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제야 턱을 놓아준 디 덕분에 고개를 바로 할 수 있었던 선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디가 곧바로 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왜, 부족해? 더 줄까?”
“아니…, 쿨럭, 아닙니다…. 그저 두통… 큭. 최근 두통에 시달려서.”
“…두통?”
왜인지 멍해진 디의 눈에 순식간에 광기가 서렸다.
내 내장을 산 채로 꺼내놓고, 내가 거쳐 간 자리마다 사람들의 뼈와 살로 거름을 줘놓고, 고작 두통 때문에?
“힘들어?”
“…아닙…니다.”
“왜애, 힘들 수도 있지. 괜찮으니까 말해 봐. 요즘 두통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
미친놈.
욕설이 곧장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선은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당장 살인이라도 할 것처럼 돌아버린 눈으로 다정한 척 묻는 행동을 보자니 등골이 쭈뼛 섰다. 어떤 대답이든 지뢰였다. 빠르게 판단한 선이 지친 얼굴로 디를 바라보았다. 지친 얼굴은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선은 지금 당장 고꾸라져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기진한 상태였다.
“얼굴을… 닦고 싶습니다.”
디의 눈동자 색깔이 바뀌었다. 오싹한 잿빛이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가늘게 떨리는 선의 목소리는 조용해진 지 오래인 라운지 바에 선명히도 울렸다.
1구역의 대장군 ‘선’. 10년간 누구에게도 패해본 적 없고, 잔인무도한 약탈자를 섬멸하며, 어려움에 처한 구역민을 앞장서서 구한 영웅.
그 영웅이 반역자로 둔갑해 전 구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게 고작 1년 전이었다. 속죄 주간 영상이 공표된 뒤 영웅은 매음굴의 창기보다 못한 존재로 곤두박질쳐졌다. 적어도 이 라운지 바에 발을 들인 사람 중에는 속죄 주간 영상을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자연의 확산’으로 매분 매초 미래를 잃어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영웅의 추락이란 그 이상의 쾌락을 줄 수 없는 오락 그 자체였다.
“간교한 연기로 사람을 속여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것도 여전하고.”
그래서 더 기껍다는 듯, 소리 내어 웃은 디가 머리채를 놔주며 허락해주었다.
“닦아.”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한 선이 구겨진 손수건을 펴 제 얼굴을 닦았다. 이미 디의 손을 한차례 거쳐온 뒤라 축축하고 독한 술 냄새가 났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쩐 이유에선지 극심했던 두통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두통이 가라앉자 퉁퉁 부어오른 뺨에서 둔통이 올라왔다.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쉰 선의 눈동자가 착 내려앉았다.
역시 저 미친놈은 우성 알파가 맞구나. 이능력자인 건 분명했지만, 형질자인 건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페로몬을 완벽하게 감춰버리면 같은 형질자도 알아보기 쉽지 않으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청포도 향이라니. 손수건에서 희미하게 맡아지는 페로몬에 쓴웃음을 삼킨 선이 마저 얼굴을 닦았다. 젖은 머리칼은 대충 쓸어 넘기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수건을 꽉 짰다. 디에게 도로 건네주려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가득 좁아진 동공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알과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오싹하고 께름칙한…. 좁아진 동공이 차츰 벌어지며 이번엔 ‘진짜’로 눈이 마주쳤다. 빙그레 웃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대장군 ‘선’?”
같은 질문을 왜 하나 싶은 의문이 들었지만, 선은 얌전히 답했다.
“네, 대표님.”
“봐서 알겠지만, 내가 눈이 썩 좋은 편이 아니야.”
실제 시력도, 사람 보는 눈도 형편없지.
툭툭 손가락으로 제 왼쪽 눈을 건드리는 디의 손등엔 칼자국과 총상이 흉하게 얽혀 있었다. 그건 남자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왼쪽 눈 끄트머리와 아랫입술 오른쪽엔 총상이, 왼쪽 관자놀이부터 시작된 깊은 자상은 높은 콧대를 가로질러 턱 밑까지 이어져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흉측해보이는 건 자상보다는 총상의 지분이 컸다. 관통상은 보통 화상처럼 남으니까. 저렇게까지 다치고도 살아남은 남자의 끈질긴 생명력이 타인이 그에게 갖는 경외감의 원천일지도 몰랐다. 8구역의 지배자, 디는 저 스스로 지옥에서 걸어 나온 사람의 눈을 하고 있으니까.
“잘난 얼굴을 보아하니 말로만 듣던 대장군 ‘선’ 같긴 한데, 나는 확실한 게 좋다는 걸 아주 잘 배운 놈이라.”
환하게 웃자 더 흉측해지는 얼굴 앞에서도 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흉측한 건 저런 게 아니었다. 흉측한 건….
“확인차 준비한 게 있어.”
