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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22화 (22/172)

#021.

깨진 독 10

툭- 툭- 툭-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는 내내 김현아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현재로서 알고 있는 사실은 그저, 저 빛무리가 제 큰오빠와 강재윤을 삼켰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대체 그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삼켜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지, 어디서부터 무엇을 조사해야 하는지 하나도 짐작 가지 않았다.

“하아…….”

생각은 정리되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상황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같은 시각,

“하아아아…….”

한지수는 김현아와 똑같이, 아니 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으윽, 쪽팔려……!!!’

현 상황, 자신에 대한 고찰을 마친 한지수의 총평이었다.

성하진은 계속 괜찮다고, 신경 쓸 것 없다고, 누구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럴 수 있으니 편히 쉬고 있으라고 했지만, 한지수는 도저히 평온하게 있을 수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난 지 10분도 지나지 않은 상대 앞에서 발작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혀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사람이 아픈 건, 특히 스트레스로 아픈 건 그 사람의 정신이 나약해서 그런 거라고 매도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인이 박인 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땐 그런 환경이었고, 이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땐 자신이 아플 경우 컨디션 관리를 못 해서 팀에 폐를 끼친 점에 대해 미안해해야 했다. 저 때문에 틀어진 스케줄 등 여러 부분을 시정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에게 늘 고개 숙여 사과해야 했다.

아프면 푹 쉬는 게 아니라 자기 관리를 못 해서 미안하다고 기다린 이들에게 사과문을 써야 하는 직종에 종사했던 터라, 몸이 아프게 되면 아파서 서럽기보다 창피하고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일평생 그런 환경에서 자라고 지냈다 보니,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몸이 아픈 것도 아닌 자신의 스트레스가 심해서 호흡 곤란이 왔다는 부분이 새삼 심란했다.

‘한심해…….’

그나마 아픔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위로하고 괜찮다고 말해 준 것은 나이 차 나는 큰형, 그리고 러비스 멤버들뿐이었다.

이젠 그 누구 하나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다른 생각…… 하자…….”

지수는 괜히 또 과거의 생각에 사로잡히기 전에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거렸다.

생각이 제어되지 않을 것 같으면 일단 주변 사물에 집중하라는 성하진의 조언대로 지수는 자신이 누운 침실에 놓인 물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서랍장. 스탠드. 창문. 커튼. 토토 침대…….”

5개를 읊은 지수는 다음으로 들리는 소리도 분석해 보라는 말을 떠올리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주변 소음이 조금씩 읽혔다.

“……성하진 에스퍼가 칼질하는 소리…… 토토가 훈수 두는 소리…….”

퉁- 퉁- 칼로 무언가 썰며 요리하는 성하진 옆에서 뭐 그리 훈수 둘 게 많은지, 연신 “쮯- 쮜잇-!” 하는 소리가 들렸다.

토토가 참견할 때면 성하진은 낮은 동굴 같은 목소리로 “알았다. 이 정도면 되나? 오이는 또 좋아하는군. 당근도 먹고 싶으면…… 당근이 싫은 건 알겠으니, 그렇게 발로 차지 마라. 요리에 쓸 재료다. 은근히 떨어뜨리지도 마라. 음식은 그렇게 던지는 게 아니다.” 정도로 말하며 담담하게 타일렀다.

“……하…….”

주변 소음을 3개 이상 분석하면 진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주방에서 들려오는 저 둘의 대화만 들어도 충분했다.

계속 참견하는 토토도 웃겼지만, 그런 토토에게 쉬지 않고 대꾸해 주는 성하진이 더 웃겼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콩트처럼 들리기도 하고, 어쩌면 지금 토토가 그의 정수리에 올라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조종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유명 애니메이션 주인공들과 겹쳐 보이는 둘의 모습을 상상한 지수가 베개에 고개를 파묻으며 자조했다.

‘가관이다…… 가관이야…….’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이랬다저랬다 오락가락했다.

불과 5초 전만 해도 자신이 한심하고 아픈 게 부끄럽다 못해 짜증이 났는데, 지금은 찌개에 넣을 야채로 옥신각신하는 토토와 성하진의 대화 덕분에 조금 즐거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락가락하는 제 기분과 달리, 호흡은 평온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래. 맘 편히 먹자. 짜증 내서 뭐 하겠어…….’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65층 높이에서 보는 노을은 주변에 가리는 건물이 별로 없어 그런지 더 선명하고, 붉고, 아름답게 보였다.

구름이 가로로 길게 늘어져 운치를 더한 하늘을 감상하던 지수는 후각을 자극받아 몸을 일으켰다.

열어 둔 방문으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그리고 뭔가 다지는 건지 기민한 칼질 소리와 함께 토토의 불만스러운 칭얼거림이 들렸다.

“쮜이잇!”

