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깨진 독 11
토토를 쓰다듬으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 지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저 세 메뉴를 동시에 맛볼 생각을 하니, 부정적인 기분이 싹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온전히 저녁 메뉴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기분 좋은 우연이네.’
성하진은 주방에서 식사 준비 내내 티격태격한 것치곤, 토토가 먹을 저녁을 따로 예쁘게 챙겨 주었다.
하얀색 작고 깔끔한 도자기 종지 하나엔 토토가 먹기 편한 사이즈로 잘라 데쳐서 식힌 야채를, 또 다른 도자기 종지에는 찐 콩과 던전산 견과류와 열매를, 그 옆엔 밥 먹다가 물도 마시라고 작고 투명한 유리그릇에 생수까지 따라 주었다.
“토토야, 아빠 잠시만 봐 줄래?”
“쮸?”
브로콜리를 끌어안은 토토가 고개를 든 순간, 지수가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칵- 찰칵-
“아이고 예쁘다. 우리 토토 최고다.”
“쮜!”
토토는 지수가 하는 행위가 뭔지 잘 아는 듯이 얌전히 지수를 올려다보며 끈기 있게 기다렸다. 사진을 양껏 찍은 지수가 얌전히 기다려 준 토토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했다.
“옳지. 옳지. 아이고 다 찍었다~ 토토 이제 맛있게 먹어~”
“쮸!”
토토가 브로콜리를 와구와구 먹기 시작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지수는 토토 전용 SNS 계정에 사진을 올렸다.
<0117>
다른 내용 없이 간단하게 날짜만 표기한 코멘트와 함께 마지막 사진을 올려 둔 지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SNS까진 신경 쓰지 못했는데, 길드 차원에서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지수 본인이 등판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잡음이 심했다.
언론의 헛소리,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악의적인 루머를 막고자 올린 토토의 사진은 1분도 채 되지 않아 좋아요 수와 댓글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모든 알림을 무음으로 해 둔 지수는 SNS를 신경 쓰지 않고 식탁에 집중했다.
찌개와 반찬을 다 차려 둔 성하진이 마지막으로 밥을 퍼 왔다. 지수가 싫어하는, 하지만 예전부터 억지로 먹어야 해서 이젠 그럭저럭 먹을 수 있게 된 콩밥이었다.
“…….”
지수가 식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은 성하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아가 따로 알레르기는 없다고 알려 줬습니다. 그래서 일단 구한 재료로 차려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이 메뉴들도 현아 누나가 알려 준 건가요?”
그 물음에 성하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당장 구한 재료로 만들기 쉬운 것들로 준비해 봤습니다.”
“……아, 그래요? 신기하네요.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거든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네, 정말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예. 한지수 가이드 입에 잘 맞으면 좋겠군요.”
“……네. 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
지수가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성하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아 말대로 그는 굉장히 무뚝뚝했다. 말투도 정말 군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딱딱했고, 표정 변화는 아예 없었다.
그렇지만 지수는 그가 부담스럽거나 싫지 않았다. 에스퍼로서 풍기는 압박감은 조금 있었지만, 눈빛은 부드러웠고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저가 어려워하지 않도록 여러 면에서 배려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A급 에스퍼면 엄청난 인력인데, 겨우 날 케어하라고 붙여 주다니……. 누나도 참…….’
김현아가 제 사람을 과보호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고급 인력을 부리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성하진에게 약간의 부담감과 미안한 마음을 동시에 느낀 지수는 먼저 숟가락을 들고 된장찌개를 맛봤다. 구수하고 차돌박이 특유의 기름이 잔뜩 우러난 게, 저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맛있다…….’
찌개를 가장 먼저 맛본 지수는 윤기 흐르는 밥도 떠먹고, 달걀찜도 먹고, 불고기도 먹었다.
놀랍게도 음식은 전부 입에 잘 맞았다. 아니, 잘 맞는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맛있었다.
고개 숙인 채 열심히 밥을 먹던 지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내내 자신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건지, 저를 바라보는 성하진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아직은 그가 어색해 멋쩍게 웃은 지수가 입에 있는 음식을 다 삼켜 낸 후 말했다.
“……전부 다 맛있어요.”
“그렇습니까.”
“네. 진짜로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네요.”
“입에 잘 맞아서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간은 이 정도로 해도 되겠습니까?”
“네, 딱 좋아요.”
지수는 성하진이 담아 준 자신의 몫을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다 비웠다. 혹시 더 먹겠냐고 권했을 땐 정중히 거절했지만, 너무 맛있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수가 먹는 내내 토토도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긴 듯했다. 안 보는 새 그릇을 핥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 * *
‘예전엔 이렇게 먹고 형들이랑 종일 운동했는데…….’
