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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6화 (6/172)

#005.

대격변 5

마치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듯이 굴던 그는 지수의 시선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냐…….”

참 뻔뻔한 반응에 지수는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열정적인 강사의 빠른 진행 덕분에, 다음 파트인 차별적인 발언으로 발생한 실제 사건으로 넘어갔다.

이때 가이드에게 폭언한 에스퍼가 벌금형을 받은 사례가 나왔고, 교육을 듣던 에스퍼 중 몇몇이 또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도 강재윤이 친히 자세를 교정해 준 터라 그런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폭언 사례가 금방 끝나고, 역시 실제로 빈번히 일어나는 ‘가이딩 강제 착취로 인한 폭력 사건 및 형사 처분’ 사례로 넘어갔다.

에스퍼가 가이딩에 갈증을 느껴, 가이드를 물리적인 힘으로 제압하고 강제로 가이딩하도록 협박하거나 폭행하는 행위가 이에 포함됐다.

수많은 사례를 언급한 강사가 “여러분,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묻자, 만장일치로 안 된다는 대답이 들렸다.

“이론은 다들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어젠 대체 왜들 그러셨을까?”

냉기 뚝뚝 흐르는 강재윤의 작은 중얼거림에 청력 좋은 에스퍼들의 어깨가 확 굳었다.

그 꼴을 맨 뒷줄에서 감상한 지수는 평소라면 웃고 말았겠지만, 오늘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구가 대격변을 함과 동시에 인류가 진화하고, 던전이 생기고, 괴물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이 슈퍼 히어로처럼 싸우는 세상이 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사는 건 여전히 똑같았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말이다.

* * *

한지수는 평화 길드 로비 카페에 앉아 벌써 두 잔째 아이스티를 마시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페널티 강의가 끝나자마자 멋대로 스케줄을 삭제한 강재윤을 직접 픽업하러 온 에스퍼팀 관리부장을 떠올린 순간 또 골이 지끈거렸기 때문이었다.

카페에 앉아 기다린 지 벌써 1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회의를 항상 최소화하는 평화 길드에서 이 정도 시간이 걸리는 회의라면, 애초에 그냥 빠질 수 있는 스케일은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하아…….”

물론 스케줄이 없다는 말을 100% 믿은 건 아니었다.

그동안 강재윤이 멋대로 스케줄을 취소한 경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짚고 넘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적정선을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엔 자신이 빠져도 상관없는 스케줄만 캔슬했지, 오늘처럼 꼭 참석해야 하는 보안 등급 1레벨 회의를 무단으로 빠지려 든 적은 없었기에 솔직히 지수도 꽤 신경 쓰였다.

‘이번엔 꼭 강하게 말해야지.’

옛날부터 그랬지만, 한지수는 저는 몰라도 강재윤의 평판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싫었다. 특히 그 원인이 자신이라면 더욱더. 아무리 S급 에스퍼들이 제멋대로 구는 성향이 있다고 해도, 이대로 가다간 분명 추후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오늘은 제대로 말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손을 톡톡 두드리는 감각에 내려다보니 가방에서 기어 나온 반려 몬스터 토토가 보였다.

“토토야, 일어났어? 잘 잤어?”

“쮜이…….”

한지수는 푹 자고 일어나 퉁퉁 부은 얼굴로 앞발 세수를 시작한 토토를 보며 사진을 찍었다. 토토 사진 업로드 전용 SNS에 햄스터도 얼굴이 이렇게 붓는다는 멘트를 곁들여 올릴 생각을 하니 벌써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세수를 마친 토토가 앞발로 한지수의 손가락을 잡고 뒷발로 섰다. 그리곤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어느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했다. 토토의 시선을 따라 고개 돌린 지수는 제 가방 속의 간식 파우치를 발견하곤 작은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토토야, 간식 줘?”

“쮜!”

쿡쿡 웃은 지수가 던전산 견과류 파우치의 포장을 뜯어 토토에게 내민 순간, 30알 정도 되는 열매가 순식간에 토토의 볼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이는 볼 주머니에 인벤토리를 가진 몬스터이기에 가능한 거였지만, 은근히 곁눈질하던 주변인들은 모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언제나 그러하듯 은근한 시선을 모른 척한 지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만지며 무심한 얼굴로 뉴스를 훑다가 다른 기사보다 훨씬 큰 폰트의 머리기사를 보고 멈칫했다.

