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오늘도 같은 시간에 외출하네요.”
일하러 간 건지, 딴짓하러 간 건지. 갑자기 모습을 감춘 디가 열흘째 보이지 않았다.
“계곡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따라붙을까요?”
“나대지 말고 있어. 상부 지시가 곧 내려올 거야.”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선을 뚫어져라 쳐다본 보안부대장이 곧 흥미가 떨어진 얼굴로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낮잠 자기 좋은 날씨였다.
“잘 나왔지? 내가 만든 애 중에서도 최상급이구만?”
열흘 만에 제련을 마친 정이는 마을 입구 앞에서 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같이 찾아와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정이의 상기된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선은 연검이 완성됐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볍네요.”
“가볍기만 해? 여길 누르면 레이저로도 자르지 못하게 단단해지고, 팔이든 어디든 착착 감겨들고, 바위를 자를 때도 깃털 같으며, 주위에 따라 색이 변하기도 하지.”
“암살하기 딱 좋은 검이네요.”
“그렇지, 그렇지. 암살하기 딱 좋은…!”
흥미로운 얼굴로 연검을 유심히 살펴본 선은 가볍게 허공을 그어 보더니 싱긋 웃었다.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그런 흰소리를. 딱 봐도 자네 거구만. 주인 잘 찾아간 거지.”
“하핫. 디가 기뻐하겠네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을 올려다보는 선의 옆모습을 힐긋 훔쳐본 정이가 은근슬쩍 물었다.
“자네는 기쁘지 않고?”
“…….”
잠시 침묵한 선은 그럴 리가 있느냐며 환히 웃었다.
“무척 기쁩니다.”
“큼큼. 지, 진짜, 암살할 때 쓸 건 아니지?”
“그럼요. 암살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스르륵 오른팔과 옷감을 조이며 무늬처럼 감겨든 연검을 내려다본 선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수령 나무 아래서 바람을 맞고 있던 선이 눈을 뜨자 언덕 밑에서 뛰어 올라오는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이 보였다. 저는 선생님이 아니고 선이라고 백 번을 말해 봐야 백 번 다 듣지 않는 아이들을 설득하기 포기한 선이 평상에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오늘은 언제 가세요?”
“선생님! 오늘은 뭐 해요?”
“선생님! 오늘은 글자 놀이해요!”
“아니야! 오늘은 이야기 듣는 날이야!”
“이야기도 듣고 글자 놀이도 하면 되지!”
“선생님! 밤이에요! 엄마가 쪄 주셨어요!”
“나는 옥수수 가져왔어요!”
“나는 고구마!”
“밤부터 먹어요! 밤이요!”
제 주위에 몰려들어 어린 새처럼 짹짹거리는 아이들 등쌀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선이 손가락 하나를 뻗어 평상 옆 공터를 가리켰다.
“선착순.”
듣기 좋은 목소리가 소란을 가르자, 몰려들었던 아이들이 우르르 흩어져 일렬로 쭉 늘어서기 시작했다. 그 빠릿빠릿하면서도 어딘가 어리숙한 모습에 슬그머니 나오려는 웃음을 삼킨 선이 짐짓 근엄한 얼굴로 맨 앞에 선 아이를 바라보았다. 오메가 형질을 가진 토끼 수인이었다.
“채아가 1등!”
“와아-! 선생님! 우리 숨바꼭질해요!”
팔짝팔짝 뛰며 외치는 채아의 축 처진 토끼 귀가 붕붕 널뛰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숨바꼭질 먼저. 술래는?”
일부러 뜸을 들이는 선에게로 긴장한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모였다. 다섯 살부터 열세 살까지.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마을 밖을 나간 적 없어 유독 더 해맑고 사람을 좋아했다. 마을 사람 중 그 누구보다 선에게 마음을 활짝 연 것도 이 아이들이었다.
“술래를 원하는 친구가 있었다면 미안하지만, 오늘은 선생님이 먼저 술래.”
당연히 아무도 술래를 하고 싶지 않았던 아이들이 꺄르르 웃으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옥구슬처럼 흩어지는 아이들을 보며 절로 웃음을 지은 선이 평상에 두 손을 짚고 나른히 기대 앉았다. 선생님 행세깨나 하고 다녔다더니. 아이들 다루는 게 어렵지 않은 걸로 보아 디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었니?”
“아니이요~!”
“셋, 둘, 하나.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었니?”
“네에~!”
고작 1m 안팎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른 척 일어선 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령 나무 뒤에 셋, 개살구나무 뒤에 둘, 산딸기 덩굴 뒤에 셋. 기척만으로도 주변에 옹기종기 숨은 아이들을 찾아낸 선이 아예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선생님!”
수풀 뒤에 숨어서 저들끼리 킥킥거리며 즐거워하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우르르 달려 나왔다. 머리를 짚는가 하던 선이 비틀거리다 쿵, 쓰러진 탓이었다.
“우아앙-! 선생님, 선생님!”
“어른들, 어른들을 불러와야 돼!”