러비스 활동 시절엔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던 만큼, 오늘처럼 고칼로리 식사를 하면 식후 운동이 필수였다. 그래서 식사 후 모두 함께 숙소 단지 거주민만 이용할 수 있는 짐에서 운동하곤 했다.
운동을 싫어하는 지수는 이렇게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편하고 좋았다. 그래서 생각 없이 틀어 둔 영화를 보며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낮은 테이블 위에 앉은 토토가 또 열심히 식후 세수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TV에서 토토로 시선을 옮긴 지수는 오랜만에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제 뇌에 걸린 세뇌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뇌를 멋대로 건드렸다는 불쾌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알아서 해 주고 있었고, 성하진은 지수가 누운 소파 옆에서 플랭크 자세를 유지한 채 30분이 넘도록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각성 후 가이드는 신체적인 별다른 격변이 크게 없지만, 에스퍼들은 남다르다더니, 대단했다. 참고로 한지수의 플랭크 최고 기록은 9초였다.
토토의 공식 플랭크 기록이 25초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참 하찮은 기록이었다.
“……성하진 에스퍼.”
“예.”
“음…… 안 힘드세요?”
“예.”
“……아, 네…….”
아까 식사할 때도 몇 번 그랬는데, 지금도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절의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라 신기했다.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보통 누가 옆에서 저러고 있으면 신경 쓰이고 불편할 법도 한데, 어째서인지 아무렇지 않았다.
지수가 나름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을 눈치챈 것인지, 성하진을 바라보던 토토가 테이블에서 뽀로로 내려가더니, 그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성하진이 살짝 고개 들어 바라보자 뒷발로 선 토토가 자기 배털을 쓱쓱 정리하더니, 꽤 호전적인 표정으로 “쮜잇!” 하고 울었다. 그리곤 성하진을 마주 보고 플랭크 자세를 취했다.
“…….”
“…….”
“……쮸……!”
지수는 잽싸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플랭크하는 토토의 사진을 찍었다. 성하진의 정수리가 나오긴 했지만, 얼굴은 나오지 않아 그대로 몇 장 더 연속으로 찍고 있자니 토토의 앞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토토야, 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쮜…… 쮜이잇……!”
“…….”
“…….”
“쮸웃……!”
사실 처음부터 볼록한 배가 땅에 닿아 있었지만, 지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토토에게 멋지다며 연신 응원했다.
15초쯤 더 지났을까. 미동도 없는 성하진과 달리 부들부들 떨던 토토는 결국 허물어졌다. 잘했다고 폭풍 칭찬해 주자 콧대가 높아진 토토가 성하진의 근처를 기웃거렸다.
‘그래도 토토가 먼저 성하진 에스퍼한테 다가가네?’
평소 지수 말고 다른 남자들에겐 박한 편인 토토가 성하진에게 은근히 저렇게 먼저 다가가는 걸 보니, 그가 마음에 든 것 같아 안심됐다.
성하진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고, 토토는 그를 방해하려는 듯 옷자락을 타고 올라가 정수리 위에 서서 머리카락을 헤집기 시작했다.
“토, 토토야, 하지 마. 이리 내려와. 미안해요, 성하진 에스퍼…….”
“괜찮습니다. 작은 동물이 제게 다가오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이 시간을 즐기겠습니다.”
“……아, 음…… 네…….”
즐기겠다는 말에 울컥한 건지 토토가 그의 머리를 더 열정적으로 헤집어 댔다. 아예 뒷발까지 쿵쿵 굴렀지만, 성하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토토가 나름 S급인데…… 괜찮으세요?”
“예. 시원하군요.”
“쮜잇!!!”
토토가 앞발로 모래를 파듯 성하진의 뒤통수를 마구 긁었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이 더 자세를 곧게 잡았다.
둘이 잘 노는 모습을 확인한 지수는 토토에게 너무 성하진 에스퍼를 괴롭히지 말라고 타이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욕실에 들어간 지수는 꽉 닫은 욕실 문에 등을 대고 서서 제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왼쪽 중지에 낀 반지에 박힌 보석이 욕실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영롱한 빛을 뿜었다.
“…….”
지수는 조심스레 오른손으로 왼손 손등을 덮고 반지를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시야가 전부 차단됐음에도 불구하고 푸르스름한 상태 창이 나타났다.
[지정 타겟 ‘재윤이 형’에게 이동을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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