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40)


#24화

“숨어 살아요?”

“네.”

“…….”

“내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도 돼요.”

이렇게까지 숨어 산다는 건 그만큼 일반 시민으로서의 결격 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발정기에 숨어 버린 디의 페로몬을 좇는 동안 간단히 보여야 할 양이의 흔적이 없더라니.

“내 동의도 없이 비밀을 노출해 놓고선. 디는 대담하거나 어리석거나, 둘 중 하나겠네요.”

“선의 도움이 필요할 뿐이에요.”

“마을 사람들의 동의는 얻었습니까.”

“네. 모두 찬성했어요.”

지난번에 제 병구완을 대신하러 와 준 양이를 떠올렸다. 그녀는 형질자도, 이형자도, 이능력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 너무 평범해서 약자로 몰린 인간처럼 보였다. 그런 이들이 모인 마을이라면 디의 도움 없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12구역과 맞붙은 산맥은 괴수들도 약탈자들도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곳이니까.

“믿어 줘서 영광이라고 해야 합니까?”

디는 고개를 저으며 선의 선택을 기다렸다. 굳은 얼굴의 선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디와 마을 사람들이 계약으로 묶인 관계가 아닌 이상, 그들은 강제로 디를 묶어 둘 수 없었다. 디의 공백으로 생기게 될 위험을 막아 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의 선택지는 당연히 하나일 터였다.

뒤집어 말하자면, 디는 어떤 이득이나 이점을 취하지 않고 이 마을의 보호를 자청했다는 뜻이었다.

사냥꾼이 이렇게 물러서야 되겠습니까.

선은 웃음이 나는 내심을 숨기며 디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문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숲을 지나자 펼쳐진 평지에 30가구 남짓의 마을이 나타났다. 바깥의 혼돈과 자연의 횡포 같은 건 모른다는 듯 깔깔거리며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은 생김새가 모두 달랐다. 이형자였고, 형질자였으며, 또 이능력자였다. 그런 사람들이 숨어 사는 마을이었다. 이장을 겸한 양이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녀의 딸은 여우 귀를 단 수인이었다.

“선이라고 합니다.”

“거봐! 내가 오메가 같다고 했지? 어쩜 너무 예쁘고 눈부시더라!”

궁금증과 어색함을 주렁주렁 매단 채 모여든 마을 사람들 앞에서 괜스레 호들갑을 떠는 양이가 반갑게 선을 맞았다.

“이렇게 고와서 그 낮도깨비 같은 놈들은 어찌 상대하려고 그래요?”

“이래 봬도 제 스승님이세요.”

“스승?”

눈이 휘둥그레진 건 양이와 마을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선 역시 그런 이상한 호칭은 왜 쓰냐는 듯 디를 돌아보았다. 눈동자엔 불쾌감이 살짝 스치기도 했다. 본인이 떳떳한 데선 뻔뻔하기 그지없는 디는 선의 반응에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저한테 글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기도 하고, 무술을 가르쳐 준 스승님이기도 하거든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디. 내가 기억을 못 한다고 지금 아무 말이나 지어내는 겁니까?”

귀에 대고 속삭이는데 어쩐지 주변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머, 어머. 둘이 짝인가 봐!”

“꺄, 너무 잘 어울린다!”

“거봐, 내가 한 달 전부터 디한테서 페로몬 냄새가 난다고 했지? 피부도 뽀얘진 게 이상하다고 했잖아!”

“어떡해, 어떡해! 둘이 발정기를 같이 보냈나 봐!”

“그럼 새로 오신 분도 우성 오메가?”

“이제 알았어? 냄새부터 다르잖아!”

와아아-! 그걸 소곤소곤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건지.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에 말문이 막힌 선이 난처한 얼굴로 디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냐는 선의 고민을 해결해 준 건 눈치 빠른 양이였다.

“자자, 다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디가 오랜만에 멀리까지 다녀온다니까 필요한 목록, 맡길 목록, 얼른 정리하고 챙겨서 가져오세요! 많이는 안 되고, 한 가구당 하나씩!”

그제야 우르르 모여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선택권이 없어서 선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디가 소개한 사람이라 군말 없이 모두 찬성한 것 같았다. 그만큼 디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신뢰가 대단해 보였다.

“디, 역시 인기 많은 남자네요. 죄가 많아요, 죄가.”

“저분들 다 선만 쳐다보던걸요.”

“여기선 신입이니까 신기하겠죠.”

덤덤히 대꾸한 선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땅속까지 하늘을 옮겨 오는 건 신도 불가했다.

“일종의 공간 분리인가 보죠?”

“네. 12구역에서 운 좋게 얻었어요.”

“디는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실력이 좋은 거예요.”

“선에게 배운 거예요.”

“선생님 노릇이나 하며 돌아다녔을 때면 고작 열일곱이나 열아홉이었을 텐데, 뭘 얼마나 많이 배웠겠습니까.”

“숨 쉬는 것부터 생각하는 법까지, 모두 다요.”

“정말… 열렬하네요.”

싱거운 농담을 던진 선이 지나가듯 한마디 덧붙였다.

“다음부턴 ‘스승님’이라고도, ‘선생님’이라고도 부르지 마세요.”

