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40)


#38화

콰광-! 쿠구궁-!

산이 흔들리고 대지가 흔들리는 폭발음이 겨울 숲 한가운데를 쭉 뻗어나갔다.

콰과광!

“이크!”

또 한번의 폭발음에 몸서리를 치는 돔돌이 뜨거운 핫초코를 후후 불어 마셨다.

“형 저렇게 놔둬도 돼요?”

“안 될 거 뭐 있어? 자기 땅 자기가 부수겠다는데.”

곁에 앉아 아이스 커피를 마시는 솔이가 무심히 대꾸했다.

“나 요즘 귀도 안 좋은데. 동네 시끄럽게 저게 뭐 하는 짓이냐고요.”

“헤드폰 써. 너 좋아하는 밴드 신곡 냈다며.”

“그 밴드 11구역 출신인데 송출이 끊겼나 봐요. 인터넷 연결이 안 돼요.”

“그러게 말했잖아. 요즘 트랜드는 레트로라고.”

“트랜드는 무슨, 일상이 레트로지. 사이버 펑크에 무협물까지 끼얹으면 딱이네!”

“판타지라고 퉁치자. 아무튼 CD 하나 구해다 줘?”

“품절이에요. 프리미엄 주고 사려고 해도 매물이 없어요. 매물이.”

“돈 주면 못 사는 게 어딨어. 봐봐. 호수 하나 더 깬다.”

“저렇게 열심히 깨면 뭐 해. 하루도 안 돼서 꽁꽁 얼어붙는데.”

“난 여기 추워서 좋더라. 나쁜 놈들이 일찍 죽어.”

“누나 만나면 여기가 아니라도 어디서든 나쁜 놈들은 일찍 뒈지지.”

“이 집에 들어앉은 나쁜 놈은 언제쯤 뒈지려나?”

테라스에 앉아 꼰 다리를 흔들거리며 쪼옥- 남은 커피를 다 마신 솔이는 롱패딩을 꽁꽁 껴입은 채였다.

“장군님? 들어 앉힌 지 한 달이나 됐다는데 얼굴 한 번 못 봤네.”

“이 집이 좀 넓냐? 나도 그 귀한 용안 보고 싶어 어슬렁거리는데 어째 통 보이질 않아.”

“못 참고 확 죽여버린 거 아냐?”

“그럴지도.”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오지도 않는 커피를 쪼옥 빨아 마신 솔이가 이번엔 얼음을 와득와득 씹었다.

“빌런 중의 왕빌런인데 그렇게 쉽게 죽여버린다고? 아무리 형이라도 그건 선 넘었지! 그 새끼 때문에 우리가 무슨 짓을 당했는데!”

“난 당한 거고, 넌 당할 뻔한 거고.”

말은 바로 하자는 솔이가 “아, 그건 그런데.” 우물쭈물하는 돔돌의 허벅지를 발끝으로 툭 치며 웃었다.

“뭘 따져~. 세상엔 훌륭한 일 하는 척, 온갖 위선을 다 떨어놓고 뒤꽁무니로는 애부터 수정알 하나까지 알뜰히도 팔아먹은 개새끼는 아직도 잘먹고 잘살고 있는데.”

“그렇지? 장군님 아직 살아있는 것 같지? 형이 그렇게 쉽게 죽였을 리 없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미친놈처럼 사냥꾼들 쳐죽이고 다닌 게 누군데! 대장군? 그 새끼는 세상에 제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 봐야 돼! 자비? 단칼에 죽여? 누구 마음대로! 자기가 한 짓거리 하나하나 돌려받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자기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 아니라 희대의 악마라는 사실을 지나가는 개새끼도 알아야 한다고!”

흥분해 버럭버럭 외치는 돔돌의 어깨를 도닥인 솔이가 와득와득 얼음을 씹어 먹었다.

여섯 살에 약탈자들에게 끌려가다 백인부대의 도움으로 구출된 솔이는 그때만 해도 죽다 살아난 줄 알았다.

‘괜찮니?’

빌어먹게도 아름다운 얼굴로 다정하게 웃으며 솔이의 피를 닦아주던 대장군 ‘선’은 구원자 그 자체였다.

‘아이들 춥지 않게 히터 충분히 틀고, 먹을 것부터 챙기도록.’

구출해낸 아이들을 다시 하나하나 군용 버스에 태우며 부하들에게 당부하던 모습은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솔이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제 눈앞에 있는 신에게 쉼 없이 감사하다, 빌고 또 빌었다. 그런 끝에 도착한 곳에 솔이 외에도 57명의 아이가 인계되었다. 형질자, 이형자, 이능력자. 그중 유일한 형질자였던 솔이만 따로 갈라져 인솔됐다. 그리고 제가 도착한 곳이 유토피아인 10구역이 아니라 7구역의 형질 연구소라는 사실을 다음날 유리관 안에서 알게 되었다.

‘이건 더 못 쓰겠군.’

열아홉, 솔이를 눈앞에 두고 무심히 폐기처분을 말하던 연구원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했다.