<평양 중심에 발생한 S급 던전 무사히 클리어, 정하진 에스퍼 기여도 60% 이상>

국내 단둘인 SS급 에스퍼의 이름이 거론된 제목을 보자마자 기사를 누른 지수는 소름 끼칠 만큼 잘생긴 남자가 담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웃음기 하나 없이 무표정한 남자가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에 계단을 밟으며 오르고 있었다. 사진의 하단부터 시작되는 기사 내용엔 예정보다 며칠 일찍 공략이 끝났고, 사망자나 부상자가 없다는 소식이 가장 먼저 나왔다.

이어 이번 협조로 인해 북한 측에서 정하진에게 아이템을 선물로 주려 했지만, 그가 거절했다는 미담 정도가 적혀 있었다.

기사를 내리다 보니 또 다른 사진이 있었는데, 북한의 각성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정하진의 모습이었다. 착장으로 미루어 볼 때 던전 입장 직전 브리핑 도중 찍힌 사진 같았다.

사진 속 정하진과 북한의 공략팀은 서로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에스퍼끼리의 기 싸움이 아니라, 진영 자체를 그렇게 짠 것처럼 보였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우린 여전히 분단국가구나.’

지구에 재앙이 닥친 와중에도 휴전 국가라는 사실에 어이없어 피식 웃은 순간, 기척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지수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뭘 보고 그리 웃나 했더니.”

“……!!”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거의 집어 던지다시피 놓친 지수는, 제 휴대폰이 허공에 그대로 멈춘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염력으로 휴대폰을 공중에서 낚아채 천천히 테이블 위로 내려 둔 강재윤은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기사 화면을 휙 날려 버리더니 친절하게 액정까지 꺼 주며 말했다.

“예전부터 그렇게 배우상만 좋아하더니……. 그런데, 지수야. 형이 늘 말했지만, 무뚝뚝한 사람보단 다정한 사람이 최고다.”

“……아, 뭐래. 그냥 본 거야.”

“하하, 알았어. 그렇다고 믿을게. 올라가자. 이륙 준비 끝났어.”

“그렇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민망함에 괜히 툴툴댄 지수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났다.

강재윤은 이번에도 염력으로 트레이와 음료 컵을 반납대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곤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지수의 코트까지 손수 입혀 준 후, 어깨를 끌어안고 유유히 카페를 빠져나갔다.

* * *

‘헬기 타고 부산 가는 건 두 번째네…….’

옛 생각을 떠올리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지수는 창문에 비친 토토를 살폈다. 토토는 집사의 어깨에 앉아 똘망똘망한 눈으로 창밖을 구경하느라 여념 없었다.

토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멍하니 초점을 흐리려던 지수는 문득 창문에 비친 강재윤과 눈이 마주쳤다. 내내 지켜보고 있던 건지, 강재윤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옛날 생각난다.”

“…….”

저 역시 그때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여 긍정한 지수가 강재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떴다.

눈을 감으면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돌이켜 보면 생각보다 꽤 시간이 지난 기억이었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 강재윤과 한지수는 오늘처럼 늦은 오후에 헬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탑승한 인원이 훨씬 많았다.

지금도 제 곁을 지키고 있는 리더인 든든한 맏형 강재윤과 막내인 자신. 그리고 지수보다 두 살씩 많았던 세 명의 형들이 함께였던 공간은 프로펠러 소리와 높아진 목청으로 시끌벅적했었다.

1군 남자 아이돌 그룹 ‘러비스’에서 ‘0n조’라고 불렸던 세 사람을 떠올린 지수는 창에서 시선을 떼고 강재윤을 향해 몸을 살짝 틀어 앉았다.

저를 향한 그의 다정한 눈빛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마치 다섯 멤버가 왁자지껄한 와중에, 헬기를 처음 타 바짝 긴장한 막내를 다독이던 그날의 눈빛과 똑같았다.

‘지금은 다른 걱정이겠지만.’

지수는 여전히 강재윤과 눈을 맞추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수는 강재윤이 친형과 동생의 이야기, 그리고 저 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면 늘 적당히 대답하고 더 대꾸하지 않았다.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걸 그렇게 침묵으로 대신하곤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랑하고 아꼈던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그 셋이 너무 보고 싶어졌는데, 이제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입으로 소리 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 더 보고 싶어지고, 함께 나눴던 추억을 듣고 있노라면 대격변 전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서 남몰래 혼자 울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응.”

“……그때…… 희원이 형이 나한테 청포도 맛 사탕 줬었어……. 창밖에 보기 무서우면 사탕 물고 눈 감고 있으라고…….”

“…….”

“사실 무서운 건 아니고 그냥 멀미가 나서 그랬던 건데.”

“하하.”

프로펠러 소리가 시끄러워 거의 고함치듯 대화했던 그날과 달리 나지막한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지만, S급 에스퍼인 강재윤은 전부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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