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깨진 독 6
“그러니까…… 지금 만약 성하진 에스퍼가 그 스킬을 쓰면…… 누나가 내 옆에 있어도 방사 가이딩을 전혀 못 느낀다고?”
“응.”
“……그게 대체 무슨 스킬이야?”
“나도 자세히는 몰라. 효력만 들었어.”
“…….”
보통 각성자들이 자신의 스킬을 많이 함축시켜 말하거나 핵심 정보는 숨기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듣도 보도 못한 효력인 터라 지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정신계 스킬은 아니지?”
“하하. 절대 아냐. 설령 정신계 스킬이 있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막 쓸 인간도 아니고.”
“…….”
성하진이라는 에스퍼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보이는 발언이었다.
지수는 김현아에게 마구 쓰다듬어져 기분 좋아진 토토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아예 김현아의 손바닥 위로 올라간 것을 지켜보며 물었다.
“속성은?”
“물.”
“……정하진 에스퍼랑…… 되게 비슷하네?”
그 물음에 김현아는 슬그머니 토토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곤 짐짓 대수롭지 않게 “그러게. 성격도 좀 비슷할걸? 무뚝뚝한 편이거든. 그래도 정하진 에스퍼만큼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정도로 대답하며 손을 더 격하게 움직였다.
“쮜잇, 쮜쮜잇~”
거칠어 보이지만 매우 섬세한 컨트롤에 아예 배를 까뒤집고 누운 토토가 그녀의 현란한 손길을 즐기며 뒷발을 파르르 떨었다.
지수는 지금 김현아가 은근히 제 시선을 피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의아했지만, 곧 억측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지고 보면 평화 길드도 아닌 무소속 프리랜서 SS급 에스퍼가 B급 가이드인 자신을 케어하기 위해 평화 길드 내에서 같이 머무는 게 더 이상했다. 김현아가 아무리 자신을 아낀다고 해도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음…… 그래. 솔직히 말도 안 되지…….’
현실성 없는 의심을 빠르게 증발시킨 지수는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김현아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상 대화라기보단, 앞으로 어딜 가든 꼭 성하진 에스퍼랑 다녀야 하고, 외출할 때는 누나한테 연락해야 한다. 혹시 누가 시비 걸거나 괴롭히면 성하진 에스퍼가 알아서 패, 아니, 알아서 처리할 테지만, 그래도 꼭 누나한테 말해라. 등의 당부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뭔가 고민할 일이 생기면 제발 혼자 결정하지 말고, 일단 누나랑 상의해라. 만약 누나한테 말하기 껄끄러운 고민이면 상담할 사람을 붙여 줄 수도 있다. 그러니 꼭 성하진이나 누나한테 말만 하라며 몇 번이고 강조했다.
지수는 그녀의 애정 어린 잔소리를 들으며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면 차에 두는 흔들 인형 같다고 할 정도로 기계적인 호응이었지만, 김현아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빼지 않고 귀담아듣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 나누고 있자니, 김현아의 휴대폰이 부르르 울렸다.
“아, 마침 왔네.”
액정을 확인한 김현아가 손바닥 위에 납작한 찹쌀떡처럼 퍼진 토토를 지수의 옆에 내려 두고 현관으로 향했다.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사이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현아가 말한 대로 무뚝뚝한 편인지,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준 인사는 아주 짧고 담백했다. 이어 곧바로 거실로 온 둘을 본 순간, 지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엄청 크네…….’
김현아를 따라 거실로 들어선 남자는 대충 봐도 195cm는 넘어 보였다.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라 어깨도 넓었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맞게 균형 잡힌 몸은 가느다란 자신의 몸과 다르게 멋지게만 보였다.
게다가 각성 전에 군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곧은 자세에, 지수를 살피는 눈빛도 날카로웠다. 먼저 인사를 하려던 지수가 그의 예리한 눈빛에 잠시 머뭇거리자, 김현아가 그의 옆구리를 퍽 치며 “어허. 오빠 눈빛.” 하고 핀잔했다.
“……!!”
SS급 에스퍼 김현아에게 가격당한 옆구리가 퍽 아팠는지, 어울리지 않게 놀란 남자가 멋쩍은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성하진 에스퍼입니다.”
“……! 아, 네. 전 한지수 가이드입니다. 들으셨겠지만, 당분간 김지수 이름으로, 그리고…….”
지수가 변신 스킬을 사용해 여성의 모습으로 변하자,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방 밖에선 이 모습으로…… 활동 예정입니다.”
