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처음 겪는 일도 아닌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더는 제 무례를 봐줄 수 없다 선언하는 ‘선생님’의 앞에서 선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감당치 못할 모욕과 절망을 안기겠다.’
하지만 선생님, 망가진 내 뇌가 오류를 일으켜 ‘선생님’을 잘못 설정한 것이라면, 이 감정은 무엇입니까. 배 속 깊이 끓어오르는 이 분노와 내장이 가닥가닥 끊기는 듯한 이 슬픔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소리도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고개를 돌린 선이 잠시 숨을 죽였다. 곁에선 디의 고른 숨결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또한 ‘선생님’의 안배입니까? 저는 그저 이곳에서 이 알파와 남은 생을 보내다 죽으면 죗값을 다 치르는 겁니까? ‘대자대비’하신 선생님.
살고자 하는 의지를 높이 사 남창처럼 구르던 선을 거두고, 간절한 바람을 알기에 몇 번의 잘못에도 차마 내치지 못하고 1구역의 칼로 사용하려 했던 나의 ‘선생님’. 당신의 목숨을 앗아 가려 한 부하가 그리 갸륵해 이리 우스꽝스러운 무대를 준비하신 겁니까.
“…….”
아무래도 제가 미쳐 가는 건 맞나 봅니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장지문을 바라보며 입매를 끌어 올린 선은 웃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런 선의 옆모습을 묵묵히 올려다본 디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이게 네 이름의 뜻이란다.’
사랑하는, 소중한.
My Dearest.
‘이렇게 변형해 사용하면 좀 더 깊은 마음을 전할 수도 있지.’
‘어떤 마음이요?’
열병으로 끙끙 앓는 디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이마를 덮어 주는 선생님의 손은 서늘하니 기분이 좋았다.
‘네가 좀 더 크면 저절로 알게 될 마음이지 않겠니.’
‘선생님.’
‘그래, 디.’
‘선생님은 왜 떠나지 않으세요?’
‘떠났으면 좋겠니?’
‘나는 불길한 아이라서 곁에 있으면 모두가 불행해져요.’
‘어린애가 하기엔 좋지 않은 생각인데.’
‘그렇지만 사실인걸요.’
‘내가 너의 그 못된 생각을 뜯어고쳐 주마.’
‘그럼 오래오래 곁에 있어 주세요.’
‘이런, 네 술수에 내가 걸려들었구나.’
‘제 곁에 오래오래 있어 주세요, 선생님.’
‘그래, 그럴까?’
아침상을 내 온 디가 멍하니 앉은 선을 바라보다 수저를 쥐여 주었다.
“드세요.”
“…디.”
“네, 선.”
“반년.”
수저를 들려던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선을 보았다.
“반년은 어떻습니까? 반년간 ‘뫼’를 찾지 못하면,”
“좋아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디가 잽싸게 대답했다.
“반년이면 꽤 시간차가 큽니다.”
“알아요, 선.”
눈가를 접으며 웃은 디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선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게 다 연극도 뭣도 아니라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심지어.
“나는 디의 선생이었던 날들도 기억하지 못하는데요.”
“선은 마지막까지 내 곁에 살아 있어 준 사람이에요.”
“…….”
“내게 호의를 가지거나 찰나의 동정을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살아남은 적 없는데, 선은 그랬어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렴. 널 꼭 찾으러 올게.’
“그래서 내가 불운을 부스럼처럼 옮겨 다니는 세균도, 주변에 불행을 퍼뜨리는 병균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어요.”
‘디. 마이 디어. 날 꼭 기다려 줘.’
“선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
“그저 그날 태어났을 뿐인 ‘그 아이’가 선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요.”
‘나는 너에게 꼭 돌아올 거야.’
7. 사람들
귀면탈이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간 뒤 조용해지는가 싶던 약탈자들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디는 새벽같이 집을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1구역과 산맥을 가운데 두고 맞닿은 12구역과는 달리, 7구역은 양극단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반대 지역에 있었다.
형질자를 향한 혐오감이 신심(信心)으로 대변되는 7구역엔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전적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사고팔아도 되는 7구역에선 장물 거래가 불법이 아니었다. 형질자부터, 이형인, 이능력자까지. 타 구역에선 평범한 사람들이 7구역에만 들어서면 인간이 아닌 장물이나 상품으로 취급됐다. 1구역 중앙지구보다도 의학이 월등히 발달한 7구역의 어두운 이면이었다.
7구역을 대표하는 교주 악선은 특히 형질자를 끔찍이도 혐오했다. 사탄, 마귀만큼이나 사악한 존재로 여겨 그들을 박멸하는 데 최전방에 선 인물이기도 했다. 7구역의 거세자들, 소위 약탈자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기승을 부리는 배경이었다.
