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 발정열이었나? 지난 몇 년간 발정기를 제대로 보낸 적이 없어 발정열의 감각을 잊고 있었다. 내 몸이 그렇게 뜨거운가? 그냥, 졸려서. 자도, 자도, 졸리기만 해서. 1년을 교주 악선의 지하 감옥에서 보낸 뒤부터였다. 다친 몸은 회복 속도가 현저히 줄었고,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선생님’도 나와 백인부대 18명을 교환하겠다는 결정이 덜 부담스러우셨을 것이다. 선은 확실히 몸도 정신도 부서져 가고 있었다. 낡고, 허울뿐인 대장군보다 우성 알파 18명이 훨씬 더 쓸모도 있고 1구역에 더 큰 도움을 줄 터였다.
“…….”
마른침을 삼킨 선이 입을 벌렸다. 찢어진 데가 다 아물지 않았고, 부기가 덜 빠진 뺨도 당겨서 크게 벌리지는 못했다. 이윽고 뜨거운 소변 줄기가 선의 입술을 적시고 목구멍으로 쏟아졌다. 꿀꺽꿀꺽, 다 넘기지 못한 소변이 역류해 입술 밖으로 넘쳐흘렀다.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보다 밖으로 내뱉는 게 더 많을 지경이었다. 섭식의 용도인 입으로 타인이 배출한 소변을 마신다는 생리적 거부감 때문은 아니었다. 정말 몸살인지, 발정열인지, 그도 아니면 오랜만에 겪은 일방적 폭력의 후유증인지 목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입 안도, 혀도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별반 목구멍으로 넘기지도 못하고 옆으로 픽 쓰러지는 선을 내려다본 디가 군홧발로 왼쪽 허벅지를 밟았다. 한 달이 됐음에도 아물지 않은 허벅지 상처를 짓이기자 쓸만 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아흑-!”
마치 살아있다는 걸 티 내는 것처럼,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선의 허벅지에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 싸늘한 눈초리로 응시한 디가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내가 직접 찾아오는 건 이게 마지막일 줄 알아. 기어서라도 내려와. 울면서 빌던지 애걸하던지,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챙겨. 아파? 네가 아파할 권리가 어디 있어. 행여 이 집에서 요양 비슷한 거라도 할 생각이면 집어치워. 내가 이대로 네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줄 알아? 너는 아플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멋대로 괴로워할 수 없어. 내 말의 진의가 궁금하다면 시험해봐. 백인부대 열여덟 놈이 아니라 네 놈의 그 ‘선생님’ 목부터 베어올 테니까.”
“왜….”
문밖을 나서려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조각난 얼음처럼 일그러진 디의 얼굴이 서서히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바닥에 엎어져 남의 오줌 냄새나 풀풀 풍기는 선을 돌아봐 주는 수고까진 기꺼이 감수한 디가 시선을 내렸다. 버러지처럼 엎어진 선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강인하지도, 청결하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내돌려지다 무참히 버려진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그것까지 내가 떠먹여줘야 하나?”
“…….”
“네가 직접 알아내는 성의 정도는 보여야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무거운 눈을 내리감은 디가 온전치 못한 숨을 여러 번 나누어쉬었다.
그것도 페로몬이라고. 머리에 열이 개고, 조금씩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오메가. 수치도 모르는 몸뚱어리.
하핫, 터져 나온 웃음은 바람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저를, 아십니까?’
‘디, 나를 알고 있습니까?’
일관성 하나는 있어 좋군, 그래.
어느샌가 날아간 위스키병이 퍽- 벽에 부딪쳐 깨어졌다.
들어오다 말고 디가 성질내는 모습을 일등석에서 관람한 솔이가 내심 박수치며 들어섰다.
“보고서 확인했어?”
“아직.”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봐도 돼.”
별일이라는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서두를 것 없다, 말한 솔이가 푹신한 소파에 기대 앉았다.
“10구역 34단지 통로 확보했어.”
“정보 제공자는?”
“그게….”
조금 꺼림칙하지만, 별수 없다는 얼굴로 커피를 홀짝인 솔이가 답했다.
“돼지코.”
돈만 되면 이리 붙고 저리 붙어 박쥐 짓이나 하는 암매상이지만, 제공한 정보의 신뢰도는 최상급이었다.
“이번엔 나 혼자 다녀올게.”
“우리가 그렇게 성가셔?”
“응.”
“와, 진짜 오빠 너무하네. 요즘 세상엔 또 솔직한 게 다 미덕은 아니에요. 응? 내 말 듣고 있어? 응? 오빠! 어디가? 내 말 안 들리는 거야?”