‘스승님’은 ‘뫼’를, ‘선생님’은 ‘선생님’을 떠올리게 했다.

그 마음을 이해한 건지 만 건지 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

선은 절로 터지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앞장선 디가 선을 안내한 곳은 대장간이었다.

기계나 로봇으로 무장한 공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중앙에서는 보기 힘든 대장간이었다. 문밖에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대장간 문지방엔 각종 농기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열린 문 안쪽에서 캉캉- 쇠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이예요. 마을 대장장이. 양이 남편이기도 해요.”

일부러 크게 낸 목소리와 기척을 알아챈 정이가 두드리던 쇠를 물에 담그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털 수북할 것 같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매끈한 얼굴이 불에 그을려 건강해 보였고, 체구 또한 대장장이라는 직업이 가진 편견과는 달리 우락부락하지 않았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체구, 필요한 근육만 드러낸 남자가 씩 웃으며 디를 반겼다.

“꼬맹이 왔냐?”

“네, 아저씨.”

“옆에 달고 온 건 색시?”

“색시는 아니지만, 기둥서방 비슷한 건 맞습니다.”

넉살 좋게 답한 선이 내민 손을 빤히 쳐다본 정이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기꺼이 악수를 받았다.

“저 꼬맹이가 골수처럼 빼 먹혀도 억울할 것 하나 없이 아주 빼어나게 생겼구만!”

“정이 씨도 대장장이답지 않게 지식인 같으시네요.”

“소싯적에 책벌레 같아 보인다는 소릴 좀 듣긴 했지.”

정이가 일어서자 바지 뒤로 늘씬하게 뻗은 붉은 꼬리가 살랑거렸다. 붉은 여우 수인이었다.

“그래. 정이 대신 여길 돌봐 준다고?”

“네, 그렇게 됐습니다.”

사람 좋게 웃는 선을 여우 특유의 동공으로 살펴보던 정이가 껄껄 웃으며 맞잡은 손을 놓았다.

“디가 모셔 온 분이니까 어련히 잘하실까. 그나저나 네 놈은 또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려는 거냐? 자면서도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머잖아 떡두꺼비 같은 애들도 쑥쑥 낳겠구나?”

“떡두꺼비든 말두꺼비든 아저씨가 알 바 아니잖아요. 이거나 좀 봐 주세요.”

답지 않게 툴툴대는 디를 쳐다보던 선이 그만 웃었다.

부끄러움도 탈 줄 아네. 떡두꺼비든 말두꺼비든 디의 애를 낳을 일은 애당초 생기지도 않을 테니 부끄러울 이유가 없는데, 아마 그 앞의 발언이 문제였던 것 같다. 정말 자면서도 저를 찾을 만큼 그리워했다고? 선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요 앙큼한 꼬맹이 새끼. 네가 볼일도 없이 여기까지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만….”

“선이 사용할 거예요.”

“이쪽이?”

디가 내민 깃털을 받아 든 정이는 깃털의 정체에 한 번 놀라고, 그걸 선이 사용할 거라는 말에 두 번 놀랐다. 선은 가만히 디를 돌아볼 뿐이었다. 저건 또 언제 챙겼대.

“그 까다롭다는 기린 털이라 길들이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선은 붉은 봉황의 갈기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아요.”

“그 성질 더럽다는 주작? 붉은 털이라고 다 같은 거 아니다? 나처럼 신사적이고, 지적인 대화가 가능한 대장장이가 어디 흔한 줄….”

“선이 쓸 거니까 잘 만들어 주세요.”

“큼큼. 한 사나흘 안 보이나 싶더니 이걸 구하러 갔구만? 뭐 나는 좋은 재료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땡잡은 거지만, 진짜 그쪽이 쓰신다구?”

“옆 사람에게 피해는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 대꾸에 더 긴가민가해진 정이의 눈초리를 받은 선이 생긋 웃었다.

“오매!”

동시에 정이의 코앞을 스쳐 지나간 쇠붙이가 흙벽에 가 박혔다. 바깥에 줄지어 세워 놨던 농기구 중 날이 세게 든 부엌칼이었다.

“디보다 더 잘난 것 같은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엌칼과 선을 번갈아 본 정이가 쌍 엄지를 치켜들었다. 낯부끄러운 티를 내는 대신 가볍게 웃은 선은 문득 디의 머리를 콩 쥐어박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내리눌렀다.

“살기 좋네.”

수령 나무 아래 평상에 앉은 선이 뺨을 스치는 산들바람에 눈을 감았다 떴다.

“복수고 뭐고. 그냥 평생 여기 숨어 살까요?”

“…….”

디는 어쭙잖은 맞장구도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저 바람이 스치고, 햇빛이 부서지는 선의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온전히 제 눈동자에 담았다.

“선.”

“네, 디.”

그제야 디를 돌아보는 선의 검은 눈동자에 해의 조각이 담겼다. 디는 이마저도 축복이라 생각했다.

“다녀올게요.”

디가 웃으며 인사했다.

“다치지 말고, 건강히 잘 있어요.”

“손주한테 인사받는 것 같잖아요, 디.”

가볍게 농담을 덧붙인 선도 웃으며 인사했다.

“잘 다녀와요.”

선은 다치지 말라는 당부도,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반년. 6개월은 생각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뫼’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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