“엉엉! 선생님 죽지 마요! 엉엉-”
난리가 난 아이들 틈에서 용케 어른들의 가르침을 떠올린 아이가 벌떡 일어나 수령 나무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돌담처럼 선을 동그랗게 에워싼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애타는 부름에도 정신을 잃은 선은 눈을 뜨지 않았다.
8. 불
1구역과 7구역 사이는 끝없는 사막과 끝없는 빙하, 그리고 미로 같은 정글이 가로막고 있었다. ‘자연의 확산’ 이후 문물의 편리는 인간들에게 제한적으로 제공되었다. 하늘을 나는 행위는 금지되었고, 기찻길은 끊겼으며, 뱃길은 막혔다. 인간의 이동 수단은 오로지 달리는 것에만 국한되었다.
태양열과 지열을 에너지로 삼은 자동차는 각 구역에서도 중앙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으나, 휘발유를 사용한 이동 수단은 법적으로 일제히 금지되었다. 다만 수요는 공급을 만들기 마련이다. 외곽에서도 한참 떨어진 자연에서 벌어지는 암시장엔 시쳇말로 없는 게 없었다. 산사 나무 열매 다섯 개와 구형 지프차를 교환한 디는 연료 탱크를 가득 채우고, 트렁크에도 기름통을 잔뜩 실었다.
“두 개는 더 줘야겠는데?”
말없이 두 개를 휙 던져 준 디가 입을 열었다.
“탈 쓴 놈들 2구역 거점지.”
“웬일로 밑지나 했다.”
픽 웃은 돼지코가 동전만 한 물건을 던졌다. 구형 추적기였다.
“탈 성애자들 틈에 빨대 하나 꽂아 놨다. 반경 10m 내에 있으면 불빛이 들어올 거야. 2구역은 좁으니까, 어디서든 마주칠 거다. 그런데 7구역 놈들은 왜 찾아?”
“사냥꾼의 의무.”
“농담도 잘하네, 디발놈 새끼. 지금 네가 가져간 물건을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땅속 버러지들까지 다 알고 있는데.”
빤히 쳐다보는 잿빛 눈깔에 흠칫 입을 다문 돼지코가 제 손으로 제 입을 퍽퍽 때렸다.
“아이고, 이 방정맞은 입 같으니라고! 제 명에 못 살지 내가, 제 명에!”
당장이라도 돼지코의 멱을 딸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던 디는 이내 추적기를 챙기고 창문을 올렸다. 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다 슬그머니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돼지코가 사이드 미러에 비쳤지만, 부왕- 구형 지프차가 뿜어내는 연기에 금세 가려졌다. 돼지코는 ‘자연의 확산’에 불을 지른 ‘문명의 이기(매연)’에 내심 감사 인사를 하며 온 힘을 다해 빠큐를 날렸다.
2구역은 면적 400k㎡도 안 되는 소형 도시였다. 과거 서울보다 205.24k㎡ 가량 적은 크기였다. 돼지코의 장담대로 2구역에 들어선 지 30분도 되지 않아 추적기에 불이 켜졌다. 밤이었다. 축축한 공기에선 물 냄새가 나고 하늘엔 구름이 껴서 움직이기 편한 날이었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가로등을 끈 밤거리에선 더욱 몸을 숨기기 쉬웠다.
벽에 붙어 이동한 디가 눈앞의 5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직사각형 모양의 흰색 건물. 오래전에 문을 닫은 연구소 건물이었다. 건물 2층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몸을 낮춘 디는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2m 높이의 담을 훌쩍 뛰어넘어 층마다 외벽으로 툭툭 튀어나온 테라스를 타고 2층에 올라섰다.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방 바로 옆이었다.
기척을 살핀 디가 옆 테라스로 가볍게 넘어갔다. 반쯤 열린 커튼 뒤에 서서 테라스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섰다. 깨진 유리창 너머에서 약탈자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몇몇은 술에 취하고, 몇몇은 약에 취한 듯했다. 그래도 해독제 한 병이면 모두 1초 만에 깰 것이다. 그 1초는 디가 매우 즐기는 시간이었다.
다만 오늘은 약탈자 모두를 몰살시킬 계획이 아니었다. 하나만 해치우고 귀면탈을 훔쳐 합류할 생각이었다. 7구역 사제 중심의 거세자들이 아닌 외곽의 거세자들은 대부분이 용병이었다. 오늘, 내일 대원이 바뀌고, 아침, 저녁 생존자 수가 달랐다. 오합지졸인 그들 틈에 섞여 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봐, 식은 죽 먹기지?’
‘네. 정말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워요.’
‘하하, 디는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배우는구나.’
슬며시 미소를 짓던 디가 표정을 감추며 기척을 죽였다.
소파나 침대에 널브러져 알몸으로 뒹굴던 놈 중 하나가 비틀비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테라스를 화장실로 착각한 것 같았다. 반쯤 흘러내린 바지를 내리며 팬티를 벗은 남자가 테라스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