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테이블이나 바닥, 협탁 따위 등에 올려져 있던 자그마한 전자기기에서 비상음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헤롱거리던 약탈자들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여기저기서 약병을 찾아 목구멍에 붓기 시작했다. 1초의 시간을 맞은 디가 번개처럼 움직이려는데 지직- 라디오음이 울렸다.
- 백인부대 이동. 목표는 1구역 외곽, 북쪽 112 산맥. 백인부대 전원 이동. 지직. 백인부대 이동. 목표는 1구역 이곽, 북쪽 112 산맥. 백인부대 전원 이동. 지직.
1구역 외곽, 북쪽 112 산맥은 디의 구역이었다. 열흘 전 ‘뫼’를 찾기 위해 선을 두고 떠나온 곳이었다. 그곳으로 백인부대 전원이 이동한다는 정보가 머리에 입력되기 전에 디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2층 테라스에서 뛰어내린 디는 그대로 달려 담을 뛰어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외곽 쓰레기장까진 달려서 10분 거리였다. 금 하나를 문지기에게 튕기듯 던져 가림막을 치우고 구형 지프차에 올라탔다.
백인부대 이동. 목표는 1구역 외곽, 북쪽 112 산맥. 백인부대 전원 이동.
이를 악문 디가 기어를 바꾸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부아앙- 굉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한 구형 지프차의 뒤로 흙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계기판이 몸살을 앓으며 최고 속도를 넘겼다.
외곽 바깥의 마을엔 중앙에서 모아 온 쓰레기를 처리하는 소각장이 있었다. 암시장을 의미하는 쓰레기장이 아닌, 진짜 쓰레기를 처리하는 소각장이었다. 그날도 아홉 살 디는 소각장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아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옮겨 다니고 있었다. 마침내 토스터라고 불리는 기계를 찾아낸 디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쪼르르 쓰레기장을 빠져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 디가 살고 있는 외곽 마을이 있었다. 어른 다섯에 아이 스무 명이 허름한 천막을 가벽 삼아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었다. 거기서 10m쯤 떨어진 곳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움막이 선생님의 집이었다. 괴수에게 몰살당할 뻔한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준 선생님은 마침 저도 갈 곳이 없다며, 같이 살자는 마을 사람들의 제안을 수용했다.
‘선생님은요?’
‘쉿. 선생님께선 아프시단다.’
항상 마을 입구 버드나무 아래 앉아 볕을 쬐던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선생님의 거처로 향하려는 디를 붙잡아 안은 건 마을 이장 격인 소영이었다.
‘얼마나요?’
‘글쎄… 잘 모르겠구나.’
마침 선생님의 움막에서 나온 명록이 젖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큰일이야. 열은 펄펄 끓는데, 몸에서는 한기가 풀풀 새어 나와. 주변으로는 살얼음이 끼고. 당최 무슨 병인지 짐작도 가지 않아.’
‘형질자에다 이능력자여서일까?’
‘모르지. 나 같은 약초꾼이 알아야 얼마나 알겠어. 중앙에 있는 의사들한테 보이면 또 모를까.’
‘불러도 될까? 내력이 심상찮아 보이는데. 어린 나이에 실력도 그렇고,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거 보면.’
‘사정도 보통 사정이 아니겠지.’
선생님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을 때 먼저 마을에 남아 달라 청한 건 이쪽이었지만, 어렴풋한 불안이 사라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천상의 외모에 명민한 눈빛, 온화한 눈동자, 괴수 서넛을 깔끔하게 해치우는 전투력까지 갖춘 선생님은 마을엔 꼭 필요한 존재였으나, 그만큼 이질적이기도 했다.
‘저렇게 혼자 놔둬도 될는지.’
‘주위를 물리라고 한 건 선생님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흘은 움막 주변에 얼씬도 말라더군.’
‘걱정이네….’
근심 어린 얼굴로 홀로 동떨어진 움막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눈 그들은 어느새 디의 존재를 잊은 채였다. 심각하게 대화하는 둘을 올려다본 디는 ‘아픈 사람을 왜 혼자 둬요?’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저들이 다시 저에게 관심을 주었다간 선생님을 몰래 들여다볼 기회조차 사라질 것 같았다.
