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깨진 독 15
“어?”
얼핏 보면 평범한 실크 리본처럼 생겼지만, 단번에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아본 지수가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감별(A)을 사용합니다]
스킬이 시전 되자 푸르스름한 창이 팝업됐다. 이어 그 밑으로 새로운 글이 줄줄 생기기 시작했다.
귀가 짧은 사랑스러운 토끼가 아꼈던 분홍색 리본.
등급: S
방어력 +5%
마나 +30
방어계 스킬 사용 시 유지 시간 추가 +30초
스킬 재사용 시간 15% 감소
귀가 짧고 연약한 토끼를 끔찍하게 아끼는 대마법사가 만든 수천 개의 리본 중 하나.
하지만, 귀가 짧은 토끼는 정원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그만 리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귀가 짧은 토끼는 다른 리본도 많으니, 굳이 찾지 않을 것 같다.
줍는 사람이 임자.
대신 한 번 착용하면 다른 이에게 줄 수 없으니 조심하자! (착용 시 귀속)
“……!!!”
아이템 속성을 확인한 한지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던전은 스킬의 지속 시간 몇 초 차이로 상황이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도 있는 치열한 곳이었다. 그런데, 10초도 아니고 무려,
‘방어계 스킬 지속 시간 30초 추가……!! 쿨타임도 15%나 줄여 준다고!?’
S급 실드 스킬이 주력인 토토에게 굉장히 좋은 아이템이었다. 비단 토토뿐만이 아니라, 방어계 에스퍼라면 탐내지 않을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거기에 착용자에게 귀속되는 아이템으로, 일단 토토가 몸에 두르면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다 보니 아이템을 노린 사고 염려도 없었다.
“세상에, 토토야! 이거 어디서 났어?”
사실상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으나, 토토는 작은 손으로 착실하게 방문을 가리켰다.
“쮜!”
곧바로 일어난 지수가 토토를 손바닥에 올리고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가자 어제처럼 자연스럽게 주방을 점령한 성하진이 보였다.
“한지수 가이드. 잠자리는 편하셨습니까.”
막 세척해 손질한 과일을 식탁에 내려 둔 그가 지수를 발견하곤 무표정한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지수는 저도 모르게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네, 전 좋았어요. 성하진 에스퍼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 저도 잘 잤습니다.”
“다행이네요. 아, 저기, 그런데 이 리본은…….”
지수가 가까이 다가가 손을 앞으로 내밀자, 손바닥에 서 있던 토토가 갑자기 배를 내밀고 한껏 뽐내는 포즈를 취했다. 성하진은 그런 토토의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인벤토리에 있던 보조 아이템인데, 토토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했습니다.”
“그, 음……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냥 선물로 받기엔 너무 좋은 아이템인데요……. 제가 다른 아이템으로…….”
“저도 후원자에게 받은 아이템이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전 패시브 말고는 방어계 스킬이 없어서 쓸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큰 아이템을 그냥 받을 수는 없어요.”
지수가 조심스레 말하자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 부탁이요?”
“예.”
“……어……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지수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냉큼 대답하자, 성하진의 날카로워 보이던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딱히 미소를 지은 것도 아니지만, 워낙 무뚝뚝한 인상이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잘생긴 얼굴이 한층 더 멋져 보였다.
그의 부드러워진 시선과 눈을 맞춘 지수가 토토를 식탁 위에 내려 두며 물었다.
“어떤 부탁인가요?”
혹시나 무리한 부탁일 경우, 자신이 가진 S급 아이템으로 상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성하진이 왼팔을 쑥 내밀었다.
“가이딩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가이딩 요청을 들은 지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 블랙 색상 워치의 액정을 확인했다.
“……47%네요. 어제는 제가 확인할 겨를이 없어서 못 봤는데, 몇이었죠?”
“68%였습니다.”
“……네? 꽤 높은 상태였네요?”
“예. 직전에 던전을 공략해서, 수치가 좀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럼 고작 그사이에 이렇게 줄어든 거예요?”
“예.”
“……!!”
어제 성하진을 만난 순간부터 약을 먹고 잠들기 직전까지 종일 방사형 가이딩을 했지만, 그와 손을 잡거나 다른 접촉도 없었고, 집중해서 가이딩을 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한지수는 지금 가이딩 조절을 할 수도 없는 상태다 보니 당연히 얼마 줄지 않았을 거라 여겼는데, 기대 이상으로 큰 편차였다. 수치에 놀라 눈을 깜빡이던 지수는 뭔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현아 누나가 말해 줬는데, 가이딩을 흡수하는 스킬이 있다고 들었어요. 혹시 그 스킬 덕분인가요?”
