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0)


#22화

“디, 괜찮습니까?”

“별로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내가 물은 건….”

병자 행세를 한다고 이부자리에 누웠던 선이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디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여깁니다.”

“…다, 들으셨죠?”

“뭐, 다는 아니고.”

쭈뼛쭈뼛 제 눈치를 보는 디를 쳐다본 선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디 연기가 기대치보다 낮아서 걱정이긴 합니다.”

“선.”

“네, 디.”

“죄송해요.”

하핫, 웃은 선이 “네, 알겠습니다.” 흔쾌히 사과를 받아 주었다.

저 하이에나 같은 놈들 눈을 속이는 게 보통 일은 아닌데도 그 앞에선 눈 하나 깜짝 않더니. 그깟 모욕적인 말 몇 마디가 뭐라고 이렇게 쩔쩔매나.

“부엌 쪽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물을 데우는가 봅니다?”

“네, 목욕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맞습니다. 제법 좋아해요.”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인 디가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서려다가 이내 다시 선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소 난처한 얼굴로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선은 지금 환자니까요.”

“아.”

금방 이해한 선이 눈매를 접으며 두 팔을 내밀었다.

“얼른 안아 주시죠, 디.”

“네, 선.”

커다란 덩치를 구기듯 숙인 디가 진짜 환자라도 다루듯 조심조심 선을 안아 들었다.

“괜찮아요?”

“네. 디 쿠션감이 웬만한 침대보다 낫네요.”

가벼운 농담엔 선의 산뜻한 페로몬이 섞여 있었다. 동굴에서 선과 디를 짓누르듯 무겁게 가라앉았던 페로몬과는 확연히 다르고 따뜻했다. 당장이라도 눈을 파 버리고 싶은 저 보안대원들에게 선의 털끝 하나 보여 주기 싫었던 디는 일부러 등을 보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부엌하고 곧장 이어지는 문을 만들어야겠다, 하는 찰나 선이 입을 맞춰 왔다.

“…….”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뗀 선이 놀라 동그래진 눈을 마주하곤 생긋 웃었다.

“입 안에 상처,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요.”

명색이 발정기까지 같이 보낸 사인데, 이 정도 서비스는 아낄 생각이 없었다.

안겨 있지 않았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아주 조금 뻣뻣해진 디가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다.

이게 연기라면 얘는 정보부든 보안부 소속이든 고위급은 물론, 다방면으로 앞이 탄탄대로인 인물일 것이다. 1세기 전에 태어났다면 연기력으로 유명세를 날린 배우였을지도 몰랐다.

제 속내를 숨기듯 디의 품에 몸을 기댄 선이 옅은 숨을 토했다. 곧 날숨으로 디의 페로몬이 흘러 들었다.

선은 디가 그 애였으면 했고, 또 아니었으면 했다.

‘선생님’을 찢어 죽이고 싶었고, 이대로 이 애와 평생 같이 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선은 지금도 선연한 분노를 이길 순 없었다.

‘선. ‘뫼’가 대장군 ‘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순간 텅 빈 것 같은 선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당연한 사실을 묻는 디를 가만 내려다본 선이 웃었다.

‘네. 21년 전 침입자들의 기습에 하룻밤 새 일가가 몰살당한 대장군 ‘뫼’가 맞습니다.’

‘7구역에 ‘뫼’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어요.’

날 때부터 원형 알파이자 우성 알파인 형질자는 기록상 ‘뫼’가 최초였다. 형질자를 차별하는 만큼 의학이 발달한 7구역에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치르고 ‘뫼’의 시신을 사들였다는 풍문은 선도 익히 아는 바였다.

‘하지만 디. 그건 헛소문입니다.’

‘뫼’의 시체를 찾기 위해 선은 몇 년을 또 허비했다. 7구역 어디에서도 ‘뫼’의 시신은커녕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뫼’의 시신을 찾을 수 있다면 유전자 정보 또한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디는 감정으로 호소하는 대신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헛소문에 근거한 설득을 논리적이라 할 수 있는가. 그저 본인의 간절함을 피력하는 것인지. 선은 자연히 부유하는 의심을 밀어내며 서서히 디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 헛소문을 쫓아 7구역으로 가겠다는 겁니까?’

동굴 여기저기 흩어진 무기를 하나하나 챙긴 선이 제 옷가지도 대충 모아 던져 두었다.

 

‘나는 디가 ‘뫼’의 시신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까? 그때까지 얼마나 걸리려나요.’