뒤로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친 디가 작은 몸집을 더 웅크려 나무에 천을 덧댄 울타리를 크게 돌았다. 그리고 항아리 뒤에 숨어 소영과 명록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그들이 모습을 감췄을 때 디는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선생님의 움막에 숨어들었다. 실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움직임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소영과 명록을 통해 선생님의 당부가 전해진 것이다.
‘으음, 흐… 헉. 크읏.’
좁고 소박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움막 안 이부자리에 선생님이 누워 있었다. 명록의 말처럼 뜨거운 열에 시달리며 신음을 흘리는데 이불 밖으로는 살얼음이 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선생님을 멍하니 쳐다보던 디가 곧 정신을 차렸다. 명록이 놓고 간 세숫물에 마른 수건을 적신 작은 손이 물을 꼬옥 짜내고 선생님의 이마에 올렸다.
‘크흐읏.’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에 움찔한 디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내 끔찍한 오한으로 덜덜덜 떨기 시작하는 선생님을 바라보다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젖은 손으로 선생님의 창백한 뺨을 만지려다 아차 싶은 얼굴로 물기를 닦아 냈다. 마침내 디의 손바닥에 닿은 선생님의 뺨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선생님, 선생님.’
‘흐으읏. 큿.’
선생님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다 못해 전신을 뒤틀었다. 움막 주변에선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나 아픈 사람을 혼자 둘 생각인가 보다. 그러기 싫었던 디는비장한 얼굴로 이부자리에 올랐다.
작고 투박한 손으로 뒤틀린 팔을 주무르고, 퍼드득- 튀어 오르는 다리를 주물렀다. 디의 작은 손이 파고들 틈도 없을 만큼 팽팽해진 근육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뒤틀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럴수록 선생님의 내부에선 열이 절절 끓었고, 얼음장인 피부에서 배어 나온 한기가 쩌억, 쩍, 주변을 얼어붙게 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옮겨 가며 작은 손으로 선생님의 곳곳을 주무르던 디가 반색했다.
‘선생님!’
제 손목을 꽉 붙잡은 악력에 놀라기보다 선생님이 눈을 뜬 게 반가운 디는 회색 눈을 빛내며 들썩거렸다. 불에 지져지고 냉기에 얼어붙는 양극단의 고통에 시달리던 선생님이 디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움켜쥐다가 멈칫했다. ‘선생님!’ 한여름의 청포도 향이 밀려드는가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선생님의 이성을 어루만지듯 깨워 주었다. 이윽고 디를 움켜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디?’
‘선생님!’
상기된 목소리가 연신 선생님의 귓가를 부드럽게 휩쓸고 지나갔다.
‘큿!’
그러나 잠시나마 맑아졌던 정신이 다시 소용돌이에 휩쓸리며 선생님은 의식을 잃었다.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선생님이 눈에 띄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선생님, 추워요?’
‘흐읏, 흑. 크윽!’
금세 몸을 뒤틀며 발작하는 선생님의 실눈 새로 동공이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디가 두 손으로 선생님을 꽉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디가 온 힘을 다해 선생님을 끌어안자 가라앉는 듯하던 발작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큭, 큿! 크으…!’
‘아프지 마요. 아프지 마세요, 선생님….’
간절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동안 혀를 깨물고 사지를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던 선생님이 어느 순간부터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드는 옅은 청포도 향이 불길을 잠재우고, 따끈한 체온이 북풍한설 같은 한기를 조금씩 조금씩 물리쳐 주었다.
‘흣.’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선생님은 가슴이 묵직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들었다.
‘……디?’
아예 선생님 위에 엎어져 코를 골며 자던 디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선…생님?’
‘디? 디가 맞니? 왜 네가…! 흣!’
정말 제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게 디라는 걸 확인한 선생님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다 신음을 토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디도 눈을 번쩍 뜨고 선생님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