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부르르 떨어대는 닥터 진의 가슴을 밟아 고정한 ‘선생님’이 기껏 닦은 단검을 다시금 목에 찔러 넣었다. 설골을 뚫고 들어간 칼날이 전척추근막과 전증인대를 끊고 후두신경을 관통해 나왔다. 서서히 잦아드는 닥터 진의 몸부림을 지켜보던 ‘선생님’의 손에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이윽고 뱀처럼 닥터 진의 시체를 감은 검은 안개가 사각사각, 긁는 소리를 내며 부피를 줄여갔다.
덩그러니 남았던 단검과 핏자국마저 집어 삼키고서야 완전히 부피를 줄인 검은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일련의 과정을 흥미 없는 눈길로 쳐다보던 ‘선생님’이 유리관을 들여다보았다.
“두 번이라니, 한 번도 고작이겠지.”
저 교활한 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뇌가 없는 해파리나 할 짓이었다.
“그 한 번이라도 제대로 소화해줄 텐가, 선?”
‘선생님’은 심지어 유리관엔 손도 대지 않았다. 몸에 닿기도 싫은 혐오스러운 물건을 보듯 유리관 속 대장군 ‘선’을 내려다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내 인내심도 이젠 바닥을 치고 있거든.”
은테 안경을 쓴 ‘선생님’의 얼굴이 유리관에 비쳤다. 예민하고 쌀쌀맞은 인상이었지만, 제법 준수한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고작해야 서른 남짓. 아니, ‘선생님’은 실제 마흔둘이었다.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유리관 속 대장군 ‘선’을 들여다본 ‘선생님’의 몸집이 줄어들고, 허리는 굽고, 피부엔 주름이 생겼다.
마침내 진짜 ‘선생님’이 된 ‘선생님’이 유리관을 뒤로 하고 무덤 속처럼 음산하고 고요한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중앙 회장. 상석에 앉은 ‘선생님’이 저 계단 아래 부복해 엎드린 대장군 ‘선’을 굽어보았다.
넓은 중앙 회장엔 먼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고, ‘선생님’의 양옆으로는 의관을 갖춘 중앙 의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참 말없이 대장군 ‘선’을 내려다본 ‘선생님’이 한숨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늙은 얼굴엔 피로감이 가득했다.
“대장군 ‘선’.”
“네, ‘선생님.’”
“이번 112산맥에서의 활약은 잘 전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시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서른 마리의 괴수를 물리치고 불타는 산맥을 진화해 우리 1구역 외곽 시민의 목숨을 보했다니, 치하가 마땅합니다.”
거의 엎드리다시피 부복한 대장군 ‘선’은 머리를 더욱 조아릴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쪽의 손실도 만만치 않습니다. 백인부대 54명이 모두 즉사했다고요.”
“모두 제 불찰입니다. ‘선생님.’”
“그대도 산맥에서의 일전으로 큰 부상을 입은 사실을 압니다. 하나, 백인부대 54명의 목숨을 허망하게 잃은 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군요.”
“일전에 저지른 죄를 사해 주시고, 복권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대장군 ‘디’에게 1년의 자택 근신을 명합니다.”
실제론 자택 구금과 같은 말이었다.
“선처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는 대장군 ‘선’의 머리 위로 중앙의원들과 남은 백인부대원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그들은 내심 ‘선생님’의 관대한 처사에 불만을 품기도, 안도하기도, 걱정스러워하기도 했다.
“대장군 ‘디’의 대행은 부대장 ‘삭’에게 맡깁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제 회의를 마치죠.”
‘선생님’의 한마디에 일제히 허리를 숙인 참석자들이 하나둘 회장을 빠져나갔다. 거기에 홀로 남은 대장군 ‘선’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채였다.
“선.”
“네, ‘선생님.’”
“고개를 들어봐요.”
천천히 고개를 드는 대장군 ‘선’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한 시간 내내 부복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덕분에 쾌차할 수 있었습니다.”
“일어나요, 선.”
