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40)

#33화

처음은 아니었다. 각각 살인병기나 다름없다는 백인부대를 통솔하는 대장군 ‘선’, 고작 오메가 주제에 대장군이 된 ‘선’은 1구역만이 아닌, 전 지역의 공통 관심사였다. 그들은 때때로 휴전을, 식량을, 기술을, 협약을 대가로 대장군 ‘선’을 요구했다. 각 구역의 수뇌부 중에서도 핵심만 공유한 기밀이었다.

“1년입니다, ‘선’.”

‘선생님’이 자택 근신 1년을 명했을 때부터 짐작한 바였다.

“늘 그렇듯, 거부해도 됩니다, ‘선’.”

지금까진 고작해야, 이틀, 일주일, 한 달, 최대 석 달이 다였다. 그에 비해 지나치게 긴 시간이긴 했다.

“부당합니다, ‘선생님’.”

“‘선’”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선생님’의 주름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 ‘선’이 빙그레 웃었다.

“1만 명을 받아오십시오, ‘선생님’. 교주 악선은 기꺼이 그 값을 치를 것입니다.”

“아아, ‘선’…!”

감격해 말을 잇지 못하는 ‘선생님’이 어느새 웃음을 거두고 정중히 시선을 내린 ‘선’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안았다.

“고맙습니다, ‘선’.”

“제가 도울 수 있어, 기쁠 뿐입니다.”

“덕분에 1만 명의 아이에게 새 삶을 선물할 수 있게 되었어요.”

“모두 ‘선생님’의 혜안 덕분입니다.”

“고마워요, ‘선’. 정말 고마워요.”

‘선’은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꼭 쥔 ‘선생님’의 쭈글쭈글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친 22년 전 눈앞에서 모든 걸 잃어버린 그 아이처럼. 살아갈 이유를 잃은 아이에게 그 이유란 걸 안겨준 ‘선생님’을 바라보던 열 살 어린아이처럼, ‘선’은 검고 맑은 눈으로 ‘선생님’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1만 명입니까?”

“아니, 그건 너무 후려치는 거지. 아무리 망가진 물건이라지만, 명색이 1구역을 대표하는 대장군 ‘선’ 아닌가? 5만 명은 받아내야 수지가 맞지.”

“10구역엔 3만 명으로 통보하겠습니다. 2만 명은 흥정을 붙여 가격을 더 받아내면 되겠군요.”

“역시 믿음직스럽네, 삭.”

“결과적으론 1구역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다수의 안전을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하는 건 불가결한 일이죠. 훗날 장군님도 알게 되신다면 충분히 이해해주실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나마 살 수 있게 된 건 모두 다 ‘선생님’의 은덕 아닙니까.”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으네. 삭.”

인자하게 웃으며 백인 부대장 삭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선생님’의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다음날, 5만 명의 이형 특성을 가진 어린이가 대장군 ‘선’과 교환되었다.

5만 명의 아이들은 곧장 10구역으로, 대장군 ‘선’은 유리관에 잠든 채 7구역의 교주 악선에게 호송되었다.

교주 악선은 과거 12구역 괴수에게 일가족을 몰살당한 비극을 겪었다.

키 2m 30cm, 150kg의 거구였으며,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하얗게 센 머리가 빠져 듬성듬성하게만 남아 있었다. 폐인 같이 살다가 가족의 복수를 위해 일어선 교주 악선이 제일 먼저 한 건 듬성듬성 남은 머리를 박박 밀어내는 일이었다. 일종의 의식이자 심기일전의 자세였다.

교주 악선의 재림 이후 7구역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시골에 불과했던 마을이 신도시로 척척 개발되었고, 의학을 신학에 준할 만큼 신봉하였던 교주 악선의 영향을 받아 도시 곳곳이 각종 연구소와 병원으로 채워졌다. 99개에 달하는 대학 대부분이 의대였으며, 집집마다 의학 박사 하나씩은 거주하고 있는 게 7구역의 실상이었다.

의학의 발전은 곧 과학의 발전이며, 유전학의 발전이었다. 교주 악선은 이형자들을 막무가내로 잡아들여 실험체로 쓰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이형자들만이 아니었다. 12구역에서 포획한 온갖 종류의 괴수가 교주 궁전의 지하 감옥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교주 악선의 은밀한 취미는 관음증이었다.

그는 이형자와 이형자, 일반인과 이형자, 짐승과 인간, 괴수와 인간, 이형자와 괴수끼리 짝을 붙여 어느 하나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훔쳐보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실험의 하나로 기록되고 알려졌다.

