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깨진 독 16
지수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쓰게 웃는 모습을 본 성하진은 다소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제 이런 행동이 불쾌하셨다면…….”
“아, 아뇨! 전혀 불쾌하지 않고, 그…… 아, 전 어제 제가 실수라도 했나 해서 걱정됐거든요, 이것저것 다 차려 달라고 그런 건가 해서 놀라서……. 그게 아니라면 괜찮아요.”
절대 불쾌하지 않다고 허둥지둥 대답하는 지수를 바라보던 그의 눈매가 또다시 부드러워졌다.
이후 두 사람과 햄스터는 한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고 식사에만 몰두했다.
토토가 열심히 야채 갉아 먹는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한 식탁이었지만, 어색함이나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지수는 이런 아침 식사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조용하고. 평온했다.
아마 제 뇌에 씌워진 정신계 스킬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지수는 이 거짓된 평온함이 거북하지 않았다.
* * *
아침 식사를 마친 지수는 자신의 침대에 멍하니 앉아 방 안에 딸린 욕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산책할 겸, 그리고 토토의 스킬 수련도 할 겸 근처 하급 던전에 가기로 한 터라 이제 슬슬 씻어야 하는데 도통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목표는 참 단순했다. 그저 욕실에 들어가서 씻고 준비하면 될 일인데,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 몸이 안 움직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하진 에스퍼는 새벽부터 운동도 하고, 장도 새로 봐 오고…… 씻고 아침도 혼자 차리고, 나랑 너무 다르네…….’
저 성실함에 자극받아 움직일 법도 한데, 지수는 여전히 욕실 문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지수도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대격변 전까지만 해도 지수는 세상 그 누구보다 부지런한 삶을 살았다. 1군 아이돌이라는 직업 탓에 다소 강제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살았던 적도 있었다. 바로 대격변 이후, 초토화된 세상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제 기능을 할 때까지가 그랬다.
모든 세상이 암흑기에 접어들었던 시기엔 부지런한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치열하게 생존해야 했다.
지수에게 있어 그때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시기였다. 그나마 대한민국이 타국에 비해 무법 상태가 길지 않은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기적과도 같은 빠른 속도로 건재함을 알렸고, 그 결과 반년도 채 넘지 않는 기간 내에 암흑기가 끝나고 다시 정부가 갖춰졌다.
이 암흑기를 견뎌 내고 생존한 지수는 살아남았다는 기쁨보단 지독한 번아웃에 시달렸다. 이렇게 무언가 하는 것을 미루고, 쉬운 일조차 방치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당시엔 그게 번아웃인지도 몰랐다. 그저 피곤해서, 그간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긴장이 풀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거라 여겼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당시 지수가 혼자가 아니라는 거였다.
안정화 이후 자신의 오랜 팬이었던 김현아와 재회하고, 평화 길드에 들어와 강재윤과 둘이 살 당시엔 이렇게 저가 멍하니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그가 억지로라도 자신을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
……들어가 자신이 좋아하는 향의 바디 워시를 여러 개 쭉 나열해 두고……
‘……뭐라고 했더라……?’
민트 향을……
“……아…….”
또다.
또 무의식중에 강재윤을 떠올리고 기억을 강제로 차단당했다.
잊을 만하면 자꾸 각인되는 정신계 스킬의 강제력에 지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짜증이 확 치밀다가, 순식간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지수는 갑자기 찾아오는 평온함 역시 스킬의 일부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거 진짜 짜증 나네…….”
짜증과 화가 잔뜩 섞인 목소리에, 침대 위에서 후식으로 받은 던전산 곡물을 볼 주머니에 수납하던 토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린 채 저를 바라보는 토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토토 말고…… 절대로 토토한테 한 말이 아니야.”
“쮜이…….”
작게 대답한 토토가 제 정수리를 보듬는 지수의 손가락을 끌어안았다. 그리곤 곡물을 잔뜩 수납해 통통해진 볼을 비비며 귀엽게 올려다봤다. 자신이 이렇게 올려다보면 제 집사가 웃어 주고, 귀여워해 줄 것을 알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지수는 토토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주고, “우리 토토 없었으면 아빠가 어떻게 살았을까, 그치?” 하고 정수리에 뽀뽀도 해 주었다.
