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것 4
거의 2분에 한 번씩 마나 보충 물약을 마셔 가며 5분 정도 이동하자, 저 멀리 던전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헉……!”
“삐이……!”
던전에서 파생되는 빛이 머금은 색을 확인한 지수와 토토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분명 아까 뉴스에서 봤을 때 연두색으로 빛나던 던전은 지금 피처럼 붉은빛과 새카만 검은 빛으로 물들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전에도 S급 등급 던전이 붉은빛을 내뿜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검은빛까지 띤 던전은 처음이었다. 이제 막 태어나 던전이 뭔지도 모르는 아기가 봐도 불길한 모양새임이 분명했다.
지수가 이를 꽉 깨물자, 시야에 반투명한 유리창 같은 네모 칸이 생기며 글자가 나타났다.
[MP가 부족하여 비행 스킬이 취소될 예정입니다. MP를 보충하세요. 잔여 MP: 17]
하찮은 마나 통이 또 마나 고갈을 외치기 시작했다. 다시 마나 포션 병 하나를 따 입에 털어 넣자, 메시지 끝 부분 표기가 [잔여 MP:180] 으로 바뀌었다.
최대 마력까지 충전했지만, 거의 1초당 1-2씩 소모되는 탓에 다음에 섭취할 물약을 미리 꺼내 손에 쥐고 변신을 해제했다.
그러자 겉모습이 원래 한지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토토 역시 오목눈이 새가 아닌 골든 햄스터가 되었다.
“쮜잇…….”
앞발로 주머니 끝부분을 잡고 일어선 토토는 저 멀리 이글거리는 게이트를 발견하곤 불안한 듯 몸을 웅크렸다.
그동안 수많은 던전에 진입했지만, 토토가 이렇게까지 위축된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한지수 역시 몸이 과도하게 긴장해 심장이 터질 듯이 거칠게 박동했다. 꿀꺽 침을 삼키자 목울대 부근이 욱신거리고 두통이 일었다.
몸 곳곳에 피어나는 비정상적인 감각과 통증들을 애써 무시하며 날아가 던전 게이트 주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각성자 협회 관계자들이 진입을 막아선 상태였다.
지수는 고도를 낮춰 땅으로 점점 내려가며 게이트 주변을 살폈다. 게이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힐러들과 의료진에게 치료받는 공략팀이 보였다.
“……!! 하아아…… 개방형이었구나, 다행이다…….”
“쮜이…….”
던전의 출입 방식은 크게 개방형과 폐쇄형 두 가지로 나뉘었다. 개방형은 말 그대로 공략팀이 진입한 후 던전 보스를 클리어하지 못했어도 추가 진입이 가능하고, 기존 공략팀이 던전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던전을 뜻했다.
반대로 폐쇄형은 진입하면 일정 시간 후 게이트가 봉쇄되는 던전이었다. 보스를 클리어 또는 진입한 공략팀 전원이 값비싼 귀환석을 사용해 밖으로 탈출하거나, 안에서 전멸하는 게 아닌 이상 아무도 드나들 수 없었다.
개방형 던전의 경우 공략에 실패해도 던전 내부 유지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해당 시간 내에 재정비하여 진입해 재공략하면 될 문제였다.
물론 저 이글거리는 짙은 검붉은 핏빛이 무슨 등급인지 몰랐기에 영 불안했지만, 일단 던전 자체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둔 지수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강재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토토야, 재윤이 형 보여?”
“쮸우우…….”
토토가 작게 도리질하며 기민하게 아래쪽을 살폈다. 지수는 주변을 크게 둘러본 후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태연하게 말했다.
“재윤이 형이 리더라, 아마 다른 길드 리더들이랑 같이 재진입 준비하고 있을 거야. 내려가서 물어보자.”
“쮸!”
땅에 내려선 한지수는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공략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현장 인원 모두 각자 할 일이 바빠 정신없기도 했지만, 한지수 자체가 워낙 얼굴이 잘 알려진 덕분에 막는 이도 없었다.
지수는 평화 길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뛰다시피 다가갔다.
“진보라 에스퍼!”
“한지수 가이드……!”
가뜩이나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던 진보라가 한지수를 발견하곤 눈에 띄게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곁에 어깨에 상처를 입은 박민아 가이드와 그녀를 치료하는 이수빈 힐러가 보였다.
“다들 괜찮은 건가요? 박민아 가이드! 많이 다쳤어요?”
“……아뇨, 저흰 보시다시피……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대답한 박민아의 방어구는 전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어깨도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자력으로 앉아 팔을 내밀고 치료받는 모습을 보니, 치명적인 부상은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라 여길 만한 상황이었지만, 마음 놓고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근처에 있던 각성자 협회 소속 지석민 에스퍼와 성준 힐러가 큰 부상을 입은 듯 의식이 없는 상태로 들것에 실려 파견 나온 힐러들과 함께 구급 헬기에 오르는 중이었으니까.
“……박호연 에스퍼도 부상이 심각하군요…….”
