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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24화 (24/172)

#023.

깨진 독 12

우우우웅-

순식간에 주변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반지에 박힌 보석과 똑같은 연분홍색 빛이 지수의 몸을 감싸며 부드럽게 맴돌았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몸을 감싼 빛이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공기의 흐름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잠잠해진 순간, 푸르스름한 상태 창의 메시지가 바뀌었다.

[지정 타겟 ‘재윤이 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

스르르 스킬 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수는 그대로 다리에 힘을 풀고 주르륵 미끄러져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곤 다시 반지를 어루만졌다.

[지정 타겟 ‘재윤이 형’에게 이동을 시도합니다.]

……

[지정 타겟 ‘재윤이 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

[지정 타겟 ‘재윤이 형’에게 이동을 시도합니다.]

……

[지정 타겟 ‘재윤이 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

스킬 사용을 중단한 지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청각에 집중했다.

욕실 밖에서 성하진과 또 뭔가 대결하는 듯이 열심히 쮜잇쮜잇 우는 토토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눈가가 시큰시큰 욱신거리고 쓰렸다.

하지만 슬프진 않았다.

그래서 지수는 제 무릎이 젖는 것도 몰랐다.

* * *

깊은 밤.

지수는 성하진이 보는 앞에서 가이딩을 차단하는 약을 먹었다.

입 안이라도 벌려서 보여 드리면 되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확인하진 않겠다고 했다. 대신 지수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다 나가겠다고 했고, 지수는 이를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지수가 먼저 침대에 눕자 토토 역시 침대 옆 협탁에 준비된 전용 침대에 누웠다. 알아서 이불을 덮은 토토는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작은 눈을 깜빡였다.

지수는 토토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보듬어 주며 미소 지었고, 성하진은 책상 의자를 빼고 곧은 자세로 앉아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어 조용한 방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지수가 편한 자세를 찾아 뒤척이는 소리뿐이었다.

워낙 고층이다 보니 지수의 귀엔 도로에서 나는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성하진은 내내 창밖을 바라보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뒤척이며 그를 흘긋 본 지수는 저것도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하진 에스퍼.”

“예.”

“……조금 개인적인 거 여쭤봐도 되나요?”

“예.”

지체 없이 대답한 그가 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토토 역시 귀를 쫑긋 세우고 성하진을 바라봤다. 지수는 무뚝뚝하지만, 부드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성하진을 향해 자신이 내내 짐작한 것을 확인하고자 물었다.

“……어, 혹시 각성하시기 전에 군인이었나요?”

“예……. 티가 많이 납니까?”

“으음~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해야 하나? 일단 다른 것보다, 자세가 엄청 곧아서요.”

“그렇군요.”

말투도 그렇다는 말은 쏙 뺀 대답이었다. 이를 모를 그가 납득한 듯이 끄덕이는 모습에 지수가 재차 물었다.

“……다른 거 또 물어봐도 돼요?”

“예.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딱딱한 말투였지만,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지수는 저런 낮은 목소리가 부럽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제 가이딩은 어땠어요? 잘 맞는 것 같았어요?”

“예. 굉장히 편안했습니다.”

“아……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간혹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의 상성이 극과 극으로 맞지 않는 경우엔 가이딩조차 불쾌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저렇게까지 격렬한 거부 반응이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수는 제 가이딩이 편안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내일 낮은 등급 던전에 가도 될까요?”

“예. 산책은 꾸준히 하면 좋습니다. 바로 입장할 수 있는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좋아요. 산책도 산책이지만, 토토가 스킬을 쓰게 해 줘야 하거든요. 성장형 스킬이라 사용할수록 경험치가 올라요.”

그 말에 토토가 누운 채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성하진을 바라봤다. 하진은 그런 토토를 흘긋 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성장형 스킬은 흔치 않은데, 굉장하군요.”

“우리 토토가 좀 굉장하죠?”

“쮜!”

“예. 굉장합니다.”

바로 긍정하는 대답에 지수와 토토가 동시에 벙쪘지만, 둘 다 이내 표정이 좋아졌다. 특히 토토는 아주 우쭐해져서, 제 전용 침대에서 나와 협탁을 내려갔다.

어디 가나 했는데, 그대로 성하진에게 다가간 토토가 그의 바짓단을 타고 올라가 허벅지 위에 앉았다. 성하진은 자연스럽게 토토를 쓰다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토토가 저 말고 다른 남자에겐 잘 안 가는데…… 신기하네요.”

그 말에 토토를 열심히 쓰다듬기 시작한 성하진 역시 신기하다며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저도 신기합니다. 사실 테이밍 몬스터들도 제 곁엔 잘 오지 않는 편입니다. 토토는 용감한 햄스터군요.”

