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40)
  • #36화

    속죄 주간 영상이었다. 또 다시 정신이 나간 대가였다. 보는 눈이 많은 데서 ‘선생님’을 죽이려 한 건 ‘선생님’조차 구제해주지 못할 중죄였다. 선은 찍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공개된 사실은 알지 못했다. 처형장에서부터 불이 난 산맥의 괴수들을 물리쳤을 때까지의 기억이 모조리 휘발되었다. 3개월 남짓한 기간에 남은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다. 벌써 2년쯤 된 일이었다.

    “눈을 깜박이기만 하면 돼.”

    한 번에 한 놈씩.

    “딱 열여덟 번만 깜박이면, 저놈들을 다 죽여줄 수도 있어.”

    머리에 총알을 먹여주고, 원한다면 똥구멍에 총알을 박아줄 수도 있다, 악마처럼 속삭이는 디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목이 긴 상의 아래에도 총탄과 자상이 있을 거란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널 저렇게 만든 ‘선생님’은 어때? 널 속죄 주간에 밀어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저 영상을 공개한 사실을 입도 벙긋 하지 않은 네 ‘선생님’을 먼저 죽여줄까?”

    당시 1구역으로 귀환하자마자 의식을 잃은 선은 한 달 만에 눈을 떴다. 모든 상황이 수세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선은 그 원인이 된 저를 버리지 않은 ‘선생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했다.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 한 저를 한 번도 내치지 않고 끝내 품어준 ‘선생님’은 평생의 은인이었다.

    중앙 회장에서, 모든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선생님’께 칼끝을 겨누고 달려든 건 죽어 마땅한 일이었다. 정신이 나간 제가 저지른 반역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저 속죄 영상도, ‘선생님’의 침묵도 발생하지 않을 일이었다.

    “선.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의 눈알을 모두 파 버릴까? 아니, 저 영상을 본 인간들을 죄다 죽여버리는 거야.”

    영상이 끝나고, 스크린의 불이 꺼졌다. 동시에 밝아진 라운지 바의 사람들이 힐끔힐끔 선을 훔쳐보다, 그 뒤를 차지하고 선 디를 발견하곤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한쪽은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한쪽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모든 영상을 감상한 선이 입을 열었다.

    “자살이 취미십니까?”

    디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대표님도, 저 영상을 보셨잖습니까.”

    저를 돌아보는 창백한 뺨에 당장 총을 겨누고 쏴버리고 싶기도, 목을 조른 채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디는 빙긋 웃었다.

    “글쎄. 내 눈은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쩌억-!

    이번엔 창백한 뺨을 후려 갈긴 디가 사납게 내뱉었다.

    “같은 말 두 번 지껄이게 하지도 마.”

    6개월의 요양이 부족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지만, 남자의 움직임에 반응은커녕 기척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8구역의 지배자라는 남자의 위력이 새삼스럽게 실감됐다.

    “네, 알겠습니다.”

    홱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한 선이 정중히 시선을 내렸다.

    “자, 그럼 거래를 시작해볼까?”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조용한 라운지 바에 음악이 깔리고, 사람들이 각자의 용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디 역시 선의 등 뒤를 돌아나와 앞장섰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있어도, 전투복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한 선도 걸음을 내디뎠다.

    단 6개월 만에 1구역의 군사력을 완전 무력화시킨 8구역의 지배자, 디의 요구는 단순했다.

    포획한 18마리의 알파 놈들을 돌려받고 싶다면, 1구역의 대장군을 내놓아라.

    1년이란 시간을 겪은 뒤 6개월을 요양해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선은 어차피 허울뿐인 대장군이었다. 실질적인 업무는 삭이 대행했고, 그나마도 남은 17명의 대원들과 산 채로 붙잡혀 갔다. 허울뿐인 대장군을 지키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1구역을 지탱하고 있는 백인부대원들을 돌려받는 게 합리적이었다.

    ‘저들이 제 목을 치진 않을 겁니다.’

    ‘그걸 네가 어찌 장담하느냐.’

    ‘저들에겐 ‘대장군’인 제가 필요할 테니까요.’

    ‘너를 모욕하고 삿되게 굴면서 1구역의 남은 상징마저 짓밟겠다?’

    ‘‘선생님’. 상징은 언제나 바뀌고 변화합니다. 제게 그 가르침을 주신 건 ‘선생님’ 아니십니까? 지금 1구역을 보하고 구역민의 희망이 되어주는 건 허울뿐인 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그들을 지키는 데 앞장선 백인부대원들입니다.’