그곳에 ‘뫼’의 시신이 있다는 풍문은 22년째 그치지 않고 있었다. 밀랍으로 박제해 두었다는 둥, 표본실 개구리처럼 포르말린에 담겨 연구실 어딘가 전시되어 있다는 둥, 사지는 물론, 눈 코 입, 뼈마디, 세포 하나하나까지 해부되어 여태까지 실험당하고 있다는 둥. 말하는 사람 마음대로 살을 붙여 옮겨 다니곤 했다.
그러나 ‘뫼’의 실체를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진짜 가려고요?”
“네.”
군화 끈을 꽉 묶고 일어선 디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선의 손목을 붙잡았다. 얌전히 손목을 내준 선은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에서 빠져나온 지 한 달. 꾀병을 부려 병석에 누운 선이 거동한 지는 이제 닷새였다.
선이 병을 핑계로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동안 디는 아예 2구역에 진을 치고 쳐들어오기 시작한 7구역 약탈자들을 상대하며 간간이 12구역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들을 구해 왔다. 시장에 내놓기만 해도 구매자들이 눈덩이처럼 달려들 희귀품들로 가득 찬 창고를 들여다본 선 역시 내심 놀라며 안에 들어섰다.
“이건 외상에 쓰면 되고요, 이건 내상. 독에 쓰는 건 이거. 또 이건 피로할 때. 이건 체력이 떨어졌을 때. 이건 방화, 방수가 되는 은신 도구고요. 또 이건.”
“디.”
“네?”
“위험한 데로 자진해서 가는 건 디 본인이잖아요.”
“저는 괜찮은데요.”
“네, 괜찮겠죠. 성체도 못된 몸으로 귀면탈 놈들을 가지고 놀 수준이었으니까요. 우성 알파가 된 지금은 더 무시무시해졌을 거예요. 아마 저도 상대하기 힘들걸요.”
“선은 달라요.”
“경력직 대우해 주는 겁니까?”
“나는 선한테 아무 짓도 할 수 없어요.”
“우리가 같이 보낸 발정기는 벌써 잊었나 보죠? 이래서 알파들이란.”
“다음엔 그런 일이 없도록 더욱 조심할게요.”
의기소침한 얼굴로 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디를 쳐다본 선이 픽 웃었다.
“사실 그때 싫다는 디를 덮친 건 나였죠. 농담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내 목숨을 빚진 보답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죽을상 할 것 없다, 다독인 선이 디가 늘어놓은 물건을 대충 훑어보았다.
“약탈자 놈들은 차치하고 저기 수풀 속 보안대 아저씨들이 보면 거품을 물겠는데요? 하나같이 상등품이에요.”
귀중품을 쓰레기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엉망진창인 창고를 돌아본 선의 소감을 알 리 없는 디는 그저 진지하기만 했다.
“저 없을 때 무슨 일 생기면 꼭 쓰세요.”
“걱정 마요, 디. 이래 봬도 보디가드가 다섯이나 붙은 몸이니까요.”
보안대원들을 일컬은 말이었지만 그들은 감시자일 뿐, 선을 보호하려고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디도 알고 저도 아는 사실을 농담 삼아 지껄인 선이 구석에 처박힌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연검 재료로는 최상품인 기린 종의 깃털이었다. 오색 깃털 중 물의 기운이 가장 강한 은색 털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훌륭한 재료가 있어 봐야 제련할 기술자가 없으면 무소용이었다.
이내 흥미를 잃고 돌아서는 선을 유심히 바라보던 디가 필요한 물건 몇 개를 가방에 담고는 뒤따라 나갔다.
“선.”
창고를 빠져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평상에 앉으려던 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디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도로 닫았다. 아침부터 저러더니 언제까지 뜸을 들일 생각인지. 추궁할 의욕까진 생기지 않아 우선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긴 다리로 벌어진 거리를 따라잡은 디가 따가운 햇빛을 가려 주며 마침내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실은, 선한테 부탁할 게 있어요.”
“거봐요. 내가 경력직이라서 자꾸 부려 먹으려는 거 맞죠?”
의도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별달리 부정하지 못한 디가 선을 따라 빙긋 웃었다.
마을까지 가는 길은 눈이 밝고 지리감이 뛰어난 선조차 쉽게 읽어 내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보안대원들의 눈을 피해 집을 빠져나온 그들은 숲을 지나고 폭포수를 건너 한참 비탈길을 오르다 다시 한번 울창한 숲을 만났다. 그리고 울창한 숲 한가운데 밤나무 뿌리를 건드리자 움푹 땅이 파였다. 드러난 건 일종의 문이었다.
“마을 입구예요.”
“…….”
나무뿌리에 집요하게 엉겨 있는 문을 내려다보던 선이 시선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