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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21화 (21/172)

#020.

깨진 독 9

따라오라는 말에 김현아는 일단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기다리자 임세주가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이제 눈 떠 주세요.”

“……!!”

천천히 눈을 뜬 김현아는 퍽 놀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태종대 게이트군요.”

“네. 그…… 일종의 환영인데, 실제 존재했던 환영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돼요.”

고개를 내리자 저가 서 있는 곳 근처에 엎드린 한지수가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 기어가려는 한지수를 보호하기 위해 등 뒤로 엎드려 한지수의 몸을 끌어안은 진보라 에스퍼와 바짓단에 매달린 토토가 보였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은 동영상을 일시 정지해 둔 것처럼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상태였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요.”

“그, 그런가요? 최대한 보여 드리기 쉽게 구현해 본 건데…… 그럼…… 현장을 다시 보여 드릴게요. 저기 스파크 튀는 부분을 봐 주시면 돼요.”

“네.”

김현아가 대답하자마자 갑자기 일시 정지된 것 같은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보라 에스퍼에게 놓으라고 외치는 지수의 앞으로 토토가 달려 나와 보호막 스킬을 사용했다. 구체 핵이 점점 작아지며 스파크도 작아졌다.

그런데, 그 순간.

김현아는 자신이 봤던 영상과 지금 이 장소에서 보는 핵의 전혀 다른 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김현아가 차이를 눈치챈 걸 알았는지 또 주변 공간이 모두 멈췄다.

다시 일시 정지된 영상처럼 고요해진 공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임세주가 앞으로 탁탁 걸어 나가더니 주먹만 해진 구체 핵 주변에 모여든 빛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거 보이시죠?”

“……확실히 영상에선 못 보던 빛인데…….”

김현아는 임세주가 가리킨 구체 핵 주변에 모여든 빛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고 살폈다.

스파크가 아닌, 나뭇잎같이 조금 길쭉한 모양의 빛 방울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일반 영상에선 전혀 나오지 않은 빛이었다.

“이게 제 눈에 보이는 파장이에요. 세상엔 엄청 다양한 파장이 있거든요. 공기 중에 그냥 떠다니는 파장도 많고, 사람이나 동물마다 내뿜는 에너지도 제각각이라 색이나 모양이나 기운이 다 달라요. 아직 연구가 다 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각성하면서 본 바로는, 서로 다른 개체에서 똑같은 파장은 절대 존재하지 않아요.”

“…….”

“이렇게 아름다운 파장은 처음 봤어요. 며칠 전까진 말이죠…….”

“…….”

즉, 그녀는 며칠 전에 이것과 똑같은 파장을 봤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라도, 김현아는 자신이 꼭 알아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임세주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김현아의 손을 잡았다.

“잠시 눈을 감아 주세요. 제가 보여 드리려던 영상의 장소로 가 볼게요.”

김현아는 얌전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러자 차가 지나다니며 내는 도시 특유의 소음이 들렸다.

“이제 뜨셔도 돼요.”

“…….”

눈을 뜬 김현아는 여기가 어딘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장소뿐만이 아니라 날짜도, 시간도 말이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갈 뻔했지만, 상대가 물리계가 아닌 정신계 에스퍼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임세주의 손을 부러뜨리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

도로 위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퇴근 시간.

두 사람이 서 있는 건물에서 누군가 나오는 게 보였다.

이제 막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후드티를 쓴 소년이었다.

“……!!”

김현아는 그가 누군지 잘 알았다. 그래서 임세주의 손을 놓고 따라 걸으며 홀린 듯 하염없이 소년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건물에서 나온 소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건물 앞 대로변이 아닌 건물 옆 골목으로 쓱 빠졌다. 소년의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 저 멀리 편의점이 보였다.

입술을 꾹 다문 김현아는 소년을 따라 걸으며 내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김현아의 기억에 의하면, 이제 이 소년은 편의점이 아닌 다른 더 좁은 골목으로 빠지게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정확했다.

걸음을 멈춘 소년이 자신이 있는 곳보다 더 좁은 골목을 향해 돌아서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골목 안의 또 다른 좁은 골목 깊은 곳에서 은은한 빛이 맴돌고 있었다.

일반적인 빛이 아니라, 어느 한 지점에 빛 방울들이 둥둥 떠 작은 원형을 유지하는 모습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김현아는 소년이 빛무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몇 걸음 앞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모습은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그간 봤던 모든 CCTV 영상에선 이 좁은 골목에 들어선 이후를 전혀 볼 수 없었으니까.

