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3화 (3/172)

#002.

대격변 2

사람들은 종의 격변을 겪은 이들을 제멋대로 불렀다. 어느 지역에선 초능력자. 이능력자라고 불렀고, 또 어떤 지역에선 초인, 헌터, 슈퍼 히어로, 특수 능력자라고 불렀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인 혼란한 세상이었지만, 와중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악착같이 버텨 능력을 각성한 이들을 모았다. 그리고 종의 격변을 겪은 이들을 <각성자>로 칭했다.

그리고 각성자 중에서도 자신의 힘으로 물리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살상 능력을 갖게 된 이들을 <에스퍼>, 치유 능력을 가진 이들을 <힐러>라고 구분해 정의했다.

이후 거의 반년 동안 에스퍼와 힐러는 각국…… 아니, 인류의 희망이자 빛, 인류 진화의 정점으로 추앙받았다.

그들이 힘을 과도하게 사용했을 때, 몸과 정신에 과부하가 생기고 종국엔 폭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진 말이다.

게다가 에스퍼의 폭주는 일정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폭주 시 증상도 각기 달랐는데, 힘을 제어할 수 없어 이성을 잃기 전에 자결하는 에스퍼가 있는가 하면, 손쓸 새도 없이 폭주 모드로 돌입해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에스퍼도 있었다.

주로 후자가 많은 편이었고, 폭주가 발생할 경우 그 피해가 극심하여 각국의 지도자들은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그들의 폭주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진정시키는 능력을 가진 이가 미국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는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치료 명목으로 감금하다시피 연구 중이었던 시설의 의사였다.

최초로 폭주를 이겨 낸 에스퍼는 추후 인터뷰에서 ‘단지 그와 손을 잡았을 뿐인데, 안개가 자욱해 있는 줄도 몰랐던 길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나를 빛으로 인도해 주었다.’라고 언급하며 그가 없는 삶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발표 이후 각국은 많은 조사를 통해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퍼와 달리 신체적인 능력이나 특수 능력이 발현되지 않아 자신이 각성한 줄도 모르고 있던 평범한 이들. 하지만 길을 잃은 에스퍼의 손을 잡고 올바른 길을 보여 줄 힘을 가진 이들을 사람들은 <가이드>라 칭하게 되었다.

『……대격변으로부터 5년이 지난 현재는, 다양한 기술을 확보하여 각성자들을 등급별로 세세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각성자와 비각성자 모두가 안전한 세상을……』

‘아, 언제 끝나…….’

한지수는 어두컴컴한 교육장 앞 대형 스크린에서 나오는 지루한 영상을 보는 척하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이제 좀 끝날 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화면이 바뀌었다. 잠깐 기대하게 만든 영상에서는 곧 에스퍼와 힐러와 가이드는 모두 똑같이 소중한 존재이며, 우연한 계기로 각성해 힘을 갖긴 했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어 인류가 대격변에 적응하고,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건 모두가 힘을 합쳐서라는 내용과 함께 대통령에게 표창받는 각성자의 모습도 보였다.

웅장한 OST와 인자하게 미소 짓는 대통령의 모습, 아이를 안고 객석 첫 줄에 앉아 지금 저 위에서 상 받은 사람이 네 엄마라며 아이의 뺨에 키스하는 남편의 모습 등 퍽 감동적인 연출이었지만, 한지수는 감동보다 피곤함을 느꼈다.

눈꺼풀이 무거워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각성자 의무 교육’을 이수하지 못하면, 어제 일 때문에 받은 제 벌점을 상쇄할 수 없었으니까.

“끄응…….”

중간중간 일부러 자세를 바꿔 보고, 괜히 쓰지도 않는 펜을 굴려 보고,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 봐도 눈은 착실하게 감겼다.

‘차라리 눈을 찌르고 힐러에게 치료해 달라고 할까…….’

헛생각이 들 정도로 졸음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 옆자리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남자가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수야, 곧 휴식 시간이니까 조금만 참아.”

“으윽…… 이제 한계야.”

그러자 옆자리의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듣기 좋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오늘 제대로 안 들으면 부장님이랑 1:1 면담이다. 사유서도 써야 하고. 그건 싫지?”

“……어…….”

사유서는 그렇다 쳐도 부장님과 1:1 면담이라니, 그럴 바엔 차라리 몬스터 사체에서 마정석을 수집하는 페널티를 받는 게 나았다.

거대한 몬스터의 몸에서 흘러내린 내장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마정석을 끄집어내는 끔찍한 광경을 떠올린 지수가 몸을 부르르 떨자, 강재윤이 쿡쿡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조금만 참자.”

“……어어…….”

오늘 교육은 분기마다 받는 단순 의무 교육이 아니라 페널티 교육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절대 졸아선 안 됐다.

만약 딴짓하거나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이면, 앞에 서 있는 관리자에게 교육 이수증을 받지 못하게 될 터였다.

