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깨진 독 4
최근 며칠간 내내 울기만 했던 한지수는 지금 아무렇지 않았다.
가슴이 너무 아파 차라리 이 심장을 뜯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들지 않았고, 강재윤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지도 않았다.
거대한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렸고, 소소하지만 긍정적인 생각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주로 토토나 주변 사람들과 앞으로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 올랐는데, 마치 숲속에 앉아 새소리를 듣는 것처럼 평온한 느낌이었다.
무엇이든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그런 긍정적인 기분이 뇌를 지배했다.
슬픔의 한계에 다다른 이들이 이런 정신 세뇌를 마치 마약처럼 원한다고 하던데, 애석하게도 한지수의 경우엔 이 평온함이 끔찍하게 싫었다.
* * *
“당분간 자가 조절이 힘드실 겁니다. 가이딩을 차단할 수 있는 약은 우선 2주 정도 드실 수 있게 처방해 드릴 건데, 중간에 자체적으로 조절이 가능하다면 언제든 투약 중단하셔도 됩니다.”
“네.”
“그리고 스킬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신 부분은 당장 어려울 것 같군요. 불편하시겠지만, 이대로 유지합시다.”
“…….”
퇴원 절차를 마친 지수는, 마지막 진료를 가장한 면담에서 보호자를 자처한 김현아와 함께 최성훈 교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최성훈 교수는 제게 돌아오는 환자의 대답이 없음에도 평온한 모습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처방전을 전송했다. 그리곤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한지수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스킬을 거두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깁니다.”
“…….”
“제가 환자분에게 사용한 스킬은 영구적인 게 아닙니다. 매일매일 세뇌가 조금씩 옅어지는데, 이 세뇌는 보통 열흘에서 보름 안에는 사라집니다.”
“……답답해요.”
“예. 그럴 겁니다.”
“제가 생각하고 싶은데, 생각하지 못하는 거…… 기분도 안 좋아요.”
“압니다. 하지만 뇌가 열을 식힐 시간도 필요합니다. 한지수 환자분은 지금 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고요.”
“…….”
타인 앞에서 습관처럼 늘 웃는 모습만 보이던 지수가 드물게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모습을 본 김현아는 묵묵히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맞은편의 최성훈 교수는 다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겹게 들으셨겠지만, 가이드로 각성한 분들의 뇌 과부하는 두 가지 의미의 과열이 존재합니다. 인간이 뇌를 비정상적으로 많이 사용해 발생하는 진짜 열로 인한 과열, 그리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발생한 과부하로 인한 과열. 그리고 지금 환자분은 그 두 가지 과열을 동시에 겪고 계시는 거고요.”
“…….”
“쉽게 설명하자면 지금 환자분의 상태는 몇 시간 동안 신나게 흔들어 댄 탄산음료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밀봉된 뚜껑을 열면, 다 터져 나오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
“겉보기엔 멀쩡해 보일 겁니다. 아직 뚜껑을 열어 보지 않았으니까요. 아무 대비 없이 뚜껑을 연 순간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서서히 가라앉을 수 있도록 조치한 겁니다.”
“…….”
“최대 보름까지만 머리를 식히며 견디면 됩니다. 한지수 가이드. 나중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보름 동안 이렇게 세뇌당한 상태로 살아야 하나요?”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라고 자부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 가면 한결 나아진 컨디션으로 실컷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울고, 웃고 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쉰다고 생각하세요.”
한마디로 아직 밝혀진 바는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는 가이드 폭주를 겪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말을 따르라는 의미였다. 조금이라도 고집부리려던 한지수는 더 토 달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바닥에서 최성훈 교수는 원래 앞뒤 꽉 막혔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집은 전부 자신의 환자를 위해서이고, 덕분에 그만큼 인망 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저가 반항해 봤자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한지수가 납득했다고 판단했는지, 그가 설명을 이었다.
“약도 처방해 드릴 건데, 복용하면 많이 졸릴 겁니다. 그러니 아예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드세요.”
“……네.”
“그럼 2주 후에 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2주 후에 한지수 가이드와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김현아가 축 늘어진 한지수를 토닥이며 일으켰다.
진료실을 나서기 전, 한지수는 변신 아이템을 사용해 다시 여성의 모습으로 변하고, 토토는 오목눈이 새로 변해 얌전히 지수의 주머니 속에 앉았다.
김현아 역시 아이템을 사용해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으로 한지수를 데리고 다녔는데, 여기저기서 “각성자 같지?” 또는 “변신 아이템 썼나 봐. 누굴까?” 등등 소곤거리곤 했다.