“…….”

소년이 둥글게 모여 있는 빛무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 순간, 모든 세상이 정지했다. 저도 모르게 몰입하고 있던 김현아가 흠칫하자, 임세주가 담담한 목소리로 빛을 가리켰다.

“똑같아요.”

“…….”

태종대 던전 게이트가 소멸할 때 영상에서 보이지 않은 빛과 똑같았다.

길쭉한 나뭇잎 같은 빛 방울들이 떠 있었는데, 이를 확인시켜 주려는 듯 임세주가 손을 허공에 휙 그었다. 그러자 마치 어디서 잘라 온 그림처럼 허공에 빛 한 덩이가 생겼는데, 배경에 맑은 하늘과 바다가 얼핏 보였다.

“보시면, 이게 태종대에서 따온 빛이고요……. 이걸 여기에 대면…….”

임세주가 마치 포토샵 누끼 따듯 형성한 빛을 김현아의 앞에 서 있는 소년의 정수리 위에 빛과 합쳤다.

100% 정확하게 합쳐지는 빛 방울들은 서로 완벽하게 똑같았다.

“……동일한 빛이군요.”

“네. 완벽하게 똑같죠? 크기가 다를 순 있어도 형태는 같아서, 이렇게 크기를 맞추면 100% 일치하게 돼요.”

“…….”

“……어, 그럼…… 이제 그만 나가도 될까요?”

임세주가 머뭇머뭇 손을 내밀며 조심스레 물었다. 김현아는 임세주가 내민 손은 보지도 않은 채, 눈앞에 소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 말이 없던 그녀는 임세주가 입술을 달싹이며 슬그머니 손을 내리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세주 에스퍼.”

“……!! 네, 네?”

“……이다음도 보고 싶습니다.”

“…….”

“가능하다면 부탁드립니다.”

가능한 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지만, 정중한 부탁이었다.

임세주는 잠시 머뭇머뭇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아는 강한 사람이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세상을 움직였다.

“…….”

늘 CCTV 사각지대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장면…….

그 장면을 드디어 보게 된 김현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기억에 새기기 시작했다.

19년 전.

새하얀 빛무리에 삼켜져서, 마치 증발하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친오빠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 * *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노을로 회의실 내부는 온통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불을 꺼두어 조금 어둑한 회의실에서 홀로 턱을 괴고 앉아 있던 김현아는 눈을 내리뜬 채 손가락으로 툭- 툭- 툭-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생각할 것이 있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는데, 두드린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머리는 복잡했다.

이 회의실에 앉아 있는 내내 그랬지만,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김현아는 다시금 아까 본 장면을 떠올렸다.

강재윤이 들어간 부산 던전 게이트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파생한 빛무리와 자신의 큰오빠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막다른 골목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밝은 빛에 삼켜지는 모습을.

그간 경찰에서 공개한 CCTV 영상은 전부 큰오빠가 골목으로 들어간 후 사각지대에 가려진 상태로 강한 빛이 번쩍인 후에 끝났었다.

근처 CCTV를 모두 뒤져도 사각지대 안쪽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실종 장면을 정확하게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시엔 재벌 3세를 유괴해 몸값을 요구하려는 시도로 여겨 바로 수사에 들어갔지만, 시일이 지나도 납치범으로부터 접촉이 전혀 없자, 수사팀은 결국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평화 그룹 장남의 실종 사건이 언론에 공개되었을 당시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었다. TV엔 평화 그룹 차기 후계자로 내정된 장남의 얼굴이 매일 나왔고, CCTV 영상도 공개한 덕분에 각종 매체에서 영상을 분석하려는 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석가들은 영상에서 그 어떤 조작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입 모아 말했고, 실종된 소년을 봤다는 목격자들의 제보도 끊이지 않았다.

저 넘치는 제보 중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영상 분석가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간 후, 나오는 장면이 주변 CCTV에서도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고 입 모아 말한 탓에 외계인의 납치가 아니냐는 의견도 많았다.

그 당시 김현아는 궁금했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궁금했다.

골목에서 짧게 번쩍인 강한 빛은 뭔지, 어째서 큰오빠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간 모습만 찍히고 나오는 모습은 찍히지 않은 건지……. 또 골목 안에서 사라진 거라면, 제 큰오빠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증발’하게 된 건지,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진짜 사라진 거였다니…….’

꽤 오랜 세월 풀지 못했던 문제의 정답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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