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1부 epilogue 1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난 선이 옷장을 열었다. 벽에 못이나 몇 개 박아 옷걸이랍시고 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디는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벽장 옆에 반듯하게 놓인 옷장엔 온통 검은 옷밖에 없었다. 누가 사냥꾼 아니랄까 봐. 피식 웃은 선이 그나마 수축 패치가 달린 옷을 꺼내 걸쳐 입었다. 그래도 살짝 크긴 했지만, 저번처럼 어른 옷 훔쳐 입은 것처럼은 안 보였다.
습관처럼 무기를 챙기고 방을 나서려던 선이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얼마 전까지 없던 문이 오른쪽 벽에 달려 있었다. 낮이면 틈틈이 돌아와서 쉬지도 않고 뭘 하나 했더니. 부엌으로 바로 연결되는 문을 만드느라 그렇게 바빴던 것이다.
‘그렇게 밖으로 나돌아다닐 거면 이 으리으리한 집은 뭐하러 지었는지 몰라. 냉장고에 욕탕까지.’
양이의 말에 선도 적극 동의했다.
하지만 두 달이라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을 지켜본 바 디는 물욕도 명예욕도 성욕도 없었다. 그 세 가지가 없는, 아니,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알파라니, 그게 원형 알파의 특성인지 디의 특성인지, 그도 아니면 잘도 감추고 있는 건지, 선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물욕과 명예욕은 그렇다 쳐도 성욕이 선행되지 않는 알파라니, 선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발정기 이후, 디는 약속대로 선에게 어떤 성적 접촉도 하지 않았다. 그 흔한 수음 한번 하지 않았으면, 은근슬쩍 선을 넘어 추근대지도 않았다. 정말 발정기에 제가 덮치지 않았다면, 혼자 그렇게 보냈을지도 몰랐다.
하긴, 7년이라 그러고 지냈다는데. 그래도 저 정도 오메가가 바로 옆에 있으면 발정기가 아니라도 눈이 뒤집히는 건 순간이었을 텐데. 속죄 주간 후유증으로 제 어디가 망가지기라도 했나. 산사나무 열매 열댓 개와 날개종의 알을 사용하고도 멀쩡해지지 못한 몸뚱이라니. 원형 알파를 성체로 만든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선은 내 오메가예요.’
그런 게 알파의 대표적인 소유욕이었다. 그러나 디의 그 발언은 소유욕보다는 다른 종류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마치 고백…같은.
‘목욕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부엌 쪽으로 새로 난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이 장지문을 열고 나섰다. 밝은 태양 빛이 마루를 비추고 있었다. 군화를 신다가 반질반질하게 닦인 마룻바닥을 내려다본 선이 가만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먼지 하나 없었다.
‘명예는 얼어 죽을, 당장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를 판국에.’
‘이 집도 혼자 뚝딱뚝딱, 냉장고도 어디서 버려진 걸 주워갔다더니 그것도 고쳐서 썼나 봐요.’
디가 애착을 준 흔적이었다. 애착은 희망이 있으면 자연스레 생기는 감정이었다.
폐허 그 자체였다는 이 땅에 혼자 집을 짓고, 욕탕을 만들고, 냉장고를 고쳐 쓰며 네가 마음 속에 들인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선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요.’
불현듯 햇볕이 따가워 눈살을 찌푸린 선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을 다시 잃는 고통보단 나아요.’
높고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선(㦏).’
‘선으로 할래요.’
이대로 여기에 눌러앉고 싶은 유혹에 지고 싶을 만큼 좋은 날이었다.
‘꼭 살아 주렴.’
다 내려놓고, ‘밤’의 바람처럼 그냥 살아도 되지 않을까.
마루에 앉아 정갈한 햇볕을 받으며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던 선이 픽 웃었다.
선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디가 ‘뫼’의 시신을 찾으러 떠난 지 열흘째, 선은 오늘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유혹을 잘라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기다릴 것이다.
문득 낮잠 자기 좋은 날씨라는 생각에 찌뿌둥한 몸을 길게 스트레칭한 선이 마당을 가로 질러 문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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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직, 백인부대 이동. 목표는 1구역 외곽, 북쪽 112 산맥. 지직- 백인부대 전원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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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전을 전달받은 보안대원이 제 뒤에서 길게 늘어져 있는 보안부대장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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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님, 상부 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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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긋하게 햇볕을 쬐던 부대장이 슬그머니 눈을 뜨며 대원의 뒷말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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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군 선을 회수하라는 ‘선생님’의 직속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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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씩 웃음 부대장이 괜스레 옷깃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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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날씨가 좋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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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돌아가기 딱 좋은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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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epilogue 2
‘거듭 겹치는 우연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하죠.’
꺼져가던 잿빛 눈에 불이 들어왔다. 아니, 불 보다는 어둠이었다.
‘나는 필연보다는 치밀한 계획을 믿는 사람입니다.’