지수가 바깥에서 이런 말을 하면 그래 봤자 햄스터 모습의 몬스터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이는 한 치의 거짓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지수는 지금 떠올리기만 해도 자꾸만 흐려지는 이와 토토가 곁에 없었다면, 자신은 아마도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다 보니, 대격변 당시 뜬금없이 제게 감화된 토토는 어쩌면 지구가 이렇게 뒤집힐 때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죽을힘을 다해 버티라고 신이 보내 준 선물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신이라기보단…… 후원자가 준 선물이려나, 애초에 난 후원자가 없지만.’
물론, 지금까지 지수에게 접근한 후원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꽤 많았다. 그렇지만 지수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애초에 지수는 이 후원자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신뢰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 말로는 판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는 성좌, 신,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지만, 지수는 살면서 한 번도 판타지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지수가 주변 각성자들로부터 후원자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종합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들은 변태였다.
그냥 변태가 아니라, 변태에도 등급이 있다면 최상급 변태.
물론 후원자가 가끔 자신이 후원하는 피후견인에게 좋은 아이템을 선물로 주기도 하고, 희귀한 스킬을 주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인간의 사생활 따위엔 안중이 없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가끔 피후견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고, 피후견인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후원자들도 많았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준다고 해도, 지수의 눈엔 그저 능력 좋은 변태처럼 보일 뿐이었다.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상념으로 빠지기 시작하자, 양쪽 볼이 동그래진 토토가 지수의 허벅지 위에 서서 어딘가를 가리켰다. 작은 손이 만든 이정표를 따라 눈알을 굴리자 시선이 욕실에 닿았다.
“……그래, 씻어야겠지.”
“쮜!”
“5분만 더 쉬다가…….”
“쮜이잇!”
찰싹! 찰싹찰싹!
“아얏, 아얏! 토토야, 알았어, 아얏, 아빠 아프다. 아이고 아프다. 아이고~”
지수는 제 손가락을 찰싹찰싹 때리는 S급 토토의 손길에 엄살이 아닌 진실을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 부위가 얼얼했다. 물론 B급 집사를 상대로 토토가 힘 조절을 한 덕에 뼈를 다치진 않았지만, 손가락에 햄스터 손자국이 붉고 선명하게 남았다.
제 손가락에 남겨진 귀여운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수가 토토를 흘긋 봤다. 눈이 마주친 토토는 단호한 손짓으로 재차 욕실을 가리켰다.
“쮜!”
“……그래, 아빠 씻고 나올게…….”
* * *
“후아…….”
씻으러 들어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씻고 나면 개운하고 기분은 좋은 법.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지수 역시 샤워 후 잠시간 기분이 좋았지만, 이내 자꾸만 밀려왔다가 쓸려 나가듯 지워지는 기억들 때문에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다시금 제 가슴을 할퀴며 제멋대로 요동치려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겨우 다스려 낸 후, 변신 스킬을 사용해 ‘김지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모습을 바꾼 후엔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괜히 옷감과 소매에 놓인 자수를 만지며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에 집중했다. 그러다 조금 진정이 됐을 땐 옷장에 준비된 가이드 제복 중 활동성이 가장 편한 제복으로 꺼내 입고, 긴 생머리는 익숙하게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다.
묶이지 않고 삐져나온 잔머리들은 대충 귀 뒤로 넘기고 밖으로 나가자 거실 소파에 앉은 성하진과, 성하진의 어깨에 앉아 같이 태블릿 PC를 보는 토토가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바로 진입 가능한 던전 중, 마침 오늘 3차 진입 예정이 있는 곳이 있어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네.”
지수는 성하진의 옆자리에 앉아 태블릿을 받아 들고 화면을 넘겼다.
<고지대 산림형 C급 채집 던전 / 서울 수락산 인근>
“……3차는 오후 입장이니까, 일단 출발하고 그 근처에서 점심 먹는 게 낫겠네요.”
“예. 우선 해당 던전 3차 진입팀에 김지수 가이드는 실전 교육생으로 등록해 두었고, 전 멘토로 등록했습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지수는 그가 자신을 한지수가 아니라 김지수라고 바로 치환해 부르는 센스에 내심 감탄했다. 본인조차 누군가에게 이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 저도 모르게 ‘한……’까지 나오려다 말곤 했는데. 정부에서 일했다더니, 역시 머리가 좋은 편이구나 생각하며 태블릿 화면을 쭉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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