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깨진 독 17
<12월 8일>
-11:00 1차 공략팀 진입 (진보라, 라이젠 스티어, 김대현, 윤정호, 아이자와 렌, 최민주, 린…… 더 보기)
-17:27 1차 공략 완료 보스 몬스터 몽마 96% 이상 공략 성공
-17:31 유리의 방으로 진입한 몽마 최종 확인
-19:11 유리의 방 주변 몬스터 60% 이상 토벌
지수는 다음 탭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12월 10일>
-08:00 광석 채굴팀 보스 확인 / 유리의 방 내부에서 회복 중
<12월 15일>
-08:00 식생 채굴팀 보스 확인 / 유리의 방 내부에서 회복 중
<12월 19일>
-08:00 종합 채굴팀 보스 확인 / 유리의 방 외부로 나온 흔적 발견
-19:18 보스 몬스터 체력 38%까지 회복 확인
-19:33 보스 몬스터 활동 가능성 있어 채굴팀 철수
-20:49 던전 내부 몬스터 70% 이상 토벌
해당 던전에 드나든 각성자 팀이 남긴 메모들을 읽던 지수의 시선이 한곳에 오래 머무르자, 성하진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지수의 시선이 멈춘 곳은 바로 12월 20일의 기록이었다.
<12월 20일>
-14:00 2차 공략팀 진입 (곽대한, 진보라, 김대현, 성지원, 이은솔, 레이…… 더 보기)
-14:53 2차 공략 완료 보스 몬스터 몽마 98% 이상 공략 성공
-14:59 보스 몬스터 몽마 유리의 방으로 도주
-16:01 던전 내부 몬스터 90% 이상 토벌
지수의 시선이 머무는 부근엔 아무리 봐도 보스 몬스터 공략에 대한 정보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지수가 샤워하는 동안에 강재윤이 공략한 흔적이 없는 던전으로 골라 뒀는데, 어떤 부분 때문에 저리 표정이 안 좋은 건지 의아했다. 성하진은 저 페이지에서 더 넘어가지 않는 태블릿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
“혹시 몽마가 부담된다면 근방에 다른 던전으로 다시…….”
“아…… 그건 아니에요. 그냥…… 이런 공략 이력을 보고 있으면…….”
“…….”
“……음…… 인간이 제일 잔인하다는 말이 진짜구나 싶어서요…….”
그 말에 성하진은 태블릿 액정에 적힌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성하진이 지수에게 보여 준 내용은 개방형 채집 던전 이력으로, 요약하자면 보스를 죽이지 않고 일부러 살려 둔 상태로 내부 자원을 채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개방형 던전의 경우 보스 몬스터가 사망하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 던전이 소멸하기 때문에, 던전 내부의 자원을 채집할 시간을 확보하려고 보스를 죽기 직전까지 공격했다가 도망가게 놔두는 게 일반적인 공략이었다.
정확히는 보스 몬스터를 살려 두긴 하지만, 툭 치기만 해도 죽기 직전 상태까지 숨만 붙여 놓고, 피떡이 된 상태로 도망가게 놔둔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지만 말이다.
굳이 이런 번거로운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던전 안에 널린 온갖 부산물이 전부 다 어마어마한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에너지 대체원이 되어 주는 온갖 희귀한 광석, 풀과 나무와 꽃, 몬스터의 사체에서 채집할 수 있는 마정석 등 던전 내에서 발에 치이는 모든 것이 훌륭한 자원이었다.
물론 채집할 거리가 그다지 없는 지형의 던전도 많았는데, 이런 던전의 경우 보통 바로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고 바로 던전이 소멸하게 놔두곤 했다.
지수의 말뜻을 이해한 성하진은 잠시간 말을 고르며 고민했다. 몽마는 인간과 거의 흡사한 외형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였다.
비단 외형뿐만 아니라, 인간 흉내를 기가 막히게 잘 내는 잔재주까지 가지고 있는 존재로, 한지수가 만약 이런 부분에 연민을 느낀다면 던전 입장 자체가 굉장히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었다.
잠시간의 고심을 마친 성하진이 입을 떼려는 찰나, 지수가 태블릿 스크롤을 다시 쭉쭉 내리기 시작했다. 액정을 터치하는 손길은 거침없었지만, 조금 전처럼 찌푸린 눈빛이 아닌 건조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성하진은 무심하게 눈을 내리뜬 한지수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상대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손을 뻗어 태블릿을 집어 테이블 위로 내려 두며 말했다.
“……?”
“김지수 가이드.”
“……네?”
