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깨진 독 5
한지수는 궁금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니, 그들과 자신이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자신은 강재윤에 대한 기억을 완벽하게 삭제당한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차단당한 거였으니까.
즉 그 사람들이 원하는 삭제 세뇌를 받게 된다면, 애초에 자신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적 없는 존재가 될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아마 이렇게 힘들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네……. 다르네……. 확실히 편하겠네. 완벽하게 다 잊으면.’
삭제와 차단의 차이를 떠올리고 나니, 아예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 이해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수는 여전히 기억을 삭제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너무 사랑했던 형과 동생. 동네에서 어려서부터 연습생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까지 늘 붙어 다녔던 친구들. 동갑즈라고 불렸던 멤버 형들. 그리고 강재윤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매일매일 아파서 울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고, 종국엔 끝없이 차오른 슬픔에 빠져 익사하는 날이 온다 해도 그들을 기억한 채 모든 기억을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러다 지수는 문득, 언젠가 강재윤이 제게 말했던…… 제게…… 그가 알려 주었던…….
“…….”
강재윤이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하…….”
“삐이?”
“아무것도 아냐, 토토야. 누나, 나 조금만 잘게.”
“그래.”
“삐이…….”
정신계 스킬에 대항을 포기한 지수는 토토를 허벅지에 올려 두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짧으면 열흘, 길면 보름. 곧 다시 강재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터였으니 굳이 지금 사서 고생할 필요도, 혼자 초조해하며 발 동동 구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버티면 될 일이었다.
* * *
“김지수 님.”
“네.”
한지수가 아닌 김지수라고 불린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부른 직원에게 다가갔다.
지수의 곁엔 김현아도 함께 있었는데, 담당 직원은 그녀의 팬인지 김현아를 꽤 의식하며 착석을 권했다.
지수와 김현아가 각각 자리에 앉자 직원은 각종 서류를 지수의 앞에 내밀었다.
“먼저 작성하신 계약서는 담당 부서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건 정식 길드원증입니다. 길드 식당이나 부대시설 등 대부분 시설은 이 카드가 있어야 출입할 수 있습니다. 보통 회사 사원증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네.”
“그리고 이건 가이드 자격증입니다. 길드원증과 같은 기능이 들어 있고요. 다른 점은 기숙사나 각성자 훈련 시설 같은 곳은 이 가이드 자격증이 있어야 출입 가능합니다. 해당 시설의 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때도 필요하고요.”
지수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바라보자, 눈을 마주한 직원 역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일반 길드원증으로는 길드 사무 시설이나 공용 부대시설까지만 출입 가능하니, 가이드 자격증은 항시 소지해 주세요. 던전 입장 전에도 신분 확인 시에는 길드원증 말고 가이드 자격증으로 진행해 주셔야 합니다.”
“네.”
직원은 성실하게 설명했고, 지수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지만 지금은 막 각성해 아무것도 모르는 20대 초반의 가이드 행세를 하고 있으므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김현아가 서류 등록을 미리 해 두고, 계약 사항도 좋게 조정해 사인하게 한 후라 가이드 등록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토토 역시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되, S급이 아닌 C급으로 표기했고, 별다른 스킬을 가지지 않은 무속성 오목눈이 새로 등록했다.
<토토>라는 이름이 ‘소동물’ 타입의 테이밍 몬스터 중에서 가장 흔한 이름 3위를 차지한 덕분인지, 담당자는 토토라는 이름을 듣고도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한토토보단, 김토토가 더 어감이 좋긴 하네.’
직원은 이미 아는 설명을 듣느라 잠시 다른 생각한 지수의 앞에 상자를 쓱 밀어 주었다.
뚜껑을 열자, 평화 길드 내에서 사용하는 가이드 워치가 보였다. 새 워치는 지수가 기존에 사용하던 검은 색상이 아닌 흰 색상이었다.
지수는 이번에도 익히 아는 기기 사용법을 들으며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함께 지루해하던 김현아는 직원이 위기 시 자동 호출 명단 1순위 설정을 언급하자 거기에 제 이름을 올렸다.
그 외에도 설명을 들을 것이 많았다. 거의 1시간 정도가 지나 모든 설명이 끝나고, 서류와 길드원증, 가이드 자격증을 받고서야 간신히 기숙사 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김현아가 직접 안내하겠다며 직원 안내를 정중히 거절한 덕분에, 지수는 자신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참았던 한숨을 푹 내쉴 수 있었다.