여섯 살부터 각종 생체 실험에 노출된 솔이는 수태 능력을 잃은 대신 유전자 이식에 성공해 이형자가 될 수 있었다. 가진 능력은 고작 뱀독에 불과했지만, 수태 능력보다는 솔이의 삶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수태 능력을 잃은 우성 오메가의 뱀독은 쓰레기보다도 더 가치가 없었다. 연구소에서의 폐기처분은 경매장 행이라는 뜻이었다. 그 사실 역시 솔이는 경매장에 들어서고서야 알게 되었다. 온갖 변태들이 점잖을 빼고 앉아 숫자를 입력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솔이는 단돈 천만 원에 팔렸다. 말이 에스코트 서비스 회사였지, 고급 사창가였다. 경매 후 인계 절차를 마치는 중에 경매장 건물 벽에 구멍이 뚫렸다. 지름 3m의 동그란 구멍. 레이저로 작업한 것처럼 깨끗하게 도려낸 구멍 너머엔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디였다.

그때 만해도 솔이는 시큰둥했다. 자칭 사냥꾼과 타칭 약탈자들이 득시글거리는 데서 저 남자 혼자 무슨 짓을 하겠느냐, 라는 불신이었다. 처음엔 경매장만 털고 다니는 도굴꾼인 줄 알았다. 그러나 디는 순식간에 그 안에 있던 사냥꾼과 약탈자들을 해치우고, 달아나는 변태들을 구석으로 몰아 우리에 가두었다.

빛이 번쩍번쩍했다. 번개 같기도 하고, 본 기억이 오래 된 태양빛 같기도 했다. 우리에는 이형자와 괴수의 유전자를 합성해 만들어낸 또 다른 괴수들이 굶주린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변태들과 조력자들을 우리에 몰아넣은 디가 경매 상품들 앞에 섰다.

저와 같이 갈 거냐는 질문에 100명의 상품 중 단 둘만이 그를 따라나섰다. 솔이와 융이었다. 융은 날개종과 갯과 수인을 합성해 만든 또 다른 괴수였다. 괴수치고는 능력도 하찮고, 귀여웠지만, 손바닥만 한 털뭉치에 날개가 달린 모습은 일반인들에겐 괴물처럼 보일 터였다. 그래도 수요가 있어 경매장에 매물로 내놓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융이 안 보이네.”

“또 12구역으로 놀러 간 거 아니야? 거긴 성질 디같이 드러운 애도 많다고 했는데!”

“그랬으면 알람 울렸을 거야. 저번에 목걸이 걸어줬잖아.”

12구역에 사냥 갈 때 한번 데리고 갔더니, 그 똑똑한 게 길을 한 번에 외워선 무단으로 외출한 적이 있었다. 성에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지, 12구역에서만 나는 산딸기 열매를 가득 물고 온 융을 발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바탕 난리를 친 돔돌이 이산가족 상봉한 듯 융을 껴안고 대성통곡을 했지만, 융은 그 품에 안겨 딸기만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그 뒤로 위치추적기를 삽입한 목걸이를 달아주었다. 융이 성을 오갈 때마다 알림이 울리도록 설정되었다.

“그러게 왜 크기만 하고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을 사들인 거야? 애 찾는 것도 힘들고, 오다가다 나쁜 놈 우연히 마주쳐 골탕 먹일 가망도 없고! 하여간 디 형 그렇게 안 보여도 은근히 허세 쩐다니까?”

“내가 골랐어.”

“뭐?”

“여기 내가 골랐다고. 쓸데는 없어도 멋있잖아? 네 뿌리처럼.”

“아앗, 누나!”

사슴 수인인 돔돌이 얼굴을 붉히며 앙탈을 부렸다. 쓸데는 없다는 말보다 멋있다는 말이 더 귀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명색이 8구역 지배잔데 성쯤 되는 데서는 살아줘야지.”

“그래도 그렇지. 고를 거면 좀 덜 춥고, 덜 으스스한 성으로 고르던가!”

“좋잖아? 요새 같고. 성 뒤에는 절벽도 있고. 까만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라고 애칭이 ‘블랙 일리니’라잖아. 우리 대표님 은발하고도 잘 어울리고. 그리고 돔돌아, 돔돌아. 8구역에 덜 추운 데가 어딨어. 더 춥고, 더더 추운 데가 있을 뿐이지.”

쾅-!

“엇? 끝났나 보다!”

디에게 직접 ‘나쁜 놈’의 행방을 물으려는 건지 마지막 굉음이 들리자마자 2층 테라스에서 뛰어내리려는 돔돌의 뒷덜미를 잡아챈 솔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돔돌아. 당분간 대표님 앞에서 대장군의 대자도 꺼내지 마라. 못하겠으면 대표님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그치만!”

“때 되면 다 어련히 하실 거야. 우리만큼, 아니, 우리보다 더 사무치게 그 작자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을 꼽으라면 대표님이 으뜸 아니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대를 들썩이게 만든 진동이 사라지고 뿌옇게 일어난 눈가루가 서서히 가라앉는 걸 바라본 솔이의 눈에도 근심은 있었다. 솔직히 호텔 라운지 바에서 그 작자를 마주했을 땐, 인내심이 바닥난 디가 당장 쳐죽이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괜한 염려였다.

“…….”

불 꺼진 라운지 스크린에서 절찬리 상영 중인 속죄 주간 영상 앞에서도 그 작자는 태연했다. 오히려 눈 하나 깜짝 않고 제가 출연한 스너프 필름을 감상하는 그 작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디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그래, 디는 그 작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그 작자가 제 영상이 공개된 걸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디의 표정은, 솔이도 말로써 표현할 수 없었다. 기대감, 기쁨? 놀라움, 의아함, 분노에 상응하는 울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에서 솔이는 정리되지 못한 디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본디 사무치는 원한이란 쉽게 정리될 수 없는 종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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