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40)


#34화

‘나는 필연보다는 치밀한 계획을 믿는 사람입니다.’

덕분에 디도 한 수 배운 셈이었다.

‘죽었다.’

많은 죽음을 발판 삼아 터득한 값진 배움이었다.

‘누구일 것 같으냐.’

선.

나의 선.

‘뭐야? 이 역겨운 알파 새끼는.’

당신의 디가 지옥을 밟고 이렇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쩌억-

커다란 마찰음이 순식간에 넓은 로비를 갈랐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 한쪽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구타하는 소리는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쩌억- 쩌억- 쩌억- 쩍-!

선은 저에게 직진해오는 남자의 기척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저를 드리운 그림자를 눈치챘을 땐 이미 멱살을 잡힌 뒤였다. 엉거주춤 일어선 선의 왼뺨을 커다란 손바닥이 연거푸 쳐 내리기 시작했다. 다섯 번 만에 뺨이 터지고 입술이 터진 선의 왼쪽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선?”

“…….”

눈앞이 아찔한 충격에도 아무 저항 없이 버티던 선이 홱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해 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디. 8구역의 지배자. 1구역 사냥꾼들의 천적. 사냥꾼 잡는 헌터. 미치광이 살인마.

그리고 앞으로 1년, 선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쩌억-!

재차 뺨을 휘갈기자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기어코 피를 보인 선이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하며 디를 올려다보았다. 저항심도, 체념도, 두려움도 없이 고요한 눈빛이었다. 디는 그 눈을 당장이라도 파내 저 잘난 입에 처박아 주고 싶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선을 훑는가 싶더니 커다란 손이 다시 높이 쳐들렸다. 선은 그 손바닥이 제 뺨을 더 내리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선입니다.”

휙- 날아온 손바닥이 벌겋게 갈라져 핏물을 보이는 선의 뺨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래, 앞으로도 내가 물으면 즉시 답하는 게 좋을 거야.”

더러운 것을 치우듯 선의 멱살을 던지듯이 놓은 디가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로 제 손을 헹궜다. 고작 손 씻는 용도로 사용한 위스키의 값어치는 수십억을 웃돌았다. 아랑곳하지 않는 디가 손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으며 씩 웃었다.

“내가 결벽증이 좀 있어.”

“…그렇군요.”

눈앞의 남자는 처음부터 선에게 모욕을 주려 작정하고 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선의 직감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1구역 장군 선.”

“대장군입니다.”

쫘악-!

별안간 날아온 손바닥이 선의 왼뺨을 갈기고 지나갔다.

“다신 내 말에 토 달지 마.”

“네, 디.”

쫙-!

선의 왼뺨에서 한 번 더 불이 일고 핏물이 터졌다.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지도 말고.”

“네.”

입 안에 고인 핏물을 삼킨 선이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디!’ ‘미치광이 살인마!’ ‘사냥꾼 잡는 사냥꾼!’ ‘디스토피아!’ ‘디스토피아의 대표!’

구경꾼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간신히 낚아챈 선이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제대로 된 호칭을 부를 때까지 교육시키려 작정한 디가 피식 웃었다.

“머리 굴리는 재주 하난 여전하군.”

“…과찬이십니다.”

“아니, 이건 진심이야.”

누군가 재빨리 가져다준 스툴에 기대앉은 디가 툭, 발끝으로 선이 앉았던 스툴을 걷어찼다.

“앉아. 더 처맞고 싶은 게 아니면.”

“네.”

사양하지 않고 제 자리에 차분히 앉은 선의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애초에 같이 온 일행이 아니었다. 급성장한 8구역의 대호황기를 상징하는 98층짜리 특급 호텔에 선이 다른 누군가와 묵을 일은 없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선은 개인적인 용무로도 이 호텔을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8구역, 호텔 ‘로얄’의 VIP 전용 라운지 바, 약속 시간을 정한 것도, 장소를 지정한 것도 모두 디였다. 아니, 디를 대리한 누군가였다. 이렇게 직접 디를 대면하고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디는 ‘선생님’이 제안한 독대조차 매몰차게 거절했다.

‘원래 밑지는 놈이 상대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리는 게 기본 아니었나?’

매몰차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대단히 모욕적인 처사에도 ‘선생님’은 거래를 철회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점점 형세가 기울기 시작한 1구역에 백인부대는 ‘선생님’만큼 중요한 상징이었다.

“‘선생님’께서 포장을 제법 잘해서 보내셨어.”