“내 방 바로 옆방이야. 어때. 전보다 더 괜찮아졌지?”
“……응.”
평화 길드는 다른 길드와 달리 각성자의 등급별로 기숙사 수준을 나누지 않았기에, 모든 기숙사가 똑같은 방 구조와 똑같은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1인실이냐, 2인실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예전에 강재윤과 2인 기숙사에서 잠시 생활했던 한지수 역시 내부 시설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지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주머니에 얌전히 앉아 있느라 답답했을 토토를 꺼내 주었다.
오목눈이 새 모습의 토토는 지수의 손바닥 위에 앉아 주변을 살피다 기숙사를 한 바퀴 돌아보곤 지수의 어깨로 돌아왔다.
“삐-!”
새로 지낼 장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정수리로 지수의 턱을 두 번 콩콩 박더니, 이번엔 김현아를 향해 “삐-!!” 하고 울었다.
김현아는 토토의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살살 쓰다듬어 준 후, 거실 소파에 털푸덕 앉아 말했다.
“일단. 내가 널 데리고 온 이상 당분간 시선은 받을 거야. 대놓고 의심하는 놈들이 생길 수도 있는데, 뭐…… 그건 대충 알아서 쳐 내.”
“응.”
“신입 교육 기간이라고 해 뒀으니, 가이딩실에 갈 필요 없어. 아니, 앞으로도 거긴 가지 마.”
“최고네.”
“하하, 그렇지? 그리고, 아까 말했던 룸메이트는 곧 올 거야.”
그 말에 지수가 변신 스킬을 해제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토토 역시 골든 햄스터로 돌아와 지수의 팔을 타고 주르륵 내려왔다. 김현아는 작은 손으로 열심히 세수하는 토토를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 룸메랑 지내. 대외적으로 실전 교육 담당자라고 말해 뒀으니, 여기서 실컷 빈둥거리다가, 답답하면 둘이 같이 D급 이하 던전이나 산책 다녀오고 그래도 돼.”
“오…….”
“그리고 비밀 유지 서약서도 L급으로 작성했으니까, 둘만 기숙사에 있을 땐 굳이 변신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어떤 사람이야?”
“믿을 만한 사람.”
그 물음에 옅게 웃은 지수가 김현아의 옆에 편히 앉아 재차 물었다.
“누나가 소개해 주는 사람인데 당연히 믿을 만하겠지. 그런 거 말고.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음…… 아마 모를……걸?”
“그래? 누군데?”
지수는 가이딩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곁에서 자신을 케어해 줄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말이 케어지, 사실상 지수가 처방 약을 제대로 먹는지, 혹시나 허튼짓은 하지 않는지 곁에서 밀착 감시하는 거지만, 이에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그간 조금 슬픔에 잠겼을 뿐, 멀쩡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정신이 사실은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가이딩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이라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현아는 생각보다 평온해 보이는 지수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하진 에스퍼.”
“……어? 성하진?”
물을 다루는 SS급 에스퍼 정하진과 이름이 굉장히 비슷해 저도 모르게 되묻자, 김현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어. 성하진. 넌 아마 모를 거야. 계속 미국 소규모 길드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다 국내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거든. 오자마자 내가 우리 길드로 납치했고.”
“……그렇구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야?”
“응. 내가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지수가 다소 힘없이 대답하자, 김현아는 토토를 쓰다듬던 손을 슬그머니 올려 지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정리해 주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에, 성하진은 A급 에스퍼고, 내가 신뢰하기도 하지만, 그 오빠가 특수 스킬이 하나 있어서 네 룸메로 붙인 거기도 해.”
“특수 스킬? 어떤 건데?”
특수 스킬이라는 말에 지수와 토토의 귀가 쫑긋 섰다. 김현아는 그 반응을 눈치채고 다시 토토를 격렬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방사 가이딩을 줄줄 흘리고 다녀도 다른 녀석들에게 가지 않도록 다 흡수하는 스킬.”
“……뭐?”
스킬 효력을 들은 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방사 가이딩은 말 그대로 스프링클러처럼 가이딩을 마구 흩뿌리는 행위였다.
즉,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닿는 범위 내에 있는 사람이 몇 명이든 전원 물을 맞듯이, 가이드가 방사하는 범위 내에 에스퍼가 있으면 모두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 법칙을 무시하고 혼자 독식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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