마지막 말은 냉소에 가까웠으나 선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없었다.

‘‘뫼’의 시신을 찾아 전전하다 발정기가 되면 돌아와서 나랑 뒹굴고, 몇 번 그러다 보면 1, 2년은 훌쩍 지나겠네요. 그러는 사이 얼렁뚱땅 정들어 각인도 하고, 수태도 하고, 애도 낳고. 7구역이면 약탈자들 천지라 사냥꾼의 의무를 소홀히 할 필요도 없으니 ‘선생님’께 나를 회수당할 걱정도 없겠고요.’

어느새 일어선 디를 돌아본 선이 웃었다.

‘정을 붙이겠다는 게 그런 뜻이었습니까?’

‘1년만요.’

선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호소하지 않은 디는 그저 자신이 건넬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을 했다.

‘1년만 ‘뫼’를 찾게 해 주세요. 그동안 발정기는 저 혼자 보낼게요. 선이 싫다는 어떤 짓도 하지 않을게요. 저에게 1년만 시간을 주세요.’

‘디.’

‘네, 선.’

‘그 1년이 지나면, 나를 정말 놔줄 겁니까?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명목으로 내 뒤를 쫓거나 추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선이 원한다면요.’

‘디가 죽어도요?’

‘선생님’이 하사한 물건을 잃어버리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디는 목숨으로 죄를 갚을 수밖에 없었다.

‘네, 선.’

‘‘뫼’를 찾아 디와 유전자 정보가 일치한다 해도 내가 떠나겠다면요?’

만약을 논할 가치도 없는 전제를 논하는 자신이 어리석다 생각하면서도 선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도 날 놔줄 수 있습니까?’

‘그땐 선을 따라갈 거예요.’

디가 빙긋 웃었다.

‘제가 정말 ‘뫼’의 핏줄이 맞다면, 선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돼요.’

‘…….’

‘제 가족의 복수를 선에게만 맡길 수 없잖아요.’

‘너는… 살아야 해.’

‘저는 선과 같이 살고 싶어요.’

선이 모아 둔 옷가지에서 상의를 주워 그의 어깨에 걸쳐 준 디가 말했다.

‘선과 같이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아요.’

‘내가 복수를 포기하면요?’

디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동굴엔 그저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이 울렸다.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 앉은 선이 옆을 내려다보았다. 장지문 새로 달빛이 흘러 들어 디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곁에서 곤히 잠든 디는 무방비 상태였다. 당장 누가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데도 디는 가장 안전한 곳을 찾은 것처럼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 때문에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 올려 디의 목 밑까지 덮어 준 선이 우수에 잠겼다.

‘저는 선과 같이 살고 싶어요.’

‘선과 같이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아요.’

선은 이미 복수에 실패한 반역자였다. 이대로, 디와 함께 조용히 숨죽인 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정말 꼭 살아 주길 바라는 ‘밤’이 선의 처지를 헤아려 디를 보내 준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우연과 운명을 믿기엔 선은 이미 너무 많은 배신을 당하고, 너무 많이 이용당했다.

머리 한쪽에서는 지금이라도 이 알파의 목숨을 빼앗고 당장 ‘선생님’의 목을 베러 가야 한다는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내가 ‘뫼’를 죽였다? 증거는 있느냐, 대장군 선. 아니, 그전에 네 기억을 믿을 수는 있고?’

목에 칼이 겨눠진 상황에서도 위축되긴커녕 남은 차를 마시며 조용히 일갈한 ‘선생님’은 외려 선을 딱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완전하지도 않은 네 기억을 근거로 남의 죄를 묻고, 목숨을 논하는 건 대단히 오만하고 무책임하지 않느냐.’

 

선은 ‘선생님’의 목을 단숨에 베지 않은 걸 후회하는지, 안도하는지 지금도 확신하지 못했다.

‘너는 망가진 인간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멀쩡한 곳이 없지.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높이 사 너를 거뒀다. 너의 간절한 바람을 알기에 내치지 못하고 1구역의 칼로 사용하려 했으나, 내 결정이 옳았던 건 아닌 듯싶구나.’

어느새 주변을 둘러싼 백인부대 전원이 선을 향해 검과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너를 해방해 주겠다, 대장군 선.’

찰나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은 부대장 삭에 의해 무릎 꿇린 선의 앞으로 칼 하나가 던져졌다.

‘지금 자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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