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대격변 4
이번에 초빙한 강사는 굉장히 쾌활한 사람이었는데, 밝은 목소리로 중간중간 개그를 섞어 가며 강의를 진행한 덕분에 다행히 앞 시간처럼 졸리진 않았다.
강의 내용도 각성자라면…… 아니,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이다 보니 어렵지 않았는데, 대충 이런 흐름이었다.
“여러분! 그럼 만약 가이드가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개인 사정으로 인해 가이딩을 거절한 상황이라고 가정해 볼까요? 자! 보기를 보여 드릴게요~!”
강의 특성상 에스퍼들이 노골적으로 불쾌해하거나, 성질머리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거의 유치원생을 우쭈쭈 어르고 달래는 수준의 진행이었다.
“여기 1번 보기부터 볼까요?”
강사의 말에 맞춰 PPT 화면이 넘어가며 <1번. 조금만 더 가이딩을 해 달라고 정중한 말로 부탁한다.> 보기가 팝업됐다.
“자, 난 이걸 봤을 때, 가이딩 강요가 아닌 것 같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본다! OX 중 O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손!”
강사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몇몇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지수의 대각선 앞에 앉은 에스퍼 역시 천천히 손을 들었다. 바로 어제 던전에서 지수에게 그나마 정중하게 가이딩을 강요했던 에스퍼였다.
사실 말만 정중했지, 수치도 그다지 높지 않으면서 손 잡기 이상의 스킨십을 권유하던 눈빛이 너무 더러워 지금 생각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강사의 질문에 지수는 손을 들지 않았고, 강재윤 역시 손을 들지 않았다. 강사가 강의실을 한 바퀴 쭉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보다 밝은 음성으로 PPT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좋아요, 자, 그럼 정답은? 정답은! X입니다.”
가이드 중에선 손을 든 이가 없었고, O에 손을 든 에스퍼들만 괜히 머쓱해했다. 일부 에스퍼는 다소 반항적으로 목을 우두둑 꺾거나 어깨를 쭉 펴며 일부러 고개를 갸웃하는 몸짓으로 대체 왜??? 라는 질문을 대신했다.
강사는 가이드 보호법에 따르면, 가이드의 컨디션이나 생리적 사정으로 인한 가이딩 거부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손 잡기 이상의 불필요한 신체 접촉 요구 역시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다소 불만스러운 중얼거림이 들렸는데, 대부분 “손 잡기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요청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같은 불만이거나, “주변에 다른 가이드가 없으면 어쩌라는 건데. 에스퍼는 뭐 그럼 폭주해 뒤지라는 건가?” 또는 “제대로 가이딩도 하지 않고 뻑하면 피곤하다고 거부하면서 기본급은 잘만 받아 가는 가이드도 수두룩한데, 그런 사람이나 단속하지, 무슨…….” 이런 불평이 대부분이었다.
잠시 교육생들 사이 잡음이 올라왔다 가라앉도록 충분히 기다린 강사는 능숙하게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다며 차근차근 말했다.
애초에 가이딩이라는 행위 자체가 가이드의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그 가이드의 상태가 어떤지 다른 사람이 겉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강사의 설명이 끝나자 심기 불편해 보이던 에스퍼들이 피식 웃으며 퍽이나 그렇겠다는 듯이 반응했다.
강사는 이 내용으로 강의를 하면 어디서든 같은 반응을 봤기 때문인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더 강한 어조로 그렇기 때문에 담당 가이드가 가이딩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길드에서 항상 에스퍼의 수치를 관리하고 있는 거죠? 또 폭주 수치가 아슬아슬할 경우, 해당 에스퍼는 던전에 들여보내지 않는 에스퍼 보호 제도가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거랍니다.”
사실상 위험할 정도 수치라면 해당 에스퍼는 던전 공략팀에서 제외되는 게 모든 길드의 방침이었다.
특히 평화 길드는 각성자 복지가 좋은 길드였기에, 에스퍼의 컨디션이 악화될 경우 던전 진입 직전에 상시 대기조 멤버와 교체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렇듯 에스퍼를 위한 제도가 분명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교육실 내의 에스퍼들은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 불편한 기운을 감지한 강사는 비각성자임에도 프로답게 전혀 위축되지 않은 얼굴로 멘트를 이어 나갔다.
“길드 차원에서도 이런 부분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언제든 대신 가이딩을 할 수 있도록 등급 관계없이 가이드를 많이 채용하는 거겠죠? 그리고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가이드는 에스퍼처럼 폭주 수치를 확인할 수 없지만, 가이드 역시 신체의 한계가 온다는 겁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고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건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게 아니지 않냐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몇몇 에스퍼의 불만 섞인 잡음이 충분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확실한 연구 결과가 나오거나, 의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굉장히 많은 가이드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은 것은 다들 아실 거예요.”