주변 잡음을 완벽하게 무시한 김현아는 대학 병원 내 각성자 전문 약국에서 한지수의 약을 대신 처방받았다.
“약은 주무시기 직전에 드시고, 잘 드셨는지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을 페어로 두는 게 좋습니다. 가끔 약을 거부하거나 버리는 환자분들도 많거든요. 제대로 약을 삼켰는지 꼭 확인하셔야 합니다. 약을 거르면 문제가 커지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약사는 똑같은 주의 사항을 두 번씩 설명했고, 김현아는 이미 아는 내용이라도 모두 성실하게 들었다. 약을 처방받은 후에는 약국 바로 앞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한지수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새카맣게 선팅된 SUV 조수석에 한지수를 밀어 넣고, 운전석에 올라탄 김현아가 시동을 건 채 곧장 출발하지 않고 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집에서 따로 챙겨 올 거 있어?”
“……아니.”
“그럼 이대로 길드로 간다?”
“응.”
“삐-!”
내내 얌전히 있던 토토가 지수의 주머니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함께 대답했다. 김현아는 삐죽 나온 토토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후 핸들을 잡았다.
졸지에 전 세계에 단 다섯 명, 그중 대한민국에 둘 있는 SS급 에스퍼를 개인 기사로 부리게 된 한지수는 차창에 비친 제 얼굴과 김현아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으며 물었다.
“누나 남자 취향은 소나무면서, 본인 얼굴은 왜 그렇게 했어?”
“내 얼굴이 어때서.”
“누나 취향은 여리여리하고 의지 안 되는 남자 아니었어?”
“내가 옆에 끼고 귀여워해 주고 싶은 취향이랑, 내가 되고 싶은 취향은 전혀 다른 거란다.”
능청스러운 대답을 들은 지수가 작게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한지수가 러비스로 아이돌 활동을 하던 당시, 그러니까 지구가 대격변을 겪기 전에도 김현아는 유명 인사였다.
평화 그룹의 유일한 적자이자 재벌 3세여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녀의 외모나 가정사 때문에 유명한 부분이 더 컸다. 굳이 재계나 가정사 이야기가 아닌 측면으로 보자면, 아이돌 보이 그룹 러비스 한지수의 팬으로 유명했다.
당시에 일명 ‘김현아의 소나무’라고 불렸던 이들은 대부분 ‘댕댕이상’이라고 불리는, 눈꼬리가 살짝 처진 인상의 미소년들이었다. 모아 놓고 보면 제각각 키는 들쑥날쑥했지만, 전체적으로 마르고, 타 멤버에 비해 늘 체력이 달리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길 좋아하는, 즉 어딘가 하찮아 보이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얼굴만큼은 확신의 비주얼 멤버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조용히 좋아했던 아이돌이 각자 여러 논란으로 줄줄이 터지며, 김현아의 소나무에서 가지치기 당했다는 것이다. 종국엔 한지수만 살아남았기에 1짓 팬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한지수는 김현아가 변신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당연히 그동안 좋아했던 순둥한 강아지 같은 이미지의 미소년으로 변할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아무리 저라도 눈을 마주치고 있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흡사 혼자 적진을 뚫으러 가는 특수 부대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건장한 데다가, 그 와중에 미는 포기하지 못했는지, 굉장히 서구적인 미남이었다. 마치 할리우드 첩보 액션 영화의 주인공 같은 그런 얼굴이랄까.
“뭐, 엄밀히 말하면 이게 나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은 아닌데. 적당히 커스텀하면 어중간한 놈들이 꼭 낮잡아 보고 괜히 덤빈단 말이지. 불필요한 살생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어.”
“……누나가 말하면 농담 같지 않으니까, 살생이라는 말 그렇게 쉽게 하지 마…….”
“아하핫.”
한지수는 익히 아는 김현아의 취향 갭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재윤이 형은 몸이 너무 좋아서 누나의 소나무에 앉지 못했다는 농담을 던지려던 지수는 일순 확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느꼈다.
저 말을 꼭 하고 싶은데, 어째 다른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저와 달리 그 형이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운동했는지, 얼마나 과하지 않고 예쁜 몸 만들기에 집중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은데 혀가 굳은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이거 진짜…… 기분 더러워.’
강제적으로 생각을 차단당하는 건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대충 열흘 정도는 꼼짝없이 이런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이렇게 속이 답답하고 불쾌한데도 정신계 스킬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니……. 누군가의 기억을 송두리째 지우는 세뇌 스킬을 원하는 이들은 이 감각을 겪어 보고도 여전히 바라게 될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게 너무 아파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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