하늘에서 봤을 땐 평화 길드원 위주로 찾아봐서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땅에 내려와 가까이에서 보니 평화 길드가 상대적으로 덜한 거였고, 다들 부상의 정도가 생각보다 심했다.
특히 플레임 길드 소속 박호연 에스퍼는 왼쪽 팔이 깔끔하게 잘려 나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팔을 잡아 고정한 채 힐러에게 치료받는 중이었다. 박호연이 치료받는 모습에서 시선을 뗀 지수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재윤이 형, 아니. 강재윤 에스퍼는 어디에 있어요?”
“…….”
질문을 받은 진보라는 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반응에 괜히 더 초조함을 느낀 지수는 애써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를 비롯해 곁에 있던 박민아와 이수빈 역시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길드원들의 반응을 본 지수는 이 짓궂은 사람들이 또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다른 인원은 다 나왔는데, 강재윤만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강재윤이 공략팀 리더다 보니, 이곳 어딘가에서 급하게 뒷수습을 지시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확신한 지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재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형은 재진입 공략팀 꾸리러 간 거죠?”
지수는 지금 자신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모르고 일부러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완벽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그의 얼굴을 본 세 사람은 모두 입을 꽉 다물 뿐이었다.
아무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지수의 안면 근육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애써 웃으려 해도 제대로 된 표정이 지어지지 않았다. 정수리부터 싸한 기운이 퍼지며 전신에 힘이 쭉 빠질 것 같아 억지로 힘을 주고 버텨 서야 했다.
“……왜…… 왜들 그래요, 또 저번처럼 장난치는 거죠? 이제 이런 장난 안 하기로 했잖아요…….”
재차 묻자, 결국 진보라가 입을 열었다.
“……한지수 가이드……, 곧 김현아 에스퍼랑 정하진 에스퍼가 올 거예요…….”
“…….”
“도착하면 바로 재진입해 합류 예정이니, 한지수 가이드는 일단 다른 가이드들과 함께 대피하세요.”
“…….”
김현아 에스퍼. 정하진 에스퍼. 한국에 단둘뿐인 SS급 에스퍼였다.
그런 두 사람이 온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한지수의 시선이 검붉게 이글거리는 게이트로 향했다.
사이렌은 여전히 메아리치고, 바닷바람은 거칠었다.
손이 후들거려 주먹을 꽉 틀어쥔 지수가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나온 게…… 아니에요? 몇 명이나 못 나왔죠?”
지금 저 변종 던전 안에 대체 몇 명이 갇혀 있는 거냐는 물음에 이번엔 치료를 마친 이수빈 힐러가 대답했다.
“강재윤 에스퍼 한 명이요.”
“……!!”
“한지수 가이드!”
“쮜잇!!!”
일순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지만, 진보라 에스퍼가 빠르게 지수를 부축했다. 지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제 허리를 굳건하게 잡은 진보라의 팔을 짚으며 물었다.
“그럼 지금…… 재윤이 형만 혼자…… 저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간단한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진보라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에 지수가 재차 다급히 물었다.
“왜요? 다 나왔는데, 왜 형만 안 나온 거예요?”
지수는 이러다 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슴을 꾹 누르며 불안정한 호흡을 다스리려 애썼다.
잠시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달싹이던 진보라는 A급 에스퍼답게 지수의 불안정한 심박을 듣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 공략 도중 갑자기 등급 이상이 발생해 바로 퇴장했습니다.”
“…….”
“그리고…… 강재윤 에스퍼는 꼭 확인할 것이 있다며, 공략팀 먼저 나가 지원을 요청하라고 팀 리더로서 명령을 내렸습니다. 저희도 이유는 모르지만, 중요한 일이라며 자진해서 남은 겁니다.”
“……중요한 일? 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했기에…….”
던전에선 공략팀 리더의 명령이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퇴장하라 명령한 강재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만 나온 상황은 이해했지만, 그가 이상 등급 던전에 혼자 남은 이유는 도저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왜?
어째서?
대체 뭘 알아야 했기에?
이 의문의 답을 가진 이가 저 안에 있으니, 지수의 머릿속엔 물음표만 불어났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머리가 하나도 돌아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점점 허옇게 질려 가는 지수를 본 진보라가 침착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게이트 주변 몬스터는 전부 처리했고, 20분 이내로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만약 해당 시간 내에 나오지 않는다면 김현아 에스퍼와 정하진 에스퍼가 바로 진입할 겁니다. 그러니까 한지수 가이드는 박민아 가이드와 다음 헬기 타고 대피하세요.”
단호하게 대피를 권고하는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각성자 중 가이드와 일반 의료진들이 각자 할 수 있는 한의 조치를 마치고 급히 대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보통 대기팀 가이드들은 던전 밖에서 상주하며 클리어될 때까지 교대로 대기하지, 저렇게 급하게 철수하지 않았다.
던전에 재진입할 에스퍼들을 최대한 케어하고, 던전에 진입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물러나는 게 관례였다.
즉, 지금 상황은 저 핏물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검붉은 게이트처럼, 일반적인 상황이 절대 아니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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