썩은 동태 눈알처럼 백탁이 잔뜩 낀 눈에 검은색 불이 들어왔다.
‘죽었다.’
총구멍이 난 팔은 움직일 때마다 흐느적거렸다. 그러나 디는 피부 밖으로 밀려 나간 내장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바닥을 기었다.
‘누구일 것 같으냐.’
겨우 손 한 번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은 움직여주질 않았다.
‘뭐야? 이 역겨운 알파 새끼는.’
간신히 닿은 가방 속을 뒤지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디는 산사 나무 열매를 꺼내 제 배 속에 들이붓는 데 성공했다. 잘 깨어지지 않는 날개종의 알을 마침내 깨뜨려 전신에 쏟아부으며 디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저 처절한 흐느낌일 뿐이었다.
2부
1. 대장군 선
유리관 너머엔 대장군, ‘선생님’의 충실한 장난감이자, 닥터 진의 역작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10세부터 22세까지. 실험과 현장 실사를 거듭해 완성된 대장군 ‘선’은 복귀 한 달째 무의식중이었다.
대외적으론 산맥을 넘어 1구역을 침범한 12구역 괴수들을 죽음까지 불사하고 맞선 끝에 변경을 수성한 오메가 ‘선’의 죄를 면책하고 대장군으로 복권 시킨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현재 괴수들과의 일전에서 큰 부상을 입어 요양 중이라는 대장군 ‘선’은 1구역의 중앙, 비밀 요새나 다름없는 ‘선생님’의 처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비밀 연구소에 인형처럼 누운 채였다.
“아무리 제가 만들어낸 역작이라지만….”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다니던 닥터 진이 답지 않게 근신 어린 눈빛으로 유리관 너머를 쳐다보았다. 신이 존재한다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빚은 것 같은 유리관 너머의 오메가, 살아있는 군신과도 같은 대장군 ‘선’의 아름다운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보는 눈에서 끈질긴 집착과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유리관에 손을 댄 닥터 진이 대장군 ‘선’의 윤곽을 따라 더듬더듬 쓸어내렸다. 지금의 대장군 ‘선’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이 아니라 본인, 닥터 진이 만들어낸 예술품이었다. 본디 상처 입은 것이 더 아름다운 법. 닥터 진은 금이 갈 때마다 제 손으로 직접 기워내고 복원해낸 작품에 애착이 깊었다.
그래, 내 작품.
“그렇게 함부로 굴리다간 언젠가 망가지고 말 겁니다.”
“지금이라고 멀쩡하다 할 수 있나.”
집착과 소유욕이 번들거리는 닥터 진의 눈동자가 유리관에 고스란히 비쳤다. 뒤에서 그의 욕망과 그의 욕망이 반사 창처럼 투사된 대장군 ‘선’을 무심히 훑어본 ‘선생님’이 입매를 틀어 올렸다.
“얼마나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가?”
“세 번. 아니, 최대 두 번이 한계입니다.”
유리관을 더듬는 닥터 진의 떨리는 손은 제 작품이 소중해서 차마 만지기조차 어려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 작품이라. 주제도 모르는 잡놈의 새끼 같으니라고.
본디 주인의 몫을 탐내는 개새끼는 돌로 쳐 죽여야 마땅했다. 삶은 고기를 우리 대장군 ‘선’에게 하사하면 기뻐 눈물을 흘리며 씹어 삼키려나.
빙그레 웃는 ‘선생님’이 유리관 속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용법에 문제는 없나? 성능이 떨어질 위험은?”
“모든 걸 감안해 도달한 숫자입니다. 우리 대장군 ‘선’은 두 번이 한계입니다.”
“그래, 대장군도 은퇴할 때가 되었지.”
반색하며 돌아서는 닥터 진의 눈동자가 파충류처럼 번들거렸다.
“저에게 대장군 ‘선’의 껍데기를 하사하시겠다는 말씀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자네 설마, 하루빨리 저 껍데기가 갖고 싶어 내게 거짓을 고한 겐가?”
두 눈을 크게 뜬 닥터 진이 얼른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부정했다.
“‘선생님’ 아무리 저라도 생기 없는 껍데기보다는 살아있는 대장군 ‘선’을 보는 게 더 큰 기쁨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때론 산 것보다 죽은 게 더 큰 만족감을 줄 수도 있었다.
“애석하군.”
“그래도 4년은 더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끔 그리워질 걸세.”
“최대한 원형은 보존하는 방향으…로?”
눈을 부릅뜬 닥터 진이 “쿨럭!” 피를 토했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닥터 진의 눈동자에 경악이 서린 건 ‘선생님’이 그의 머리에 박아 넣은 단검을 뽑아 들었을 때였다.
“그간 고생이 많았네.”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뇌수 찌꺼기가 묻어나온 칼날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는 ‘선생님’이 빙그레 웃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지하기 쉽지.”
“컥! 쿨럭- 커흑!”
한마디 말도 못한 채 핏물만 울컥울컥 토해내는 닥터 진이 목석처럼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