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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20화 (20/172)

#019.

깨진 독 8

지수가 고개를 숙인 채 힘겨워하자 내내 눈치만 보고 있던 토토가 와다닥 다가와 지수의 허벅지 위에 발라당 누웠다. 지수는 갑자기 제 시야에 들어온 토실한 배를 보며 말했다.

“토토…… 배…… 털…….”

“예, 토토 배털이 무척 하얗군요. 괜찮아요. 잘하고 있습니다. 두 개 더 찾아봅시다.”

“하아…… 후우…… 워치…… 제 워치요…….”

“잘 찾으시네요. 마지막입니다. 하나만 더 찾읍시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눈알만 겨우 굴리던 지수가 고개를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러자 소파 위에 쿠션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내내 제 옆구리 부근에 있던 쿠션이었다.

“……쿠션이요…….”

“완벽하군요.”

내내 보듬던 등에서 손을 뗀 성하진이 쿠션을 집어 들고는 지수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곤 지수의 손목을 잡아끌어 쿠션 자수가 새겨진 부분에 올려 두고, 아래위로 쓱쓱 만지게 하며 물었다.

“촉감이 어떻습니까.”

“하…… 까끌까끌해요…….”

“그럼 이쪽은?”

이번엔 자수가 없는 면을 만지게 했다. 지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부드러워요…….”

“부드럽군요.”

성하진은 지수의 손목을 잡아 쿠션에서 떼곤, 자신의 반대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

지수는 손목을 잡힌 채 성하진의 손바닥을 만지며 촉감을 느꼈다. 상당히 거친 손이었다. 이 정도면 사포를 문지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칠었는데, 신기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움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분명 까끌까끌할 정도로 거친데, 어떻게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걸까? 그런 의아함이 든 지수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엄청 거친데…… 조금 부드러워요…….”

일단 나오는 대로 대답한 지수는 순간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싶어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지수와 눈이 마주친 성하진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한결 부드러워진 눈매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확합니다. 잘했습니다.”

“……?”

대체 뭘 잘했다는 걸까?

왜 칭찬받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지수는 지금 자신이 호흡을 제대로 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 눈이 커졌다.

그러자 내내 지수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성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굉장히 침착하게 잘했습니다.”

연이은 칭찬을 들은 지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 고맙습니다…….”

“쮜잇-!”

“……응, 토토도 고마워.”

“쮸!”

지수는 제 허벅지 위에 여전히 누워 있는 토토의 하얀 배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살풋 미소 지었다.

성하진의 말대로 자신이 잘한 게 맞는 것 같았다.

거짓말처럼 호흡이 편안했다.

* * *

에스퍼 등록증을 찍고 회의실에 들어선 김현아는 먼저 도착해 앉아 있는 여성을 바라봤다.

초조한 듯이 머그잔을 쥐락펴락하던 단발머리 앳된 여성은 김현아를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져 벌떡 일어났다.

김현아는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카드키에 <방문객 – 임세주 님>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제 기운을 갈무리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김현아 에스퍼입니다.”

“……!! 아, 안녕하세요! 이, 임세주…… 에스퍼 입니다…….”

어째 이름 다음에 나오는 에스퍼라는 부분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확 줄었지만, 김현아는 개의치 않고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임세주는 허둥지둥 제 옷에 손을 비벼 닦더니 조심스레 김현아의 손을 맞잡고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했다.

얼마나 긴장한 건지 맞잡은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느낀 김현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 편히 앉으세요.”

“예, 예…… 큼.”

임세주가 원래 자리에 앉자, 김현아는 그녀의 대각선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앞에 내려 둔 태블릿을 눈짓하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 안에 들어 있나요? 제가 꼭 직접 봐야만 하는 영상이?”

임세주는 바짝 긴장했으면서도 김현아를 향해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조금 떨리지만,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강재윤 에스퍼와…… 김현아 에스퍼님의 가족분과 관련된 영상입니다.”

김현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

“그…… 음…… 김현아 에스퍼님께서 이미 제 조사는 마치셨겠지만…… 전 파장을 분석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김현아가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바짝 긴장한 임세주가 목소리를 떨며 제 소개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게…… 음…… 사실 에스퍼 등록할 땐 대충 그렇게 말했는데, 조금 다르거든요. 제가 파장을 보는 건 맞는데……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요. 근데 보통 방법으론 다른 분들 눈엔 그 파장이 안 보여서…… 제가, 이걸 보여드리려면, 어 그러니까, 제가 김현아 에스퍼님께…… 어…… 그…….”

