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선생님! 괜찮아요? 이제 정신이 들어요? 안 아파요? 살았어요?’
‘쿨럭, 쿨럭! 네 녀석 덕분에 황천길에 가려다가도 돌아오게 생겼다. 그동안 잘 먹더니 무게가 10kg은 는 것 같구나.’
제 가슴 위에서 방방 뛰는 디를 안아다 옆에 앉힌 선생님이 창백한 얼굴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밖이 어둡고 조용한 걸 보아 밤중인 것 같았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눈살을 찌푸린 선생님은 제 옆에서 ‘선생님 저 많이 큰 것 같아요? 선생님을 지켜 줄 수 있을 만큼요?’ 조잘거리는 디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며칠이나 지났니?’
‘이틀이요!’
‘…이틀?’
‘네, 선생님! 오늘이 두 번째 밤이에요!’
‘…….’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생각에 잠겼던 선생님이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꼬르륵- 이틀 내내 제 옆에만 붙어 있느라 밥도 굶은 모양인지 디의 배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덩달아 제 상태를 실핀 선생님은 의문스러웠다.
나흘이 지난 것도 아닌데, 제 몸 상태가 안정되었다. 열도 떨어지고, 냉기도 멀찌감치 달아났다.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저 역시 기력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옷매무새를 다듬은 선생님이 디를 챙겨 안았다. 선생님이 마을에서 지낸 지 반년 째. 처음 왔을 때보다 무거워졌다지만, 아홉 살 디는 20kg를 겨우 웃도는 정도였다.
‘그런데 왜 네가 여기 있어?’
‘선생님 옆에 있고 싶어서요.’
‘나흘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어른들한테 못 들었니?’
‘들었어요.’
‘들었는데도 옆에 있었다고?’
‘선생님 아픈데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요.’
‘…….’
‘저는 그러면 더 아팠거든요.’
움막을 헤치고 나간 선생님이 식량을 모아 두는 창고로 향했다. 밤바람이 서늘해 소름이 돋을 법한데도 따끈따끈한 디를 안고 있자니, 그 서늘함조차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디가 아플 때마다 곁에 아무도 없었니?’
‘있었을 때도 있고, 없었을 때도 있고…. 선생님, 여기 고구마가 있어요!’
어느새 선생님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린 디가 창고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한 고구마 포대를 발견했다. 제 키보다 더 큰 포대 속에 머리를 처박고 실한 고구마만 열댓 개 골라낸 디가 뿌듯한 얼굴로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이거면 충분할 거예요!’
천진한 목소리와 얼굴에 선생님은 그만 저항 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다음부턴 오지 마, 알았지?’
창고 한쪽에 나란히 쪼그려 앉은 선생님이 익힌 고구마 하나를 건네주었다.
‘선생님이 아플 때는 사람을 잘 못 알아봐. 그래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고… 덜 익었니?’
열심히 고구마 껍질을 까다가 선생님을 빤히 올려다본 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다 안 익었지? 선생님이 이런 건 처음 해 봐서.’
머쓱한 얼굴로 고구마를 가져간 선생님의 손에서 화르륵 불이 올랐다. 다시 봐도 신기한 장면에 눈을 반짝인 디가 물었다.
‘만져 봐도 돼요?’
‘잠깐만.’
빙그레 웃은 선생님이 뭘 했는지 붉은색 불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이제 만져도 된다는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서야 손을 뻗은 디의 얼굴이 환해졌다. 덜 익은 고구마를 까느라 입술이고 뺨이고 검댕이 덕지덕지 묻었는데도 말갛기만 했다.
‘선생님이 이렇게 고구마 구워 줬다고 다른 애들한테 말해도 돼요?’
‘다음에 또 선생님이 아플 때 얼씬도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
‘그럼 말 안 할래요.’
히죽 웃은 디가 어느새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구마를 받아 들어 호호 불었다.
‘너 먼저 먹어 이 녀석아.’
‘선생님 드리려고 깐 거예요.’
먼저 드시지 않으면 저도 절대 먹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에 두 손을 든 선생님이 빈틈없이 잘 까진 노란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됐지?’
‘…….’
‘다른 것도 얼른 구워 놓을 테니까 어서 먹어.’
제 입에 침이 고인 것도 모르고 선생님이 베어 먹은 고구마를 멍하니 쳐다보던 디는 그제야 마른침을 삼키며 얼른 고구마를 받아 들었다.