    ‘하나 ‘선’. 네 몸은 온전치 않다. 교주 악선이 네게 저지른 짓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구나. 1년 만에 돌아온 너를 마주했을 때 나는….’

    ‘지나간 일입니다.’

    ‘8구역의 지배자가 그런 짓을 또 자행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느냐.’

    ‘육체의 고통은 순간일 뿐입니다, ‘선생님’. 영혼에 낙인을 찍는 고통은 두려우나, 내 영혼은 부서져 버린 지 오랩니다.’

    ‘‘선’’

    ‘스승님의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하나 남은 핏덩이마저 목숨을 잃은 그 밤, 선(㦏)은 죽었습니다. 실험체로 끌려가던 저를 구해 선(先)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 건 ‘선생님’이십니다. 저는 ‘선생님’ 덕분에 살아갈 이유를 찾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헛되이 죽지 않는 것. 그럼에도 처참하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는 것을 등불 삼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은혜도, 지난 10년의 노력도 제 부서진 영혼을 되돌리진 못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느냐, ‘선’.’

    ‘이번엔 저를 죽었다, 생각하시고 보내십시오.’

    ‘‘선’!’

    ‘저는 이미 꺼진 불빛이자 짐만 될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만하거라.’

    ‘백인부대원들을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쳐 1구역의 등불로 삼으십시오.’

    ‘그만하라지 않았느냐! 너만 이렇게 쏙 빠져나갈 속셈이냐! 1구역의 형세가 불리해지는 것 같으니 너 혼자 살아남을 요량으로 이러는 것이냐!’

    ‘8구역에서 혹여나 제 목숨을 담보로 무언갈 요구하거든, 응하지 마십시오.’

    ‘어찌 그러느냐!’

    ‘그간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니 들은 걸로 하겠다! 내 선(㦏)을 선(先)으로 살렸다 하니, 너를 선(還)으로 다시 부르겠다!’

    ‘부디, 강건하십시오.’

    선은 살려고 남자의 앞에 선 게 아니었다.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하지 못한 채 넓은 룸 한가운데 바르게 선 선이 조용히 물었다.

    “대원들은 어딨습니까.”

    넓은 소파에 널브러지듯이 앉은 디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

    피투성이가 된 18명의 백인부대원이 벽 한쪽을 다 차지한 모니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지를 결박당해 통나무배처럼 겹겹이 엮인 그들은 낡은 군용차에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걱정 마, 1구역까지는 잘 모셔다드릴 테니까.”

    “1구역까지는, 요?”

    “하!”

    헛웃음을 친 디의 잿빛 눈이 번들거렸다.

    “이 자리에서 싹 다 목을 쳐버릴까….”

    갈등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곧 선을 올려다보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즉시 날아간 단검이 선의 허벅지에 박혔다. 큭. 신음하며 비틀거리는 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깔린 땅콩 따위를 툭툭 건드린 디가 덧붙였다.

    “다리도 아플 텐데, 앉아. 아예 하반신을 썰어버리기 전에.”

    ‘앉아. 더 처맞고 싶은 게 아니면.’

    두 번째 경고였다. 미친놈. 다음엔 단검이 아닌 총알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단검이 박힌 왼다리를 절뚝거리며 맞은편 소파에 앉은 선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우리 대장군께서 목숨 잘 붙이고 계시면, 내가 저 알파 새끼들을 쳐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칼 뽑아.”

    “과다출혈로 실혈사할지 모릅니다.”

    “할 말 못 가리고 따박따박 지껄이는 것도 변함없고.”

    “…저를, 아십니까?”

    빙긋 웃은 디가 되물었다.

    “나를, 몰라?”

    “네, 기억에 없는 얼굴입니다.”

    “하핫, 재밌네. 여전히 재밌어, 당신.”

    어느새 성큼 테이블을 뛰어넘어 온 디가 선을 내려다보았다.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선은 어떤 저항 태세를 보이는 대신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구형 트럭은 아직 출발 전이었다.

    쩌억-!

    이번엔 왼뺨이었다. 부어오른 데가 인정사정없이 갈겨지자 아찔한 고통이 밀려왔다.

    “대화 중에는 상대 얼굴을 봐야지.”

    아무래도 그 예의는 선에게만 국한된 것 같았다.

    “죄송합니…, 아아악-! 헉! 흐읍!”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의 왼쪽 허벅지에 군홧발을 올려 무게를 실은 디가 곧장 깊게 박힌 단검을 뽑았다.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경련한 선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썩은 곰팡이처럼 부풀어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싱긋 웃은 디가 단검을 휙 던져 벽 어딘가에 꽂으며 얼굴을 더 가까이 붙였다.

    “이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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