들만 받는 거야. 하하, 그러니까 아까 걔네가 너한테 한 말은……, 아니다. 지수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그냥 신경 쓰지 마. 걔들이 잘못한 거야. 울지 마.’
본의 아니게 말실수를 한 탓에, 연습생 형들에게 뒤늦게 들어온 주제에 얼굴로 데뷔 확정됐다고 자랑하는 거냐는 폭언을 듣고 혼자 비상구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제 옆에서 달래 주며 이온 음료를 내밀던 모습.
‘지수야, 아까 황쌤이 그냥 애들 정신 차리라고 한 말이야. 신경 쓰지 마. 에이, 우리 지수가 왜 데뷔 못 해. 형이랑 같이 한다니까? 그냥 애들이 요령 피우니까 긴장하라고 하는 말이야. 원래 자주 저렇게 혼내셔. 울지 마. 응?’
단체로 잔뜩 혼났던 날, 혹시나 데뷔조에서 떨어질까 봐, 기숙사 2층 침대에서 이불 덮고 울던 제 옆에 비집고 누워 이불째로 끌어안고 토닥이며 달래 주던 부드러운 음성.
‘지수야, 고생 많았어.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
데뷔가 확정됐던 날, 같이 기숙사 침대에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던 손길.
‘하하, 우리 다 너무 잘했어. 기분 좋다, 얘들아! 그치?’
저도 다른 멤버들처럼 똑같이 긴장했으면서, 첫 무대를 실수 없이 해냈다며 잘했다고 동생들을 끌어안고 등을 팡팡 때리며 격려하던 얼굴.
‘지수야, 저기 네 홈마. 아니, 거기 말고 반대쪽, 여기, 이쪽.’
미처 못 보고 지나친 홈마의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양쪽 볼을 잡고 휙 돌려 준 바람에 우스꽝스러운 사진이 찍히게 만들었던 날.
‘지수야, 밥 먹고 가. 조금이라도 먹어.’
늘 일찍 일어나 꼬박꼬박 두부 샐러드와 저당 시리얼을 챙겨 먹이고, 나가기 전 현관에서 교복을 단정하게 정리해 주던 손길.
‘나중에 또 여행하러 오면 돼. 이제 배는 좀 덜 아파?’
산토리니에서 자신이 배탈 난 바람에 숙소에 함께 남아 산해진미 제쳐 두고 인스턴트 죽이나 먹으면서도 내내 걱정하던 모습.
‘하하, 우리 지수, 처음 마셔 본 맥주는 어때?’
스무 살이 되자마자 형들과 자체 컨텐츠 촬영을 하며 처음 맥주를 마시고 오만상을 찌푸린 자신을 향해 소감을 묻던 익살스러운 모습.
‘지수야, 벨트 매고 고개 숙여!!!’
갑자기 차로 날아든, 난생처음 보는 오토바이만 한 크기의 말벌과 꼽등이를 피해 핸들을 꺾으며 다급하게 외치던 목소리.
‘쉿…… 쉿, 괜찮아, 지수야, 괜찮아. 형이…… 형이 그 아저씨들 다 내쫓았어. 저쪽 보지 말고 형만 보고 따라와. 괜찮아. 우리 둘이 다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숨자.’
두 사람이 모은 음식을 빼앗으려던 것도 모자라 무기까지 휘두르던 생존자 무리를 말로 표현 못 할 힘으로 전부 다 조용하게 만든 재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괜찮다고, 아래는 내려다보지 말고 형 얼굴만 보고 걸으라며 손을 꽉 잡았던 순간…….
‘지수야. 형이 나가서 저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올 테니까, 여기 동생들이랑 어르신들하고 같이 있어. 형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절대 문 열어 주지 말고. 알았지? 다른 사람에겐 절대 문 열어 주지 마.’
어쩌다 어린아이와 약자들이 많은 생존자 그룹의 리더가 되어 홀로 다른 그룹의 약탈자들을 내쫓던 모습…….
‘하하, 괜찮아. 형이 지금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 걱정하지 마. 잠시만 이러고 있자. 지수랑 이렇게 있으니까 안 아픈 것 같아. 거짓말 아닌데? 진짜로 지수랑 이러고 있으니까…… 덜 아파.’
손을 깍지 껴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덩이 같은 몸으로 밤새 불침번을 서던 모습.
‘그 총부터 치우시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여기 사람들 두고 혼자선 안 갈 겁니다.’
정부가 건재하다고, 정부 명령으로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된 생존자를 우선적으로 구조하러 왔다는 군인들을 향해 경고하던 모습.
‘지수야. 그 쥐새……, 쥐돌이랑 나가서 잠시 산책하고 올래? 사람 많은 데서 잠시만 쉬고 있어. 형이 금방 데리러 갈게.’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려던 쉘터의 다른 ‘능력자’를 제압하고 자리 좀 비켜 달라고 권하던 서늘한 목소리.
‘지수야. 형이…… 형이 앞으로도 항상 지수 옆에 있을게.’
대격변 이후 그토록 찾아 헤맸던 형과 동생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을 얻었던 날 제 몸을 으스러지도록 안아 주며 했던 약속.
‘당연하지. 형은 절대 지수보다 먼저 안 죽는다고 약속할게. 지수가 먼저 떠나는 거 다 확인하고 바로 다음 날에 따라갈게. 그럼 되지? 응? 하하, 어때. 상관없어. 지수가 없는 세상을 지켜서 뭐 하겠어. 나한텐 하나도 의미 없는데.’
처음으로 챙기게 된 형과 동생의 1주기 날의 기억을 끝으로 강재윤에 대한 생각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수는 그리움에 잠식당해 오열하는 자신을 끌어안은 채 위로하던 목소리가 흐려지면서 더는 떠올릴 수 없게 된 시점에 부스스 눈을 떴다.
“…….”
머리는 여전히 멍했지만, 잠시간 강재윤의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할 정도로 떠올릴 수 있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기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물론 행복한 와중에 순수한 의문도 들었다.
‘왜 벌써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최성훈 교수가 말했던 세뇌가 옅어지는 시기는 대략 열흘째부터였다.
그것도 빠르면 열흘, 늦으면 보름이 지난 시점부터 세뇌가 점점 희석되며 간섭이 줄어들 거라고 했었다.
지수는 자신이 병원에서 나흘 정도 기절했던 기간까지 포함해 넉넉하게 합쳐도 1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눈만 깜빡였다.
‘지금은 또 잘 안되네?’
이상한 일이었다. 직전엔 강재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 정도로 선명했고, 웃는 얼굴이 그려지듯 선했는데 지금은 또 기억나지 않았다.
파도처럼 밀려왔던 기억이 전부 다 쓸려 내려갔지만, 지수는 상실감 대신 의문을 품었다.
귀가 먹먹하고 어지러웠다. 강재윤을 추억하는 내내 물속에 잠겨 부유하다 갑자기 수면 위로 떠 오른 기분이었다. 선명하게 들렸던 그의 목소리와 달리 내내 웅웅거리던 현실의 소음이 명확해지고, 오감이 깨어나며 얼굴이 축축한 것도 느껴졌다.
시트가 젖을 정도로 운 것일까? 지수는 자신이 울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여운을 느끼고 싶었다.
“가서 한지수 가이드를 불러라.”
“쮜-!”
열린 방문 사이로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리는 성하진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어 작은 발소리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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