일반인과 이형자끼리의 수태가 가능한가, 이형자와 다른 이형자, 짐승과 인간, 괴수와 인간, 짐승과 괴수, 괴수와 이형자 사이에서의 자연 수태가 가능한가. 그들끼리의 유전자 교합은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공률은 어떻게 되는가. 알파와 오메가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주제에 어떻게 다른 성별을 수태시킬수 있는가. 인간끼리의 결합조차 수태의 성공률이 낮아지는 시대에 어떻게 다른 종족과 붙어먹은 인간들이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는가.

미친 과학자이자 이단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교주 악선의 근래 최대 관심사는 1구역의 대장군 오메가 ‘선’이었다. 정확히는 속죄 주간 영상을 감상한 이후였다. 수천 개의 알을 배고 깨뜨리기를 반복하고도 살아남아 결국 다시 제자리에 오르게 된 오메가 ‘선’.

알파와 오메가, 육체와 정신적 강약이 극명한 형질자 주제에 백인부대를 이끌고, 잘난 알파의 머리 꼭대기에서 전쟁의 신이라 불리우는 오메가 ‘선’. 그를 파헤치기 위해서라면 어린 이형자 5만 명쯤은 아깝지도 않았다. 어린 것들은 반드시, 언제고 또 태어나기 마련이었다. 언젠가 인간이 멸종된다 하더라도, 다른 생명체의 어린 것들은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며 신의 의지였다.

거대한 교주 악선의 궁전, 대지보다 드넓은 지하 감옥에는 98종의 괴수들이 갇혀 있었다. 3층 건물을 칭칭 감고도 충분할 뱀종이며, 포악한 용종, 흉측한 순각종, 괴팍한 날개종. 그들과 대장군 ‘선’을 접을 붙이기에 1년은 충분하지 않았다. 5만 명을 더 지불해서라도 기간을 늘렸어야 했나. 후회하는 교주 악선이 감았던 눈을 떴다.

드디어 기다리던 오메가 ‘선’이 들려오고 있었다. 유리관을 바닥에 내려둔 신도들이 뒷걸음질을 쳐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거구의 몸을 이끌고 걸어간 교주 악선이 유리관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군신이라 불리울 자격이 있는 피조물이었다. 그 아름다움만큼 정신과 육체가 강인할지는 이제부터 실험해보면 알 것이다.

돌연 지하 감옥에 갇힌 98종의 괴수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의 짝짓기 상대가 온 사실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름끼치도록 음산한 우짖음이었다.

2. 8구역

선은 그대로였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 보석처럼 반짝이는 검은색 눈동자,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 붉은 피를 한데 모아 꾹 찍어 누른 것 같은 입술, 안으면 섬세한 근육들이 만져지는 늘씬하게 뻗은 몸. 모델조차 소화하기 힘들 새하얀 드레스 슈트를 제 옷처럼 꼭 맞게 갖춰 입은 선은 명화 속에서 튀어나온 아름다운 군신 같았다.

그는 1년 6개월 전 그대로였다.

딱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머리 모양이었다. 가위질로 듬성듬성하게 잘려 아무렇게나 귀와 이마를 덮어가며 기른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적당히 친 뒷머리와 자연스럽게 쓸어 넘긴 앞머리를 고정해 특유의 정갈함을 살린 스타일링이 눈길을 끌었다. 아니, 그는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홀리고 너무도 쉽게 상대의 호감을 샀다. 빌어먹게도 그는 여전히 그랬다.

“디?”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일행이 디를 불렀으나, 그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선, 대장군, 반역자, 오메가, 그리고 선생님이었던 그의 목소리만이 디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거듭 겹치는 우연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하죠.’

VIP만 드나들 수 있는 5성 호텔 바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디의 걸음을 방해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키도 덩치도 거대하다시피 커다란 그와 몸이 닿기도 전에 알아서 양쪽으로 쫙 갈라지는 사람들의 시선엔 경외가 서려 있었다.

디. 1년 전 무법지대였던 8구역을 장악해 끝내 제 발아래에 둔 8구역의 지배자.

형질자인 그는 빛과 무형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쓰는 이능력자였으며, 막대한 자금력과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 교활하고 비열한 자들의 천국인 8구역을 제 손안에 두었다. 동시에 그는 끔찍한 외모와 괴팍하고 잔인한 성격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8구역의 디. 1구역 사냥꾼들의 천적, 사냥꾼 잡아 헌터. 미치광이 살인마.

행여 불똥이라도 튈까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은 디의 목표는 정확했다. 화려한 불빛 아래서 동행과 술잔을 기울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름다운 나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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