성하진은 20대 여성의 모습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목소리까지 변조도 되니 다행이군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저야말로…….”
성하진이 먼저 손을 내밀자, 지수는 변신을 풀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악수하기 전, 긴장한 탓에 식은땀이 난 손바닥을 옷에 쓱 닦은 후 그와 손을 맞잡았다.
‘……A급…… 맞겠지?’
악수를 하면서도 은근한 압박감이 느껴져 속이 답답했다. 김현아가 분명 A급이라고 소개했지만, 지수가 느끼기에 그가 주는 위압감은 최소 S급은 되는 것 같았다.
이마에 A급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누구나 S급으로 인식할 거라 확신이 들 정도로 강한 기운이었다.
0.5초 정도 이마에 A급 포스트잇을 붙이고 다니는 성하진의 모습을 상상한 지수는, 토토의 “쮜잇?” 소리에 정신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토토가 지수의 손바닥 위로 올라와 팔을 타고 어깨까지 등반하는 내내 성하진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얘는 제 테이밍 몬스터 토토예요. S급 실드 스킬이 있는 녀석인데, 제가 방금 모습으로 변하면 토토는 오목눈이 새로 변하게 돼요.”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아, 네……. 음…… 어, 음……. 네…….”
첫 만남의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그에게 토토를 소개했는데, 어째 더 어색해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는 토토를 처음 본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토토를 보면 “안녕, 토토야~” 하고 인사하거나, 너 정말 귀엽다느니,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햄스터가 있을 수 있냐고, 혹시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묻곤 했다.
하지만 그는 토토를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물론 꼭 토토를 보고 주접을 떨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라 지수 역시 당황해 버렸다.
쓰담쓰담에 대비해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고 있던 토토도 성하진의 생소한 반응에 실망한 듯 “쮜이…….” 작게 울더니 지수의 몸에서 뽀로로 내려갔다.
옆에서 인사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현아는 피식 웃으며 지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말했잖아. 무뚝뚝하다고.”
“…….”
“…….”
“그래도 둘이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자. 그럼 난 가 볼게.”
“……어? 누나, 간다고?”
“어딜?”
두 사람이 동시에 묻자 김현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조금 숨이 막히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지수는 그녀가 웃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안면 근육을 굳힌 걸 눈치채고 눈을 흘겨 떴다.
“누나…… 밥이라도 먹고 가지…….”
“안 돼. 오후에 중요한 회의 있어.”
“……!!”
“…….”
“둘이 식사부터 하면서 서로 알아 가면 되겠네. 앞으로 계속 같이 지내야 하는데, 잘 지내봐!”
중요한 회의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담하게 받아들인 성하진과 달리 지수는 그녀의 옷소매를 잡았다.
이렇게 어색한데, 가 버리면 어쩌냐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제발 더 있다 가라는 눈빛으로 잡아당겼지만, SS급 에스퍼답게 지수의 애절한 손길을 가볍게 스루한 김현아가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둘이 친해질 수 있도록 내가 질문지 보내 놨으니까, 그것부터 맞춰 봐. 같이 밥도 먹고. 그럼 이따 밤에 들를게.”
“…….”
“…….”
“쮜…….”
김현아가 거실과 주방 사이 현관으로 가는 복도로 돌아 사라진 후,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삐리릭-
도어록이 잠기자, 집 안엔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떻게든 어색함을 깨 보고자 지수가 조심스레 성하진을 올려다봤지만 입술만 달싹였을 뿐, 쉽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막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확인한 그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 탓이었다.
‘……뭔가…… 갑자기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그의 표정이 퍽 심각해 보여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고민하던 지수는 일종의 답답함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꼈다.
‘재윤이 형이 있다면 알아서 분위기 잘 풀어 줬을 텐데…….’
지수는 사람을 대하는 게 늘 서툴고 어려웠다.
그나마 단 하나,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러비스의 팬들이었다. 진심을 다해 먼저 다가오는 팬들에겐 지수 역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대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업무나 모종의 목적을 위해 만나는 사람들, 또는 낯선 이에게는 도통 먼저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런 어색한 자리가 있으면 항상 강재윤이…….
“…….”
‘형이 어떻게 했더라?’
고개를 기울인 지수가 답답함에 제 가슴을 꾹 눌렀다.
‘이렇게 어색할 땐…… 형이 분명…… 사람들을 편하게…… 대했는데…… 어떻게 대했었지?’
지수의 머릿속에 강재윤 특유의 미소와 제스처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살짝 처진 눈꼬리를 곱게 접어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려다, 이내 기억나지 않고 그대로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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