“쮜이-!”

근처에 소동물이 오지 않는다는 것치고 털을 쓰다듬는 손길이 매우 현란했다.

이를 증명하듯 토토가 점점 호떡처럼 납작해졌다. 그리곤 몇 초 지나지 않아 아예 배를 깔고 누워 정수리부터 꼬리 끝까지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몸을 바르르 떨었다.

“……되게 잘 쓰다듬으시네요?”

“제가 잘하고 있습니까?”

“네. 엄청요.”

지수가 순수하게 감탄하자 잠시간 말없이 토토만 쓰다듬던 성하진이 다시 고개를 들고 지수와 눈을 맞췄다.

지수는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누워 눈만 깜빡였다.

“성하진 에스퍼는 영화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중간한 대답에 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하진은 지수의 반응에 변명하듯 덧붙여 대답했다.

“사실, 영화를 볼 시간이 평소에 많지 않았습니다. 굳이 좋다 싫다 중 선택하라면…… 좋아하는 쪽입니다.”

“흠…… 그래요? 그럼 저랑 같이 지내는 동안 영화나 볼래요?”

“좋습니다.”

그가 바로 대답하며 동의하자 붉게 물든 지수의 눈꼬리가 조금 휘었다. 성하진은 지수가 아까 욕실에서 나온 이후 줄곧 눈가가 붉은 것을 모른 척해 주었다.

지수 역시 그의 배려를 알기에 토토를 쓰다듬는 그의 손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리고…… 군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물어봐도 돼요? 아 혹시 국가 기밀 뭐 그런 건가요?”

“이젠 기밀이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오…… 기밀이긴 했나 봐요?”

“예. 군 생활을 하다 정부 기관에서 근무했었습니다.”

“와~ 영화에 나오는 비밀 요원 같은 건가요?”

“예.”

“엑!?”

“쮯!?”

장난으로 물은 건데, 바로 긍정하는 대답에 오히려 놀란 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토토 역시 놀란 듯 납작해진 몸이 다시 동그랗게 부풀었는데, 차분하게 보듬어 주는 손길에 다시 호떡처럼 납작해져서 쮜이이…… 작게 울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요?”

“예. 국가를 위해, 국익을 위해 움직이는 일을 했었습니다.”

성하진이 진지한 얼굴로 끄덕이자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있던 한지수가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와…… 그럼 막 007처럼 특수한 아이템도 쓰고요?”

“……그런 건 거의 없었습니다만……. 흔히 쓰는 특수한 아이템이라면 렌즈형 카메라나 강한 마취약이 들어 있는 만년필 형태의 무기는 있었습니다.”

“와……! 대박. 렌즈형 카메라요? 눈에 끼우는 그 렌즈요? 깜빡이면 사진 찍히는 거요?”

“예.”

“와…… 진짜 그런 아이템이 있긴 했구나……. 다 영화인 줄 알았는데…….”

“변신하는 차는 없어도, 작은 소품류는 의외로 생각보다 많습니다.”

“……하하, 신기하네요……. 그럼, 으음…… 대격변 후엔 성하진 에스퍼처럼 에스퍼로 각성한 요원도 있나요?”

“제가 알기로 몇몇 있는 거로 압니다. 힐러로 각성한 요원도 많이 있고요.”

“……그렇구나아……. 신기하고…… 재미……있네요…….”

한지수의 말이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혀를 움직이는 게 버거워 보일 정도로 약에 취한 티가 났다. 눈은 이미 거의 감겨서 겨우 실눈 뜬 상태로 버티고 있었는데, 퍽 게슴츠레한 모습이었지만, 방 안의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아…… 더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약 기운이 도나 봐요, 엄청 졸리네요……. 이거…….”

“앞으로 대화 나눌 시간은 충분히 많습니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주무셔도 됩니다.”

그대로 잠들면 편할 텐데, 어지간히 자기 싫은지 눈을 거칠게 비빈 한지수가 성하진의 가슴 부근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지금 완전 재미있는…… 주제인데…… 세상에, 비밀 요원이라니…… 내일 그 이야기 들려주셔야 해요…….”

“예. 그러겠습니다.”

“……아…… 잠깐, 나 아직 자기 싫은데…….”

성하진은 약에 취해 흐리게 웃는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기 싫어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녹록지 않은 듯, 흐느적거리는 꼴이라 약이 어지간히 세긴 하구나 싶었다.

김현아의 말로는 약을 먹자마자 보통은 바로 잠에 빠져들 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버티는 걸 보면 평소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편인 것 같았다. 짧은 순간 한지수의 불면증에 대해 파악한 성하진은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중간에 잠들게 할 생각으로 한지수가 묻는 말에 전부 대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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