“계란찜에 들어가는 야채는 어차피 맛이 거의 나지 않는다.”

“쮜!”

“너도 다 컸으니, 파와 당근 정도는 먹어라.”

“쮜잇! 쮜이잇! 쮯!!!”

“자꾸 당근만 골라 떨어뜨리면 오늘 밥은 사료만 주겠다.”

“쮸?”

침대에 걸터앉아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환한 거실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자 주방에서 기척을 느낀 성하진과 토토가 지수를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쮜잇!”

“다 차려 갑니다.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내심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지수가 공황 발작을 이겨 내고 잘 호흡하는 모습을 확인한 성하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지수를 침대에 눕힌 거였다.

토토도 지수의 머리맡에 눕혀 준 후 식재료를 사 오겠다며 나가더니, 30분도 지나지 않아 양손 가득 장을 봐 왔다.

그리곤 메뉴는 알아서 정하겠다더니, 이것저것 씻고 다듬고 요리를 시작했다.

지수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식사는 앞으로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못 박았다.

그리고 정 자신을 도와주고 싶다면 침대에 누워 푹 쉬라고 했다. 사실상 주방에서 나가 있으라는 축객령이었다.

그가 워낙 단호해 더 도와준다는 말을 꺼내는 대신 침대에서 얌전히 쉬고 나온 지수는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노려보는 토토에게 말을 걸었다.

“토토야.”

“쮜?”

“왜 그리 심술이 났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어?”

“쮜! 쮜이 쮜이!”

지수의 물음에 토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근 한 조각을 집어 들고 울었다. 이것 좀 보라고, 내 말 좀 들어 보라는 듯이 당근을 흔들더니, 부리부리 뾰족한 세모눈으로 성하진을 바라봤다.

“음? 우리 토토 당근 잘 먹잖아~ 왜, 뭐가 문제야. 방해하지 말고 아빠한테 와.”

당근 조각을 패대기친 토토가 성하진의 몸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곤 와다닥 달려와 지수의 바짓단을 타고 등반해 가슴팍에 매달려 세상 서럽게 울며 치대기 시작했다.

“쮜잇! 쮜이있!”

“어이구, 토토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랬어~? 괜찮아. 아빠가 토토 당근까지 다 먹어 줄게.”

지수가 대신 먹어 준다는 말을 들은 토토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더 서럽게 울었다.

세상 억울한 표정의 토토를 본 지수가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지수는 야채를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토토가 당근을 빼려는 이유를 알았다. 당근은 토토가 아니라, 지수가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은 이유는 식사 준비를 도맡은 성하진이 신경 쓰는 게 싫다는 이유였지만, 토토만 억울한 상황이 된 것도 미안해서 털을 보듬으며 정수리에 쪽쪽 뽀뽀해 주었다.

지수의 뽀뽀를 받은 토토는 기분이 조금 풀린 듯이 “쮜이…….” 하고 울었지만, 새침한 표정을 유지했다.

지수가 토라진 토토를 어르고 달래는 동안 성하진은 식사 준비를 척척 해냈다.

보글보글 끓인 찌개가 얼추 완성됐는지, 불을 끄고 냄비를 옮겼다. 그리고 다른 냄비에 찌던 달걀찜도 꺼내고 이게 마지막 메뉴라며 팬에 불고기를 볶기 시작했다.

그가 요리하는 메뉴를 하나하나 확인한 지수는 토토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신기하네…….’

당근이 들어갔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차돌박이와 애호박이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 잘게 썬 파와 명란젓과 다진 당근을 넣은 달걀찜, 국물이 많은 불고기는 전부 지수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보통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좋아하는 메뉴이기 때문에 뭐가 신기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메뉴의 조합이었다.

국물이 많은 불고기. 차돌 애호박 된장찌개. 명란 달걀찜. 세 가지 메뉴가 동시에 식탁에 올라오는 날은 언제나 우울한 막내를 달래 주기 위해 러비스 멤버들이 각자 특기인 메뉴를 선보인 날이었다.

‘정진이 형은 명란 달걀찜, 지오 형은 차돌 된장찌개, 그리고…….’

국물이 많은 불고기는 리더 강재윤의 특기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기억이 흐려지며 거의 강제적으로 마지막 멤버 신희원이 떠올랐다.

“…….”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이 기억의 유실이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요리를 못 하는 신희원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다른 형들과 달리 식재료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요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지수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패밀리 사이즈로 사 주곤 했다.

노래나 춤에 있어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종종 슬럼프를 겪는 우울한 막내 포지션이었던 지수는, 그런 날이면 숙소 단지 입구에 있는 아이스크림 체인점에 끌려가곤 했다.

속상하고 부끄러워서 이불을 덮어쓰고 싶었지만, 질질 끌려 나가 알록달록 색색별로 놓인 아이스크림들을 보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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