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후욱, 훅! 제가 알아야 하는 분이십니까? 아악!”
단검을 뽑자마자 피가 콸콸 뿜어져나오는 허벅지 상처를 쥐어뜯듯이 움켜쥔 디가 웃었다.
“이 정도 봤으면 눈감고도 알아봐야 할 사이는 되지.”
“크으흑! 아픕, 아픕니다.”
“엄살 떨지 마. 이까짓 거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거 알고 있어.”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바라시는 게 있다면, 아아악! 그만! 그만!”
상처를 벌려 엄지를 쑤셔 넣은 디가 안을 후벼파자 견디다 못한 선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 처절한 몸짓에 만족감을 드러낼 법도 하건만, 디는 잿빛 눈으로 가만 응시할 뿐이었다.
“바라는 거? 있지. 결국엔 너도 내게 주게 될 거야.”
미친 새끼. 그게 뭐든 절대 주지 않을 것이다. 이를 가는 선의 눈꼬리를 타고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제야 웃음 짓는 디가 속삭였다. 불에 그을려 다친 성대를 긁고 올라오는 소리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선. 지금 당장 네 목을 갈라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격렬한 분노와 용암 같은 증오가 뒤섞인 눈은 재처럼 타버린 뒤였다. 그 안에서 들끓는 감정을 영민하게 읽어낸 선이 두 눈을 내리깔았다. 군용차는 아직도 출발 전이었고,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언제든 1구역을 쳐들어갈지도 몰랐다.
가지고 노는 것이다. 이 남자는. 언제든 제 목숨을 빼앗고, 백인부대를 해치우고, 단 하룻밤 만에 1구역 전체를 불살라버릴 수도 있는 힘과 의지를 가졌다. 그럼에도 살려줄 것처럼 살살 구슬리며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명할 수 있다면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1구역엔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저 약하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진 이들이 불모의 땅을 겨우 재건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남자의 분노를 산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사사로운 복수가 다수의 생명에 선행될 수는 없었다. 개인의 원한이 구역 하나를 생지옥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의 1구역은 이 남자의 횡포 앞에선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피가… 멈추질 않아요.”
‘그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도무지 피가 멈추지 않네요.’
불시에 날아온 손이 연거푸 선의 왼뺨을 갈기고 지나갔다. 손바닥이 아닌 주먹이었다. 모욕을 주기 위함이 아닌 살의를 담은 폭력이었다. 힘이 실린 주먹질에 소파에서 떨어진 선이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마체테를 움켜쥔 디가 높이 들어 올린 손을 힘껏 내리쳤다.
쩌어억- 갈라진 대리석 바닥으로 선의 잘린 머리카락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바로 코앞을 가르고 지나간 칼날에 창백해진 선의 얼굴이 비쳤다. 살짝만 비껴갔어도 갈라진 건 대리석 바닥이 아닌 선의 머리였을 터였다.
“피….”
중얼거린 디가 피식 웃으며 힘껏 휘두른 마체테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래. 피가 멈추지 않으면 안 되지. 당신은 살아야 하니까.”
웃는 듯 마는 듯 기묘한 얼굴로 바닥에 웅크린 선을 내려다본 디가 씩 웃었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버러지처럼 웅크린 꼴이 우스웠다. 과연, 저 좀 살아보겠다고 어린 것들과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는 척 영웅행세를 하다가 뒷문으로는 7구역에, 연구소에, 변태한테, 괴수들의 먹이로 팔아넘기는 위선자다운 모습이었다.
“너도 형질자였지.”
마치 혐오스럽다 못해 저주해 마지않는다는 어투였다. 군홧발로 웅크린 선의 배를 걷어찬 디가 그제야 천장을 보고 누운 몸뚱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부어터지고 피투성이가 되고도 헐떡거리는 모습에 욕정과 욕지기가 동시에 치밀었다.
“입 벌려.”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입을 벌리는 선에게서 익숙한 체념이 읽혔다.
그럼 그렇지. 역겨운 알파 새끼들.
‘뭐야? 이 역겨운 알파 새끼는.’
명색이 대장군씩이나 되고도 평생 알파에게 좆집 취급당하며 살아온 오메가에게 동정이 생겨야 마땅했으나, 디에겐 과거의 잔재만 불러올 뿐이었다. 결국 깊은 분노였다. 절대 해묵지 않고 평생 생생하게 디의 뒤꼭지를 따라다닐 절망감이었다.
걱정 마, 당신도 곧 느끼게 될 테니까.
“…….”