선이 입을 옷도, 색도, 신발까지 지정한 것 역시 디의 대리인이었다.

‘디는 하얀 애들을 좋아해요. 흰 것이 새까맣게 물들고, 멍들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이 망가질 때까지 짓밟는 걸 즐기거든요.’

‘장군님은 희고 아름답네요. 망가뜨리는 재미가 있겠어요.’

화상 통화 너머에서 호탕하게 웃는 디의 대리인은 화려한 금발의 우성 오메가였다.

뚝뚝 떨어진 핏물로 붉게 물든 선의 새하얀 블라우스를 쳐다보는 디의 입매가 근사하게 휘어졌다. 그러나 총탄 자국으로 흉측해진 외모가 그 근사함을 따라가지 못했다. 웃지 않을 때보다 더 기괴하고 위험스럽게 보이는 디를 정면으로 마주한 선은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선생님’의 명예와 1구역의 희망이 걸린 일이었다. 선은 제가 제 몫을 하지 못한 1년 6개월 사이 주름이 굵어지고 머리가 허옇게 센 ‘선생님’의 지친 음성에 마음 아팠지만, 그보다 더 선을 짓누르는 슬픔은 먹을 것이 없어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굶어 죽어가는 1구역의 끔찍한 현실이었다. 1구역엔 더 이상 약탈자를 대비할 칼도, 방패도, 성벽도 없었다. 선의 눈앞에 있는 남자. 8구역의 지배자 ‘디’가 씨를 말렸기 때문이었다.

“훨씬 보기가 좋네.”

흐트러진 선의 모습에서 만족감을 얻은 디가 제 손을 닦은 손수건을 휙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선이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맞은편에 앉은 디가 커다란 몸을 일으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키 183의 선보다 10센티는 더 커 보이고 덩치 또한 두 배에 가까운 남자가 코앞에 서자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선’은 손수건을 꼭 쥔 손을 떨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눈동자로 디를 얌전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에 디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언제나 현명하고 영민하신 나의 선생님. 내 오메가 선.

이를 가는 대신 환하게 웃은 디가 채 뜯지도 않은 위스키병을 낚아채 뚜껑을 열었다. 이윽고 콸콸콸 쏟아진 호박색 액체가 선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적시고 목 아래로 흘러내렸다. 고통에 익숙하다는 게 무디다는 뜻은 아니었다. 시뻘겋게 부어올랐다가 어느새 시퍼렇게 멍든 뺨으로 독한 위스키가 부어지고, 갈라진 살갗 틈을 파고들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먼저 선을 깨물었다.

감았던 눈을 뜨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선의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선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 손이었다. 그 손 역시 흉측한 상처로 일그러진 채였다.

“누가 멋대로 눈을 감으랬지?”

“…죄송합니다.”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리는 선의 까만 눈동자로 남자의 잿빛 눈동자가 쏟아졌다. 생기와 물기가 아닌 광기와 버석버석함으로 가득 찬 남자의 잿빛 눈은 섬뜩하기만 했다. 입매를 비튼 남자가 선의 턱을 움켜쥔 채 바텐더에게 다른 손을 내밀었다. 숨죽인 채 대기하고 있던 바텐더가 얼른 새 위스키를 뜯어 디의 손에 올렸다.

“이번에도 눈 감을래?”

나직한 속삭임은 다정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선은 뇌의 오류에 속지 않았다.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안 감겠다고 답하면 위스키병으로 얼굴을 후려치려 했는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디가 빙긋 웃으며 움켜쥔 선의 턱을 조롱하듯 비벼주었다.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한 병씩.”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선이 붉게 터지고 독주로 흠뻑 젖은 입술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장난 같은 고문은 다섯 병째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대표님…, 쿨럭쿨럭!”

위스키를 쏟아붓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져서 코와 입으로도 역류했다. 결국 두 손으로 스툴 등받이를 꽉 움켜쥔 선이 기침과 함께 술을 토해내며 애원했다.

“더는… 못하겠습니다.”

“아닐걸?”

피식 웃은 디가 새 술병을 들이부었다. 열 병째. 기어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선이 엉망진창으로 허우적대고서야 디의 기행이 끝났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호박색 액체를 뿜어내는 선의 모습은 한때 전장을 누비던 대장군도, 군신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던 미의 상징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칠칠찮게 눈코입으로 술을 게워내고, 콧물을 게워내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거리의 창놈도 이런 추태는 부리지 않을 것이다.

“닦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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