이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에스퍼들의 불편한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은 듯이 보였다. 강사는 에스퍼들의 이런 반응을 밥 먹듯 겪어 본 듯이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과거엔 이런 증상을 단순히 우울증으로 치부했지만, 현재는 가이드의 폭주 증상인 것으로 기정사실 되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애쓰고 있답니다. 가이드의 폭주가 수치로 확인될 때까지, 가이드 사망 사고율을 최소화고자 만든 것이 바로 저 가이드 보호법이고요.”
대충 흘려들으려던 지수는 어느 순간부터 집중하며 강의를 들었다. 덕분에 재윤에게 가이딩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맞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꾹 주고 있었다.
『가이드의 폭주』
아직 에스퍼의 폭주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치화가 되어 존재가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가이드들은 자신의 힘을 한계치로 쓴 상태에서 쉬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가이딩하거나 또는 에스퍼에게 강제로 가이딩을 착취당할 경우 정신적인 부작용을 겪었다.
가장 흔한 증상은 주로 몇 시간의 기억, 또는 하루 이틀 정도 짧은 기억을 잃는 단기 기억 상실증이 있었고, 실어증을 겪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서 더 심해지거나 좋지 못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가이딩을 하게 될 경우, 몇 년의 기억 또는 모든 기억을 상실하거나, 극심한 무기력증과 우울증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종국엔 스스로 삶을 끊어 내는 일도 빈번했다.
대격변 이후 5년이 지난 현재까지 정신적으로 문제를 앓는 가이드에 대한 뉴스가 자주 나온 덕에 누구나 인지하는 부분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현상에 대한 연구는 이상하리만큼 소극적이었다.
언제나 다양한 연구를 하고 지원을 많이 받는 에스퍼와 달리, 가이드의 연구는 늘 뒷전으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현아 누나가 그랬지. 이유는 모르지만, 탈모나 발기 부전에 대한 연구는 활발한데, 생리통 원인은 제대로 연구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원인 불명인 것과 똑같은 것 같다고.’
지금 이 강의실만 봐도 가이드들은 모두 가이드의 폭주를 인지하고 있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강사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에스퍼들은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가이드 보호법 자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폭주의 증거를 확인할 수 없는데 진짜로 피곤한 건지 엄살인지 어떻게 구분하냐는 둥, 웅성거렸다. 이 모든 것이 다 가이드의 꿀 빨기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내뱉는 이도 있었다.
끝내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에스퍼가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을 때였다. 가이드 중 누군가가 “그럼 가이드 없이 살다 그대로 뒤지시든가.”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바람에 공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강사가 재빨리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전에 울컥한 남성 에스퍼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벌린 순간,
“큽!”
우려한 것처럼 안 좋은 말을 뱉는 대신 외마디 침음을 뱉더니, 갑자기 허리를 곧게 펴고 얌전하게 앉았다.
부들부들 떨며 바른 자세로 앉은 에스퍼를 본 몇몇이 무의식중에 한지수를, 아니. 한지수 옆의 강재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들 모두 강재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염력’을 사용해 그의 몸을 결박하듯 찍어 누른 덕분에 소란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곤 조용히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각성자인 강사는 갑자기 얌전해진 에스퍼를 보고 내심 놀랐지만, 노련하게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며 PPT 화면을 넘겼다.
“자, 그럼 이제 2번을 볼까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밝은 음성과 함께 화면에 두 번째 문항이 팝업됐다. 강의실 곳곳에서 문구를 읽은 몇몇 가이드들이 작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 역시 콧방귀를 뀌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두 번째로 나온 예시 문항은 바로 어제 가이드들이 들은 폭언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2번. 길드 가입 시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에스퍼가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가이드는 가이딩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계약 사항을 상기시키며 요구한다.>
“여기 2번도 O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
이번엔 1번보다 현저히 적은 인원이 손을 들었다. 이를 본 가이드들이 저마다 피식피식 웃었다.
어제 분명히 가이드들에게 딱 저런 식으로 큰소리치던 놈들이,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살 운운하던 인간들이 지금은 왜 여기 처앉아서 손을 들지 않고 있냐는 의미의 조소였다. 지수 역시 어처구니가 없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대각선으로 세 줄 앞에 앉은 학습력 없는 에스퍼가 눈에 힘을 주고 돌아봤다가, 흠칫! 몸을 굳히곤 황급히 앞을 향해 똑바로 앉았다.
노골적으로 기겁하는 모습을 본 지수는 반사적으로 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재윤이 냉기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눈으로 에스퍼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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