다 터진 입술을 익숙하게 벌리고 있던 선이 스르륵 눈을 떴다. 머리맡에 선 디가 소변을 갈기고 있었다. 입으로 콸콸콸 쏟아지는 뜨끈한 소변 줄기를 목구멍이 채 넘기지 못하고 입 밖으로 게워냈다. 잠시 놀랐을 뿐, 고개를 틀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선은 그저 소변이 역류하지 않도록 고개를 좀 더 뒤로 젖혔을 뿐이었다.
지독히도 익숙해 보이는 모습에 디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눈 떠.”
선은 시키는 대로 눈을 떴다. 목구멍으로 다 들어가지 못하고 역류한 소변이 시야를 흐리게 했지만, 저를 내려다보는 디의 눈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살의가 일 때만 번들거리는 저 잿빛 눈동자가 선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을 죽이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 오싹 등줄기가 섰으나 선은 일어나 달아나는 대신 입을 좀 더 크게 벌렸다. 투둑, 터진 입술이 더 터져 핏물이 흘렀다. 그리고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뜨거운 소변을 받아 삼키는 선의 목울대가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렇게 꿀꺽꿀꺽 받아마셔야지. 내가 너한테 나눠줄 페로몬은 이따위 것밖에 없거든.”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낮게 읊조린 디는 제 안에서 날뛰는 불길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소변 줄기에 흠뻑 젖고도 옅은 비누 냄새를 풍기는 선이 역겹기도, 사랑스럽기도 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곳이었다.
8구역의 거대한 성에 갇힌 오메가는 이레 밤낮을 눈을 뜨지 못했다.
몸은 불덩이였고, 고열에 푹 삶아진 뇌수는 그나마 조각조각 기워낸 기억도 흐물흐물 녹였으나, 주변은 얼음장이었다. 살얼음이 낀 방에 첫날은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 두 번째 날도, 세 번째 날도, 마지막 이레까지, 그 누구도 오메가가 갇힌 방에 발길을 두지 않았다.
이레가 지난 밤, 간신히 눈을 뜬 선이 겨울 냄새에 창밖을 돌아보았다.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선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전신이 저릿저릿하고 오한이 일었다. 발작 후유증이었다.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이불을 젖힌 선은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의와 시트가 죄다 젖어 있었다. 교주 악선의 지하 감옥에서 보낸 1년의 후유증이었다.
아니, 어쩌면 선이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때의 후유증인지도 몰랐다. 이제 더 기억에 집착하지 않는 선은 최근 기억을 제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점점 쇠약해지는 ‘선생님’의 곁을 반쯤 자진해 떠나온 것도 언제 정신을 놓을지 모를 제가 그의 목숨을 앗을까 겁이 나서였다. 쉼 없이 망가져 온 선의 몸은 아무리 고치고 값비싼 이물을 들이부어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정신은 더 형편없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 선이 옷을 벗고 침대 시트와 이불을 걷었다. 세탁기 하나쯤은 있겠지. 이 거대한 성에 하나뿐 아니라 여러 대쯤 있을 것이다. 먼 길을 나서기 전 에 옷장 문을 열었다. 다행히 옷 몇 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직도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은 가랑이를 대충 닦고 옷을 걸쳤다.
이제 막 새벽 2시를 지난 시간이었다. 앓는 내내 누군가 드나든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저는 방치된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달려들더니. 잿빛 눈빛을 떠올린 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내는 동안은 뭐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 지압한 선이 한참 뒤에야 몸을 움직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복도에 발을 디딘 선의 앞에 펼쳐진 건 1구역 중앙 회장보다 더 넓은 실내였다. 5층, 복도 너비는 2m 남짓이었고, 양쪽으로 방문 다섯 개씩 총 열 개의 방이 있었다. 약 3m 높이의 창문은 복도 끝에 하나씩. 가운데 중앙 통로 양쪽으로 더 크고 높은 창이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한눈에 보이는 빈부격차가 낯설진 않았다. 약탈당한 형질자를 회수하기 위해 전 구역을 돌아다닌 게 10년이었다. 그러나 100년에 걸쳐 시스템을 구축하고 재건을 해온 1구역과 통합한 지 겨우 1년 남짓 되는 8구역의 생활 수준 차이엔 박탈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독 더 무겁게 느껴지는 빨랫거리를 든 선은 친절하게 붙어 있는 안내판의 도움을 받아 쉽게 세탁실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5층에도 있었다. 이 정도로 으리으리 한데, 층간 소음 같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