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40)


#29화

“허억, 헉.”

마을 입구까지 쫓아온 백인부대원을 하나하나 모조리 처치한 디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역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총알이 빗겨 가거나 관통한 자리는 지혈제를 뿌려 막거나, 헝겊을 찢어 묶었다. 옆구리에 길게 난 자상엔 지혈제를 다 쏟아붓고도 피가 새어 나왔다. 20cm의 자상은 뒤처리하지 않으면 움직일 때마다 내장이 쏟아질 위험도 있었다.

마지막 하나를 처치한 뒤 가방을 뒤져 스테이플러를 꺼낸 디는 달칵, 달칵, 달칵, 열 번에 걸쳐 자상에 핀을 박아 넣었다. 하나씩 남은 산사 나무 열매와 날개종의 알은 비상용이었다. 만에 하나 선이 큰 부상을 입었다면, 두 개 정도는 있어야 안전할 것이다.

“헉.”

마을 입구를 가린 밤나무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산맥을 활활 태우는 불길도 입구 주변으로는 붉은 혓바닥을 내밀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 지나간 자리. 한기를 쏟아 낸 자리에 낀 살얼음과 그을림만이 발자국처럼 남았다.

선.

선.

나의 선.

은색 연검을 뽑아 든 선이 불길을 가르며 지나가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디가 처치한 백인부대는 고작 쉰넷에 불과했다. 남은 마흔여섯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선을 쫓고 있을지 몰랐다. 그 외의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선은 이 자연이 지배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밤나무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디가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세웠다. 고작 2초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조차도 낭비였다. 디는 강제로 개방된 마을 입구로 발을 내디뎠다. 마을 안쪽 입구를 지키고 선 버드나무는 여전히 넓게 뻗친 가지와 푸른 나뭇잎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나 버드나무 아래서 마을을 내려다본 디의 얼굴엔 핏기 한 점 없었다. 표정은 사라지고, 각진 턱 밑으로 근육이 팽팽하게 올라왔다.

마을은 폐허였다. 지금도 산맥을 활활 태우는 불이 침범한 흔적은 아니었다. 선과 침입자가 싸운 흔적. 아니, 일방적으로 도륙 낸 흔적.

선이 휘둘렀을 검이 지나간 자리를 훑는 디의 은빛 눈동자에 쩍쩍 붉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선.

무너진 집집마다 핏자국이 선연했다. 짐승의 피도, 괴수의 피도 아닌, 사람의 피였다. 마을 사람들. 언덕을 뛰어 내려간 디는 거의 숨을 쉬지 않았다. 무너진 울타리를 뛰어넘은 디는 내려앉은 지붕을 걷어 올리고 부서진 문짝을 치웠다.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32가구 어느 집에서도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보이지 않고, 집 구석구석 흩뿌려지고 웅덩이처럼 고인 핏물만이 그득했다.

사람들이 끌려간 흔적, 짐승처럼 베이고, 썰리고, 짓뭉개진 흔적 앞에서 디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머, 어머. 둘이 짝인가 봐!’

‘꺄, 너무 잘 어울린다!’

‘거봐, 내가 한 달 전부터 디한테서 페로몬 냄새가 난다고 했지? 피부도 뽀얘진 게 이상하다고 했잖아!’

‘어떡해, 어떡해! 둘이 발정기를 같이 보냈나 봐!’

‘그럼 새로 오신 분도 우성 오메가?’

‘이제 알았어? 냄새부터 다르잖아!’

‘자자, 다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디가 오랜만에 멀리까지 다녀온다니까 필요한 목록, 맡길 목록, 얼른 정리하고 챙겨서 가져오세요! 많이는 안 되고, 한 가구당 하나씩!’

디는 그들이 부탁한 물건들을 챙기긴커녕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이형자예요, 이능력자예요? 아님, 형질자?’

‘아저씨 아니구 형이래. 이제 열다섯 살이랬어.’

‘그치만 아저씨처럼 생겼는걸. 키도 크고, 몸은 괴수만 하고, 얼굴은, 얼굴은….’

‘거봐! 이렇게 잘라 놓으니까 얼마나 좋아! 아이구 신수가 다 훤하네!’

‘와아! 아저씨가 형아가 됐다!’