‘이런 교육 말고, 재윤이 형이 저 에스퍼들 입에서 진심 어린 반성이 나올 때까지 쥐어 패고 끝내면 좋겠다.’

누가 들으면 기함할 생각을 하며 눈을 꾹꾹 비빈 한지수가 제 옆에 앉은 강재윤을 흘긋 곁눈질했다. 영상을 시청 중이라 교육장 불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자체 발광하는 것처럼 보이는 화사한 은발에 맑은 회색 눈동자가 돋보였다.

저를 향한 시선을 느낀 강재윤은 한지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곤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어 웃으며 조금만 참으라고 재차 속삭이더니 다시 앞을 바라봤다.

분명 똑같이 지루한 교육을 듣는데도 그는 시종일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곧게 앉아 있었다. 한지수는 과연 B급 가이드인 자신과 달리 S급 에스퍼다운 자제력이라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각성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강재윤은 자신만큼이나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반듯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믿음직하게 보였다.

틈만 나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차를 타고 이동할 때조차 다리를 꼬고 앉아 발을 까딱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미동 없이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왜 이리 믿음직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강재윤의 경우 단순히 집중을 못 하고 산만한 한지수와 다르게 에너지가 넘쳐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지수는 이 차이를 굳이 상기하지 않았다.

그의 곧은 자세를 흘긋거리던 지수는 자신이 의자에 녹아내린 엿가락처럼 늘어지게 앉아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등을 쫙 폈다.

‘에스퍼도 척추 수술은 아프다고 했어. 척추 생각하자. 척추…….’

흐느적거리는 자세에서 파생된 지인 에스퍼의 척추 수술 썰부터 시작해 온갖 잡다한 생각을 하며 졸음과 싸우길 몇 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수면 지옥 같은 동영상이 끝나고, 어두웠던 강의실의 불이 켜지자 여기저기서 수마와 싸운 이들의 신음이 들렸다.

한지수 역시 기지개를 켜며 은근히 강의실 안을 둘러봤다. 어제 함께 C급 던전을 클리어했던 임시 공략팀 에스퍼들 대부분이 페널티 교육에 퍽 불만이 많은 듯, 오만상을 쓰고 앉아 구시렁거렸다.

‘뭘 잘했다고……. 다 너희 때문이잖아. 너네 때문에 나까지 이게 뭐야.’

[던전 안에선 모두가 귀한 전력이다. 나로 인해 동료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니 멱을 잡으려면 던전을 클리어하고 게이트를 나가서 잡아라.]

이는 지수가 속한 ‘평화’ 길드에서 던전 진입 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칙 중 하나였다.

간단히 말해 던전 안에선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싸우지 말고 나와서 싸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젠 그 간단한 수칙을 지키지 못해 에스퍼끼리 기 싸움을 했고, 기 싸움이 개싸움으로 번졌다.

그것도 보스 방을 공략하기 직전에 말이다. 물리 에스퍼끼리 주먹질도 오간 터라 윗선까지 보고가 올라갔고, 그 결과 단체로 페널티 교육을 받게 되었다.

‘……난 주먹질도 안 했는데!’

뭐, 솔직히 말하자면 제발 싸우지 말라고 말려도 도통 들어 먹질 않아서 아주 조금 얄밉게 입을 놀리긴 했다. 조금 과하게.

한지수는 그래도 자신의 입장에선 나름 신사적으로 대응했다고 여겼다. 어쨌든 말만 했지 행동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잔뜩 흥분한 에스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힘을 개방한 채 한지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었다.

물론 해당 에스퍼도 구제 불능 멍청이는 아니었기에 비각성자나 마찬가지인 가이드를 상대로 힘을 쓸 생각은 없었을 터였다.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면 대충 으름장 놓는 선에서 끝났겠지만, 문제는 이변이 생겼다는 거였다.

상대 에스퍼의 위협을 감지한 한지수의 S급 반려 몬스터가 튀어 나가 그 에스퍼를 쥐 잡듯이 패는 이변이…….

“…….”

작은 햄스터과 몬스터에게 두드려 맞던 에스퍼를 떠올린 지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제 반려 햄이지만, 어찌나 차지게 때리던지……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굉장한 매타작이었다.

보통 반려 몬스터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면 처분 대상이 되지만, 각성자 특별법을 면밀하게 따졌을 때 이날의 상황은 다행스럽게도 정당 방어에 속했다.

그래서 한지수는 던전을 나와 인사과로 불려 갔을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인사과에서도 애초에 제 반려몬이 나선 건 전부 주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행위였다고 열심히 어필했다.

절대로 우리 애가 폭력성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집사를 보호하기 위한 반려 몬스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뿐이었으며, 내 반려몬은 공격형 몬스터가 아닌 방어 특화 몬스터다…… 라며 제법 설득력 있는 논리로 항변도 했다. 그러나 두들겨 맞은 에스퍼가 B급인 게 문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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