그 물음에 성하진은 고개를 작게 젓더니 식탁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아마 한지수 가이드와 제가 매칭률이 좋은 것 같습니다. 나중에 측정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만약 정말 다른 이유 하나 없이 매칭률 때문이라면 적어도 두 사람의 상성이 90% 이상은 될 게 분명했다. 얼떨떨해진 지수는 무의식중에 그가 빼 준 의자에 앉았다.
성하진은 바로 앉는 대신, 싱크대에 둔 접시 두 개를 가지고 와 하나는 지수의 앞에, 하나는 자신의 자리에 내려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매칭률 생각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지수는 반사적으로 접시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온갖 싱싱한 야채와 토마토, 삶은 달걀과 연두부가 올라간 샐러드였다. 게다가 소스는 지수가 좋아하는 오리엔탈 소스였다.
“……어…….”
둘 사이 중간에 놓인 과일 접시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둔 멜론과 껍질 깐 귤이 있었다. 메뉴 조합을 전부 확인한 지수는 잠시간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무언가 말을 꺼내는 대신 쭈뼛쭈뼛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침 식사도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예. 저당 시리얼도 사 뒀습니다. 샐러드 먼저 드시고 시리얼도 드시죠.”
“……네…….”
성하진과 지수가 포크를 들고 샐러드를 먹기 시작하자, 토토도 자신의 전용 접시의 야채를 먹기 시작했다. 샐러드에 드레싱 없이 먹는 성하진과 달리, 지수는 오리엔탈 소스를 잔뜩 뿌린 후 포크로 푹푹 찍어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토마토, 삶은 달걀, 연두부를 올린 샐러드와 저당 시리얼은 아이돌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대격변 이후에도 강재윤과 함께 지내는 날이면 꼭 먹는 아침 고정 메뉴였다.
그리고 멜론과 귤은 지수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메뉴 한두 가지가 우연으로 겹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 모든 것이 완벽하게 겹치는 식단이라니…….
아무래도 어제 자신이 잠들기 전, 약 기운에 무언가 더 떠든 것 같다고밖에 볼 수 없는 메뉴였다.
약에 취한 상태로 아침 메뉴까지 세세하게 지정해 차려 달라고 요청했다면,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확 붉어졌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식탁에 올라와 있었기에 밀려오는 부끄러움으로 입을 꾹 다문 지수는 묵묵히 샐러드만 씹었다. 맞은편에 앉은 성하진 역시 묵묵하게 식사만 해서, 식탁엔 두 사람과 토토의 아삭아삭 야채 씹는 소리만 들렸다.
‘물어봐야 하나……’
혼자 끙끙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저 샐러드를 전부 비운 성하진이 시리얼 상자를 뜯었다. 지수는 시리얼 역시 자신이 먹던 것과 동일한 제품인 것을 확인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성하진 에스퍼.”
“예.”
“……제가 어제…… 약 먹고 기억이 끊겨서 그런데요……. 혹시 제가…… 아침 메뉴를 이렇게 차려 달라고…… 부탁했나요?”
드문드문 다소 힘겹게 이어진 물음에 시리얼을 그릇에 쏟던 성하진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수는 보지 못했다. 성하진은 귀 끝까지 새빨개진 한지수를 확인하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이건…….”
지수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성하진이 우유로 시선을 돌렸다.
“?”
지수는 일순, 그가 저와 시선을 피한 것 같다고 느꼈지만, 억측이라 생각했다. 시리얼을 부었으니 다음엔 우유를 찾는 게 맞는 순서니까. 하지만 성하진은 우유를 집는 대신, 다시 지수에게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제가 따로 조사했습니다.”
“……조사요?”
“예. 당분간 한지수 가이드를 부족함 없이 케어하는 게 제 임무니,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알아볼 겸……, 한지수 가이드의 SNS를 참고했습니다.”
“……제 SNS요?”
“예. 조금…… 아니, 꽤 많이 예전 게시물까지 확인하며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의 대답을 들은 지수는 조금 얼떨떨했지만, 새벽에 자신이 메뉴를 하나하나 콕콕 찍어 가며 말한 게 아니라는 부분에 크게 안도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