온몸이 비명을 지를 텐데도 대장군 ‘선’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리로.”
상석을 내려온 ‘선생님’이 앞장서자 곧 대장군 ‘선’도 뒤를 따랐다. 회장을 지키고 선 중앙부대원이 따르려하자 손을 들어 제지한 ‘선생님’이 붉은색 휘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백인부대 54명의 죽음은 생각보다 손실이 큽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
“그런 말을 듣고자 ‘선’을 여기까지 불러들인 건 아니고요.”
자신의 처소에서도 가장 내밀한 장소인 침실까지 대장군 ‘선’을 들인 ‘선생님’이 차를 권했다.
“마셔요.”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대장군 ‘선’이 찻잔을 들어 입에 댔다.
“‘선’이 나를 죽이려 한 게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달그락, 입술을 축이기만 했을 뿐,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대장군 ‘선’이 찻잔을 내려놓자 작은 마찰음이 울렸다. 평소엔 소리 하나 내지 않았을 사람이 그러는 건 내심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보는 눈이 많아서 ‘선’을 내 마음대로 용서할 수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니, 내가 미안하죠. 내가 ‘선’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어요. 그런 중에도 1구역을 지켜낸 ‘선’에게 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선생님.”
“그렇기에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는 ‘선생님’의 허락에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한 대장군 ‘선’은 열 살 그 어린 시절의 ‘선’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깃는 눈엔, 한 점의 불순물도 없었다.
“산맥에 숨어 살던 이형자들을 전원 구출했다고요.”
“더 빨리 구해냈어야 했는데. 제가 부족해 대원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그 아이들은 무사히 1구역을 벗어나 10구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일종의 망명이었다. 형질, 능력, 나이, 성별, 지위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유토피아, 그곳에 사냥 당하는 아이들을 구출해 망명 보내는 것이 대장군 ‘선’의 실질적 임무였다.
“마지막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모두 ‘선’ 덕분이죠. 다만, 앞으로도 구해야 할 아이들이 넘쳐 나는데, 백인부대가 그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요, ‘선’. 이건 질책이 아닌 위로입니다. ‘선’에겐 둘도 없는 대원들이었잖아요.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빌어먹을 오메가 새끼. 엉덩이 쳐올려! 얼마나 자지를 처먹었으면 똥구멍이 흐물흐물, 씨발. 안 움직여? 자지 쳐 물고 존나게 흔들어대라고 이 걸레 새끼야!’
선생님의 우려와 달리 대장군 ‘선’과 백인부대원들의 관계는 그 정도가 다였다. 발정기에 매칭되는 파트너. 오메가에게 위력으로 눌린 알파 사냥꾼들.
“이번에도 그간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습니까?”
“네, 선생님.”
“병도 아니고, 뇌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해결책이 안 보이니 정말 큰 일입니다. 아니, 죄의식을 느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선’을 걱정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이번엔 나도 ‘선’을 속죄 주간에서 빼주는 것까진 해주지 못했습니다.”
“당장 쳐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하, ‘선’은 정말 여전하군요. 그러니 다음번에 또 나를 죽이려거든, 제발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해주세요.”
“‘선생님’….”
“농담이니까, 그렇게 우울해할 필요없어요. 앞으로 내가 ‘선’에게 부탁하게 될 일은 새 발의 피도 안되니까요.”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올곧고 반듯한 ‘선’의 시선을 마주한 ‘선생님’이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선’, 우린 지금 1구역을 수성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에요. ‘선’과 백인부대의 활약 덕분에 수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지만, 현재로선 그조차 여의치않게 됐고요.”
한숨을 쉰 ‘선생님’이 흔들림 없이 굳건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선’을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 1구역은 54명의 백인부대원과 대장군 ‘선’의 빈자리를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선생님’이 저를 향한 ‘선’의 신뢰의 눈빛을지지 삼아 말을 꺼냈다.
“7구역에서 제의가 왔습니다.”
“네, 선생님.”
“교주 악선이 1천 명의 아이들과 대장군 ‘선’의 교환을 요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