7구역 연구소에서 운 좋게 탈출한 디가 처음 자신의 의지로 정착한 곳이었다. 사냥꾼 면접에 통과해 변경에서 근무를 서게 됐고, 12구역과 1구역을 가른 산맥 초입에 집을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약탈자들에게 끌려가는 수인들을 맞닥뜨린 게 처음이었다. 디는 그들을 구하고 싶어서 약탈자들을 공격한 게 아니었다. 그저 복수심에 눈이 멀어 그들을 난도질했을 뿐이다. 선생님을 앗아 가고, 디를 납치해 7구역 연구소에 넘긴 약탈자들을 단 한 명도 살려놓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밤나무만 한 지네가 쫓아오는데! 엉엉엉! 엄마아, 엄마아- 디 오빠가 살려 줬어요! 엉엉엉!’

그때도.

‘디, 정말 고마워요. 디 아니었으면 우리 채아가 7구역까지 끌려가서 어떻게 됐을지.’

그때도.

디는 변경 사냥꾼의 의무라서, 약탈자들의 씨를 말리고 싶어서 괴수를 처치하고 약탈자들을 해치운 게 다였다.

결국, 매번 걸림돌이 되는 그들이 성가셔서 12구역에 들어가 전신이 새하얀 순록이 떨어뜨리고 간 뿔 조각을 주워 왔다. 공간을 분리할 수 있는 도구였다.

‘디! 정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디가 우리 모두를 살린 거예요!’

‘오빠, 오빠! 이제 여기선 마음껏 뛰놀 수 있어요?’

‘형아도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돼요? 같이 살아요~, 우리 여기서 같이 살아요!’

불현듯 정신을 차린 디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점점 빨라진 걸음이 멈춘 곳은 역시 볼품없이 무너진 대장간이었다.

‘일주일을 그렇게 버티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을 떼던 대장장이 정이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몸만 망가지나? 언젠간 머리도 고장 날 텐데, 정말 어쩌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려?’

마을엔 이형자도, 이능력자도, 형질자도 있었다. 형질자이자 오메가인 놀의 도움을 받으라는 권유였다.

‘열성이라서 그래? 자넬 성체로 만들어 줄 순 없지만, 발정기 동안의 그 끔찍한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잖나. 놀이 싫은 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소중한 사람이 있어요.’

‘당장 발정기에 미친 사람처럼 날뛰면서 비명을 지르는 놈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찾을 거예요.’

‘디!’

‘난 꼭 찾을 거예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렴.

‘날 꼭 찾으러 온다고 했어요.’

널 꼭 찾으러 올게.

디.

마이 디어.

나를 꼭 기다려 줘.

‘꼭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나는 너에게 꼭 돌아올 거야.

‘나에게 꼭 돌아온다고.’

‘디!’

‘선생님이 나를 찾지 못한다면, 내가 찾으면 돼요.’

먼저 기다리지 못한 건 나니까, 내가 찾으러 가면 돼.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 디가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대장간을 파내고, 기둥을 들어내고 지붕을 정신없이 뜯어내다 덜컥 멈추었다.

푸른 하늘빛의 비누 냄새가 났다. 무너진 기둥 아래 잔뜩 고인 웅덩이에서 선의 냄새가 났다. 조각난 얼음처럼 표정이 깨진 디가 미친 듯이 기둥 아래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디의 손끝에 걸려 끌려 나온 건 젖은 옷가지였다. 선이 제 옷처럼 입고 다니던 디의 평상복이자 제복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색 옷감이 벌게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피였다.

선.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디의 목구멍에서 쉰 소리가 났다.

아니야. 아닐 것이다.

선은 자연이 지배한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불과 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지난 10년간 1구역을 지킨 장군이었으며, 누구에게도 패배한 적 없는 전쟁의 화신이었다.

고작, 고작 이 약탈자 몇에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동시에 선은 이제 막 병석을 털고 일어난 사람이었다. 혼자가 아닌 그에겐, 디가 맡긴 마을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그에겐, 그들의 존재가 짐이고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혼자 달아나지 않고 마지막 한 명까지 지켜 가며 싸웠을 것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창고에 남아 있던 디를 구하러 뛰어들었을 때처럼.

선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지 못한 디는 뒤에서 밀려드는 인기척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퍽- 누군가 휘두른 총신에 머리를 맞은 디가 바닥을 뒹굴었다.

철퍼덕-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은 디의 뇌수로 선의 페로몬이 흠뻑 흘러들었다.

“허억, 헉. 큭!”

가슴을 움켜쥔 디가 발작 증세를 보였다. 숨을 쉬지 못하고 컥컥대는 디의 커다란 덩치를 발로 걷어찬 누군가 총을 겨눴다.

“살려는 둬. …님께서 보자신다.”

“이 씹새끼가 우리 대원 쉰넷을 도륙 냈습니다. 살려도 곱게는 못 둡니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씹어 뱉은 창이 철컥,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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