“꼭 던전에 갈 이유가 없다면, 그냥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
꼭 던전에 갈 이유……. 그 말에 지수는 일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일부러 던전에 가기 위해 샤워까지 하고 외형도 바꿨는데, 지금 와서 그냥 쉬어도 되는 걸까 싶어 입술만 달싹이고 있자니, 그가 말을 마저 이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채집 던전은 그다지 좋은 광경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
“그리고 던전 등급도 낮아서, 토토의 S급 스킬을 수련하기엔 부족한 점도 많을 겁니다.”
“……그…… 음…… 네, 그…… 그래도 저 때문에 준비하셨는데…….”
“참고로 전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교육 등록도 하셨다고…….”
“그런 것쯤은 취소하면 그만입니다. 절차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
참으로 담담한 대답이었다. 지수는 어느새 제 허벅지 위에 올라와 앉은 오목눈이 새 모습의 토토를 내려다봤다.
“……그래도…… 토토 스킬…… 수련해야…….”
“삐-! 삐잇-!”
“토토도 수련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군요.”
“삣!”
“……토토 말도 알아들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주방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궁금했던 부분이었지만, 성하진은 고개를 저으며 단번에 부정했다.
“그건 아닙니다만. 제 생각엔 토토가 정말 던전에 가고 싶었다면, 지금쯤 현관 손잡이에 앉아 울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확실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지수는 토토의 동그란 정수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물었다.
“토토야. 던전 안 가도 괜찮아?”
“삐!”
“우리 토토 던전 열매 좋아하잖아.”
“삐삣.”
“정말 괜찮아?”
“삐!”
지수가 쓰게 웃는 모습을 본 성하진은 토토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누군가 이렇게 손을 내밀면 보통 새침하게 고개를 핏-! 하고 돌렸을 토토지만, 지금은 자연스레 성하진의 손 위로 총총 올라갔다. 성하진은 토토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 둔 후 지수를 향해 물었다.
“던전에 가려는 이유는 스킬 수련 때문입니까?”
“……아…… 네. 맞아요.”
대답이 꽤 어정쩡하게 늦었음에도, 지수가 원래 말하기 전에 짧게 뜸을 들이는 습관이 있는 것도 하루 만에 파악한 성하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토토의 수련은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나름 에스……, 에스급 스킬이 있는 에이급 에스퍼니까요.”
말 더듬는 일이 없는 그가 엄한 곳에서 말을 더듬었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지수는 딱히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쩐지 당황한 기색을 비쳤던 성하진은 금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지수의 대답을 기다렸고, 지수는 눈을 내리뜬 채 왼손 중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지금 굳이 던전에 갈 이유가 없었다.
아니, 내내 던전에 가고 싶었던 이유를 강제적으로 망각 당했다고 해야 정확한 말이겠지만, 이 사실조차 한지수 본인은 알 수 없었다.
* * *
‘……진짜 A급 맞나? 아무리 스킬이 S급이라도 저게 가능하다고?’
이는 평화 길드 별관 트레이닝 룸 밖에 앉아 성하진이 사용한 얼음 창 공격 스킬을 본 지수의 순수한 감상이었다. 지수는 그가 토토와 대련을 시작하기 전, 자신에게 던전산 광물로 만든 강화 유리 밖에서 지켜보라며 당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도 안 되게 강해…….’
그간의 숱한 경험 덕분에 A급 에스퍼가 S급 스킬을 사용하는 광경을 몇 번 봤지만, 성하진이 사용한 스킬의 위력을 보면 절대 평범한 S급 스킬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킬의 등급이 아무리 S급이라고 한들, 사용하는 에스퍼가 A급이면 위력이 어느 정도 강해지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성하진이 사용한 스킬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스킬의 울림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건 SS급 에스퍼인 김현아 이후 처음이었다.
게다가 토토의 S급 쉴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돔 형태가 무너진 적 없는 강한 방어 스킬이었다. 던전에서 S급 보스 몬스터의 공격 스킬을 막았을 때도 굳건히 버텼는데, 지금 성하진의 얼음 창 공격을 연이어 받자 쉴드 돔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쉴드에 금이 간 게 충격이었는지 오목눈이 새 모습의 토토가 부리를 쩍 벌리고 오동통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는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올라 균열 부위를 맴돌며 “삐이, 삐이!” 하고 초조하게 울었다.
“토토야, 괜찮아! 침착해! 우리 토토가 잘하는 거 있잖아!”
“삐잇……!!”
지수의 응원을 들은 토토는 깜빡했던 것을 떠올린 듯, 자신이 가진 마나를 쉴드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토토의 몸에서 피어난 푸르스름한 연기 형태의 마나가 쉴드에 생긴 균열로 날아가 스며들었다.
이미 생긴 균열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마나가 갈라진 틈새를 메꾸어 균열을 보수한 듯한 형태가 되었다. 토토가 균열을 막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어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허공에 손을 휙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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