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불길을 발견한 선은 곧장 마을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다. 디의 선생님은.
본인의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사람들을 구출한 뒤에 마지막에 빠져나올 사람이었다. 그럴 능력 또한 충분했다. 선은 무사할 것이다. 굳은 믿음을 삼킨 디가 불타는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려는 찰나였다.
챙-!
뭉툭한 검을 휘둘러 뒤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쳐 낸 디가 연달아 검을 그었다. 디에게 총을 쏜 상대가 몸을 틀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디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총을 꺼내 상대를 겨누었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간 총알이 상대의 심장을 관통해 지나갔다.
복장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백인부대. 순간 머리가 쭈뼛 선 디는 입술을 깨물며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이번 돌파 역시 다른 놈들의 방해에 가로막혔다.
“버러지 같은 변경 부대 새끼. 네 눈은 멋으로 달렸느냐? 꽁지 빠지게 달아나기나 할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알짱거리느냐? 안 꺼지고 뭘 멀뚱거리고 서 있어? 내 손으로 직접 구워 주랴?”
“대장님! 화오가 당했습니다!”
뒤에서 날아온 목소리에 상황을 알아차린 대장이 돌변했다. 이죽거리면서도 같은 사냥꾼으로서 최소한의 도의를 지키던 대장은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디를 쏘아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엔 악의와 살의뿐이었다.
“네 놈이 산 채로 내장을 갈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그 버러지 새끼구나. 반푼이 알파 디.”
디는 대꾸도 하지 않고 먼저 달려들었다. 이들과 실랑이할 시간 따윈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선을 찾아야 했다. 이들보다 먼저, ‘선생님’보다 먼저, 선을 찾아야 했다.
“큿!”
디의 움직임을 읽은 대장이 입매를 틀며 대응하려 했으나 번개같이 뻗어 나간 단검이 먼저 대장의 목울대를 뚫고 지나갔다. 제가 죽은 줄도 모른 채 죽어 버린 대장의 시체가 쓰러지기도 전에 한꺼번에 달려든 백인부대원은 총합 열둘이었다.
붉은 재와 검은 연기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나부꼈다.
“죽어라!”
일제히 달려든 백인부대원들의 살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부대원과 대장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걸 지켜본 그들이 살의를 내뿜는 건 당연했으나, 디를 향해 쏟아붓는 욕설엔 처절한 원망마저 담겨 있었다.
“너 때문에!”
“겨우 너 같은 버러지 때문에 우리 장군님이!”
저 잘난 백인부대원들에게 다른 이는 모두 버러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평생을 들어 온 이름과 같은 저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디가 등에 건 기관총을 꺼내 사방에 갈겼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달려들던 백인부대원들은 깨진 유리처럼 흩어졌다가 그대로 디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단검 세 개가 날아가 셋의 목을 꿰뚫고, 빠르고 정확하게 허공을 그은 검이 둘의 가슴과 오른팔을 잘랐다.
“크아악!”
“크흑!”
죽는 순간에도 디에게 겨눈 총과 칼을 놓지 않은 백인부대의 끈질김에 디 역시 가볍지 않은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디에게 있어 이깟 통증은 친구와 같았다. 팔이 잘린 오른쪽 어깨에서 피를 내뿜으며 몸부림치는 대원의 심장에 마체테를 박아 넣은 디가 곧바로 휙- 몸을 날렸다.
흥분을 가라앉힌 일곱 명의 백인부대원은 디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간격을 좀 더 벌렸다. 바닥에 꽂혀야 할 단검이 일곱 중 하나의 대동맥활에 꽂혀 목숨을 앗아가자, 눈을 부릅뜬 대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꽉 틀어쥐었다.
“변경 14 부대장 디. 백인부대를 공격하는 건 반역과 같다. 이를 알고 있나?”
“변경 대원을 공격하는 것도 반역과 같지. 저놈한테 날 공격한 이유를 먼저 묻는 게 어때?”
맨 처음 죽어 나자빠진 대원의 시체는 벌써 불길에 휩싸여 형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디의 비아냥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대원 하나가 힐긋 주변을 살폈다. 지원군이 있을 것이다. 백인부대는 결코 팀 단위로 쪼개져 다니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들도 아직 선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선생님’의 방패이자 창이라 불리는 백인부대가 볼품없는 외곽까지 올 이유는 대장군이었던 선밖에 없고, 이렇게 쪼개져 다니는 건 목표물을 제거하거나 선점하지 못했다는 방증이었다.
“장군님을 어디다 숨겼나?”