김현아는 제 앞에서 내내 머뭇머뭇 눈치 보는 임세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신계 스킬을 사용해야 한다는 거군요?”

“……!! 네, 네. 맞아요……! 그래서…… 제가 김현아 에스퍼와 잠시 정신을…… 공유해야 합니다. 저를 거부하시면 보여드릴 수가 없어요…….”

“제가 세뇌 저주 L급 방어 스킬이 있는 건 알고 있죠?”

“……!! 네! 절대로! 세뇌나 저주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계약서도 쓸 수 있어요! 제 목숨을 걸고!”

그렇지 않아도 계약서는 쓰려고 했다며 김현아가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L급 상호 비밀 유지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내용은 미리 준비한 대로 이 이야기를 서로 상의 없이 발설할 경우, 또는 정신계 스킬로 서로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에 대한 페널티가 적혀 있었다. 이를 어길 경우 목숨까진 아니지만, 시력을 영구적으로 잃는다는 조건이 쓰여 있었다.

“전 서명했으니, 읽어 보시고 하시면 됩니다.”

“네, 네. 잠시만요!”

김현아에게 계약서를 건네받은 임세주는 내용을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쭉 훑어 내려가다 계약을 어길 시 대가 항목에서 멈춘 그녀는 몇 번이고 그 부분을 다시 읽었다.

흔히 대형 길드에서 내거는 ‘목숨’이 아니라 ‘시력 상실’이라는 항목이 생소했는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리며 정독했다.

계약서를 읽는 임세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현아는 그녀가 자신에게 메일로 제보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김현아 에스퍼가 꼭 봐야 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김현아 에스퍼의 소중한 사람들과 관련된 영상입니다. 꼭 직접 보셔야 합니다.』

소중한 사람들.

특정한 범위 내에 단정 지을 수 있는 몇몇 사람이 떠오르기에 아주 적합한 말이었다. 그래서 김현아는 이게 미끼든 아니든 일단 물었다.

뭘 보여 주려고 개인 연락망까지 찾아내 이런 내용을 보낸 건지 궁금해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주변 사람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일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상대가 어떻든 걱정할 일은 없었다. 어차피 누구든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자신의 가족과 강재윤의 이름이 동시에 나올 줄은 몰랐기에 더 궁금해졌다.

‘뭘까?’

임세주는 김현아가 저를 뜯어보는 것도 모른 채 계약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명을 마친 순간, 허공에 상호 간의 계약이 성립되었다는 황금빛 글자가 팝업됐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계약서를 받아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은 김현아가 자세를 다소 편히 고쳐 앉으며 물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말씀하신 중요한 영상부터 보도록 할까요?”

“……네. 그럼…… 잠시…….”

임세주가 의자를 끌어 김현아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와 자신이 가져온 태블릿을 톡 톡 두드렸다. 그러자 한 영상이 재생됐는데, 김현아도 익히 아는 영상이었다.

아니, 김현아뿐만이 아니라, 문명이 닿은 지구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영상.

바로 며칠 전, 태종대 던전 입구가 소멸하기 직전의 영상이었다.

구체 핵처럼 크게 부푼 시커먼 덩어리가 파직 파지직 스파크를 튀기며 회전하고 있었다.

구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엎드린 한지수와 그 위를 감싸며 엎드린 진보라, 그리고 한지수의 바짓단에 매달린 토토도.

시간이 흐를수록 시커먼 구체는 점점 작아지다가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며칠간 김현아가 수없이 본 영상과 똑같았다. 다를 게 없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김현아가 차분하게 물었다.

“제가 무언가 놓쳤으니 굳이 이걸 보여 주신 거겠죠?”

“네. 음…… 혹시 이 근처에 떠다니는 빛 보이세요?”

“게이트가 소멸할 때 번쩍인 빛 말씀이신가요?”

“아…… 음, 아뇨. 역시 안 보이시는군요. 김현아 에스퍼님이라면 혹시 보이실까 해서 여쭤봤어요. 그럼 진짜 제대로 보여 드릴게요.”

김현아가 어디 해 보라는 듯이 바라보자, 임세주가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아 주세요.”

“…….”

김현아는 지체 없이 바로 손을 잡았다. 자기가 잡으라고 해 놓고 화들짝 놀란 임세주가 멋쩍은 듯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더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제 눈으로 보이는 걸 보여 드릴게요. 저를 거부하시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눈을 감고 저를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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