“바람 좀 쐬고 올 테니까, 잘 거면 자고 가.”
“야밤에 무슨 바람이야? 또 12구역 가려고? 거기 괴수들은 이제 오빠 냄새만 맡아도 진저리를 치겠다! 들어가는 사람은 많아도 살아 돌아오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그 12구역이 뭐 오빠 놀이턴 줄 알아? 아무 때나 시도 없이 드나들게?”
물론, 살아 돌아오는 한 사람에 속하는 디에게 12구역은 놀이터나 다름없긴 했다.
“내일도 눈 온대. 모레도 오고, 글피도 오고. 이번 주 내내 올 건가 봐.”
“그래, 눈 그치면 가.”
성의 없이 답한 디가 대충 장비를 껴입고 서재를 나섰다.
“뭐야, 내가 그 작자랑 만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야? 나도 보면 바로 죽여버릴 것 같은데?”
나직이 중얼거린 솔이가 텀블러에 든 아이스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서재를 빠져나갔다. 아무리 제집처럼 드나든다지만, 정말 제집은 아니라서 한 달은 참았는데, 더는 기다리기 싫었다. 유서 깊은 성이라지만, 끽 해봐야 6층짜리 건물. 한 바퀴 도는데 하루면 족했다.
‘정말 10구역은 형질자든 이형자든 차별 없이 평등하답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그렇더라.’
‘아무리 장군님 말씀이지만, 정말 믿기지 않으네요.’
‘시국이 안정되면 휴가라도 다녀와.’
‘형질자든 이형자든 상관없이 똑같이 일하고 돈 벌고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이라니.’
‘어째 은퇴하고 싶다는 소리로 들린다?’
‘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장군님 은퇴하시기 전엔 절대 먼저 관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 이틀 만에 약탈자가 내지른 칼에 머리를 맞고 즉사했지. 꽤 오랜만에 들어온 신입이었는데.
멍하니 누워 침실 천장을 올려다본 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10구역. 나중에 세상이 좋아지면 10구역에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지. ‘자연의 확산’이 시작된 이후 유일하게 이전의 문명과 사회 시스템이 가장 흡사하게 남아있는, 일종의 유토피아였으니까. 그러나, 선의 꿈은 1구역을 또 다른 10구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형질자나 이형자가 물건과 돈으로 거래되지 않고, 똑같은 사람으로서 권한과 의무를 다하는 사회 구조가 허황된 꿈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100년 전에는 그렇게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그때도 지금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지 않겠니?’
스승님.
‘물론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1구역도 제2의 10구역이 될 수 있어. 그뿐만이냐? 100년 전처럼 완벽한 세상을 만들수도 있을 게다.’
선생님.
다 옳은 말이 아니겠나 싶으면서도, 선은 ‘선생님’이 말하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아이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또는 특별한 사람들이, 약하거나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받거나 다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지금 존재한다면, 왜 10구역은 전 구역으로 확산될 수 없는 걸까. 자연이 아니라서? 결국은 자연에게 삼켜질 운명인데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것도 결국엔 헛된 일인 걸까.
‘내일 당장 ‘자연’에게 삼켜진다 하더라도 선과 같이라면 행복할 것 같은데?’
밤.
거짓말쟁이. 내가 아니라 ‘뫼’와 함께였다면 더 행복했을 거잖아요.
문득 목 밑을 물고 들어오는 한기에 목을 움츠린 선이 창문을 돌아보았다. 인공조명이 없는 성 안은 밤이 되면 어디든 캄캄했다. 항상 겨울이고, 1년 365일에서 300일 이상 눈이 내리는 8구역엔 달조차 뜨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또 다른 7구역이라고 했었지.
무법지대였던 8구역을 1년 만에 지배할 수 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뛰어난 전투력과 목표 의식만으로는 부족했다. 자금력. 혹한의 구역에서도 10구역에 버금가는 대호황기를 누리고 있다는 8구역의 막대한 자금 흐름에는 암시장이 엮여있지 않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짚어 누른 선이 눈을 깜박였다.
낮에도 눈이 내리더니 계속 내리는 건가. 내가 언제부터 또 잠들었지? 지하 감옥을 빠져나온 뒤 또 6개월은 요양하느라 무언가 읽을 눈을 키우기는커녕 현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6개월을 유리관에만 있었지. 망가진 몸이 회복될 때까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부분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선생님’과 1구역을 전혀 돌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정도는 해야지. 내가 살아 있어야 1구역도 살려 준다니. 그런 모순이 어디있어.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겠다는 선전포고였나. 아…, 졸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밥이라도 찾아 먹어야지. 제가 살아야 다 살려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