선의 생각을 끊고 들어온 목소리는 유유자적했다. 목소리만큼 느긋한 태도로 무언가 지시하자 라운지 바의 조명이 더 어둑해졌다. 그리고 벽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 팟- 불이 들어왔다. 선의 맞은편에 앉은 디가 술을 주문했다. 한 잔은 선 앞에 그리고 한 잔은 디 앞에 놓였다.
“이걸 네게 직접 보여주면 확신이 들 것 같거든.”
마침내 스크린에 영사된 영상이 시작되었다.
출연자는 백 명의 알파와 한 명의 오메가였다.
머리채를 잡혀 카메라 앞까지 끌려온 오메가는 이미 정액 범벅이었다. 마구잡이 가위질에 싹둑싹둑 잘린 머리카락은 우스꽝스러웠고, 하도 맞아서 뭉개진 얼굴은 그럼에도 빼어난 미모를 감추진 못했다.
대장군 선.
1구역의 수호신.
자연이 지배한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
약탈자들의 공포이며, 약한 자들의 영웅이자, 희망 그 자체였던 존재.
그런 그가 반역이라는 죄목하에 끔찍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난도질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오메가는 제대로 된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아니, 가끔 카메라에 비치는 그의 눈빛은 형형해 금방이라도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다.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고도 그는 제가 반역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설사 반역을 저질렀던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 형형한 눈빛이, 오연한 몸짓이 시들고, 허물어질수록 백 명의 알파가 흥분해 날뛰는 모습이 생생하게 비쳤다.
만삭의 임부처럼 배가 부른 오메가의 뱃가죽으로 우둘투둘 동그란 알의 윤곽이 튀어나왔다. 더는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오메가의 구멍에 알 하나를 더 밀어 넣자, 성인 손가락 하나는 쉽게 드나들 만큼 확장된 요도에서 줄줄줄 소변이 샜다.
알파들은 오메가의 반응이 시원찮을 때마다 그러잖아도 심상치 않게 부푼 고환을 마구 밟아댔다. 오메가는 기어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기엔 너무 혹사당하고 망가진 뒤였다.
발랑 뒤집어 까진 구멍을 내보이며 엎드린 오메가가 제가 낳은 알을 하나씩, 하나씩 깨뜨리기 시작했다. 일주일째 수없이 반복된 장면이었다. 오메가는 제 배 속에서 수정에 성공한 알도, 실패한 알도, 성공하려다 만 알도 제 손으로 깨뜨렸다.
그것도 시들해졌는지 오메가에게 직접 살아남은 알을 골라내게 한 알파가 그것 역시 제 손으로 터트리게 했다. 틀리면 구멍에 알을 하나 더 쑤셔 넣고, 맞추면 깨진 알에서 흘러나온 점액질을 윤활제 삼아 좆질을 시작한 알파의 거친 숨소리가 조용한 라운지 바를 가득 채웠다.
값비싼 돈을 들여 들인 스피커는 성능이 좋아 작은 소리도 잡아냈지만, 오메가의 숨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오메가는 거의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한 놈씩.”
스크린에 영사기가 비쳐지고, 영상이 시작됐을 쯤, 앞으로 보게 될 장면을 직감한 선이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그러나 어느새 선의 등 뒤를 차지하고 선 디가 감싸 안 듯 스툴 등받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기절하면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
“이 자리에서 총으로 쏴버릴 테니까. 똑똑히 봐.”
귓가를 타고 흘러드는 목소리에 페로몬이 섞였다. 제 페로몬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아는 이 우성 알파도 무의식적으로 페로몬을 흘릴 만큼 잔뜩 흥분해 있다는 뜻이었다.
이따위 영상이 뭐라고. 왜. 흥분을 해.
우성 알파의 살의를 흥분으로 오해한 선은 영상에서 눈길 한 번 떼지 않았다.
일주일의 영상을 한 시간짜리로 만든 편집본이었다. 편집점이 바뀔 때마다 움찔움찔하는 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디는 선의 숨소리, 몸짓, 반응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알아챘다.
“너- 몰랐어?”
“…….”
“하하하! 저 영상이 공개된 걸 여태 몰랐다고?”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디의 몸이 흔들리면서 선 역시 흔들렸다. 그러나 디의 경고대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디가 포획한 백인부대원은 총 18명. 이 자리에서 개죽음을 당하게 둘 순 없었다. 백인부대원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인부대의 귀환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구역민들을, 그리고 평생을 바쳐 1구역을 재건한 ‘선생님’을 위한 결정이었다.
영상 속에서 선을 윤간하고 폭행하고 고문하는 알파 중에 그 18명도 포함돼 있었다. 54명을 잃은 뒤, 단 한 명도 증원하거나 이탈하지 않았으니까. 살아남은 백인부대는 저 18명이 전부였다.
“어때, 죽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