‘여긴 자연이랑 가까워서 그런지 작물들이 다 싱싱하고 알이 꽉 차 있더구나.’
제법 익숙해진 선생님이 고구마 열 개를 화르륵 구워 내기 무섭게 다섯 개를 호로록 게 눈 감추듯이 해치운 디가 손도 안 댄 선생님의 고구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고구마 깔 줄 모르세요?’
‘알지, 아는데….’
‘선생님도 모르는 게 있구나. 제가 까 줄게요!’
제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고구마 껍질을 까기 시작한 디의 얼굴이 너무 신나 보여서 입을 다문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예상대로 열 개로는 어림도 없어서 포대에서 고구마 열 개를 더 꺼내 왔다. 선생님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수욱 날아와 그 앞에 동그랗게 쌓이는 고구마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던 디가 그새 깨끗하게 깐 고구마를 내밀었다.
‘저도 나중에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
‘우리 디는 배울 게 아직 많아서 좋겠다.’
‘네, 그러면 선생님하고 더 오래오래 있을 수 있잖아요.’
‘하… 똑똑한 녀석.’
커다란 칭찬을 받은 것처럼 환하게 웃는 디의 뺨을 닦아 주는 척, 검댕을 더 묻힌 선생님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선생님이 널 다치게 하진 않았고?’
‘네, 선생님 엄청 아파하다가 제가 안아 주니까 괜찮아졌어요.’
‘…정말?’
‘네, 선생님이 추워하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은 게 너무 기뻐서 쳐다보다가 잠들었나 봐요.’
‘신기한 일이네. 선생님 아픈 걸 고쳐 준 사람은 여태 한 명도 없었는데.’
발작이 시작된 선생님의 곁에서 다치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
이 꼬맹이가 정말 원형 알파려나….
여러 번에 걸친 실험으로 감각 기관이 망가진 선생님은 본인의 형질 파악 능력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 정도의 발작을 가라앉혀 주는 건 타고난 원형에 우성 알파만이 가능했다.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도 못하는 얼굴로 열심히 고구마를 까던 디가 고개를 들며 방긋 웃었다.
‘앞으로는 제가 맨날맨날 있어 줄게요.’
제법 듬직하게 말하는 디의 검댕 투성이 얼굴을 쳐다본 선생님이 풋 웃으며 답했다.
‘그래, 오늘은 왜 오래오래 같이 살자는 말을 한 번만 하나 했다.’
‘그러니까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하하하.’
결국 크게 터져 나온 웃음이 넓은 창고 밖으로 새어 나갔으나, 깊은 밤 그 소리를 훔쳐 들은 건 하늘과 별과 달이 다였다.
* * *
산맥이 불타고 있었다. 길이 험해지면서 되려 방해가 된 구형 지프차를 버리고 달리기 시작한 디는 거대한 화마의 불길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정 주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정을 주고 만 산과 숲이, 선생님을 생각하며 애써 지어 올린 집이, 모른 척하려 했지만 끝내 발길을 둘 수밖에 없던 마을이. 사나운 불길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선.
이를 악문 디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불길에 뛰어든 건 디 하나만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약탈자들이 쾌재를 부르며 구형 바이크나 산악 차를 끌고 달려들었다.
“오메가 선을 포획할 기회다! 시체라도 좋다! 불에 타 죽었든, 질식해 죽었든, 오메가 선의 발가락 하나라도 가져오는 놈에겐 교주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와아아-”
앞만 보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놈들을 휙휙 지나쳐 간 디의 은빛 눈동자 역시 불길에 잡아먹힌 채였다. 이 정도 불길이라면 산맥을 터전으로 한 것들은 모두 이미 도망쳤거나, 죽었을 것이다.
선. 선이라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피신하지 않았을까. 그는 현명하고 책임감이 깊은 사람이니까, 본인이 지키기로 한 상대를 두고 혼자 달아나진 않았을 것이다.
저에게로 달려드는 불길을 바람으로 쳐 내며 달려 나간 디의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선이라도 불길을 늦게 알아차렸다면 마을 사람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진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혼자 달아났다면. 그러나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디가 가장 잘 알았다.
마을을 소개한 건 조금이라도 정을 붙였으면 해서였는데. 생각보다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니까, 제가 없는 동안 덜 외로웠으면 해서. 마을은 제가 설치한 장치만으로도 안전하니까. 그래서 그런 건데.
디는 때늦은 후회를 억지로 떨쳐 내며 마을 입구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