“네놈들의 장군님은 붉은 광장에서 죽었을 텐데.”
뿌득. 이를 가는 소리에도 디는 코웃음 한 번 치지 않았다. 도리어 도발을 서슴지 않았다.
“아, 네놈들이 함께한 속죄 주간 영상이 풀린 순간인가?”
“이 쳐 죽일 놈이!”
디의 도발은 효과적이었다. 지원군을 기다릴 인내심이 바닥난 대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잘된 일이었다. 후에라도 디는 백인부대 소속이라면 한 놈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물론 편안한 죽음을 선물할 용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을 먼저 찾아야 했다.
선. 나의 선.
여섯을 베고 찌르고 관통해 사지를 짐승처럼 갈라 놓은 디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확인 사살을 한 뒤, 곧장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화마가 기승을 부렸다. 바람과 뱀종의 알을 사용해 불길을 뚫고 들어가는 족족 마주치기 시작한 백인부대와의 일전이 계속됐다. 백인부대의 사망자가 늘수록 디의 상처도 늘어갔다. 산사 나무 열매를 깨 제 머리 위에 부은 디가 회색 눈을 깜박거렸다.
‘선생님, 왜 들어오셨어요, 왜!’
크게 원망하며 울음을 터트린 디를 꼭 안아 준 선생님은 괴수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용종이 뿜어낸 불에 그슬려 엉망이었다. 디가 열 살이 되던 해였다.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두 번째 발작을 일으킨 선생님이 앓고 일어난 지 딱 하루 만에 들이닥친 괴수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움막을 짓밟으며 근방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마을에서 제일 큰 아이였던 디는 창고에 숨어 오들오들 떨던 아이들을 대피시킨 뒤, 마지막으로 나가려다 무너진 지붕에 길이 막혀 꼼짝도 못 하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지만, 그러기 싫어. 선생님과 함께 있고 싶어.
울음을 참고 무너진 기둥 틈으로 달려들려는 찰나, 커다랗게 타오르던 불길이 양쪽으로 쫙 갈라지며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저를 구하러 온 선생님을 본 순간 디는 만감이 교차했다. 연이어 커다란 안도와 함께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기쁜데 싫었고, 살아서 좋은데, 전신이 그을리고 피투성이가 된 선생님이 안타까워 절로 울음이 터졌다.
‘어엉-’
목놓아 우는 디를 끌어안은 채 어쩔 줄 모르던 선생님이 난처한 얼굴로 쩔쩔매며 속삭였다.
‘울지 마라, 디야. 울지 마, 응? 선생님이 왔잖아.’
‘이렇게 잔뜩 다쳐 놓고선 그게 자랑이에요? 선생님은 강하다면서요! 괴수 몇 마리가 쳐들어와도 상처 하나 안 입고 해치울 수 있다면서요!’
‘어…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어어엉!’
‘그래,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말이다, 디. 나는 다친 데가 없어. 이건 내 피가 아니고, 이것도 그냥 그을린 거야. 이렇게, 이렇게 네가 한 번만 꼭 나를 안아 주면, 봐- 싹 없어지지?’
‘그래도 선생님… 다음부턴 이러지 마세요.’
‘그건 싫은데. 선생님도 디랑 오래오래 있고 싶은데.’
‘달래려고 거짓말하시는 거 다 알아요.’
‘선생님은 우리 디가 이럴 때마다 새삼 내가 인생 참 잘못 살았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요.’
‘그래도 계속해 주세요.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선생님.’
‘하하, 거짓말 아니래도 그러네, 정말.’
그을림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피투성이인 선생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선생님의 주변에서부터 불길이 확 꺼졌다. 불과 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그의 웃음소리가 성난 불을 꺼뜨리고, 검은 연기를 흩뜨린 것만 같았다.
붉은 석양 아래 선 선생님이 문득 눈이 부셨다. 디는 눈을 깜박이는 대신 핏물로 흠뻑 젖은 선생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디도 키가 훌쩍 커 머리가 선생님의 가슴까지 닿았다.
‘어, 어? 이러면 너 얼굴에 피 묻는데?’
‘…….’
‘디야. 우니? 울어? 선생님이 또 잘못했어?’
‘…….’
‘아이구, 이 어리광쟁이. 선생님 없을 땐 누가 이 어리광을 다 받아 줬을까 몰라.’
나직이 속삭이며 디를 안아 든 선생님에게선 피 냄새가 아닌 깨끗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
아무도 없었다구요.
디는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선생님에게 얌전히 안긴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바보 선생님.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