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꼭 살아 주렴.’
“‘밤’은 나의 아버지. 어쩌면 우리의 아버지일지 모를 ‘밤’은 우리가 꼭 살아 주길 바랐죠.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싸 쥔 것에 불과할 뿐, 디에게 압력 하나 행하지 않는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혼자 살아남은 나는, 너무나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나는 이제라도 ‘선생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죽은 순간부터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거든요. 복수. 스승님과 나의 가족을 처참하게 몰살시킨 상대를 향한 복수 말고는 살 이유가 없었어요.”
목울대를 누르는가 싶던 손가락에 힘이 빠졌다. 굵은 목울대를 타고 올라가 잘생긴 턱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런데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군요.”
빙그레 웃는 선은 우는 것도 같았다.
“디가 정말 ‘뫼’와 ‘밤’의 아이라면, 나는 살아야 합니다.”
복수를 관두고, ‘뫼’와 ‘밤’의 아이가 아닌 변경부대원 ‘디’와 그의 오메가로 숨어 살 수 있게 됐으니.
“꼭 살아 주어야 합니다.”
갓 탈피를 마쳐 저보다 더 보드랍고 매끄러운 뺨을 어루만진 선이 웃었다.
“우리의 다정한 아버지 ‘밤’은 복수보다 그저 살아 주길 바라셨거든요.”
손끝을 미끄러뜨린 선이 디의 심장 옆에 자리 잡은 희미한 관통상을 건드렸다.
“반려와 각인해 한 번의 탈피를 더 마치면 이 상처는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어깨 너머의 토끼를 만지듯 심장 근처를 스친 선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낙인도, 토끼도. 디는 이제 우성 알파가 됐으니 상대가 오메가라면 열성이든, 우성이든, 원형이든, 변형이든, 얼마든지 각인할 수 있어요.”
까만 눈동자가 은빛 머리카락과 은색 눈동자를 넘치게 담아냈다.
“물론 디는 나와 각인하고 싶겠죠. 디가 그 아이라면, 나 역시 그럴 겁니다.”
밤처럼 까만 눈동자에 고통이 스쳤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을 찢어 죽이고 싶어요. ‘선생님’의 사지를 잘라 그 목구멍에 본인의 피를 쏟아부어 배불리 먹일 겁니다. 1구역 모든 짐승의 좆 맛을 보여 주고, 발가벗긴 몸을 끌고 광장과 광장을 돌 겁니다. 골목 구석구석 보지 못한 사람이 없게 전시한 뒤 산 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검은 광장과 붉은 광장에 효시할 겁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사람이 없게요.”
선의 내부에서 범람하는 슬픔은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있었다.
“한편으론 이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디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디는 알고 있었다. 저의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선을 설득하고 신뢰를 심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디. 왜 하필이면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겁니까.”
22년을 찾아 헤맬 땐 죽은 사람처럼 꼭꼭 숨어 있더니, 하필이면 지금.
왜.
“왜요, 디.”
죽을 결심을 한 지금에서야 약속이나 한 듯이, 계획이나 한 듯이.
“나는 편집증 환자가 되거나, 바보가 되겠군요.”
복수를 실행한 편집증 환자가 되거나, 누군가의 계략에 빠진 것도 모른 채 잃어버렸던 아이와 각인을 맺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바보가 되거나.
“내가 이렇게 어느 한쪽을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걸까요.”
조용히 묻는 선은 어떤 대답도 바라지 않았다.
“저기.”
온 산을 요란하게 뒤흔든 폭파음에도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 보안대원 중 하나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망원경을 눈에 붙인 다른 하나가 낮게 읊조렸다.
“그들입니다.”
선과 디였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디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으로 중심부만 겨우 가린 선을 안아 든 채였다.
“어떻게 할까요?”
“쉿.”
조용히 하라 손짓한 부대장이 더욱 몸을 낮추며 기척을 죽이길 지시했다.
햇빛 아래 드러난 디의 몸은 매끄러웠다. 몸에 생채기 하나 없는 사냥꾼은 둘 중 하나였다. 가짜거나, 이제 막 탈피를 마쳤거나. 후자임을 알아챈 대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수풀을 빠져나오는가 싶던 그들의 모습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제 눈을 의심한 보안대원들이 모든 장비를 동원하는 사이, 그들은 안방 앞 마룻바닥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도 선을 안고 있던 디가 장지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얼마간 틀어박혀 있다가 방 밖으로 나온 디는 혼자였고, 변경부대원의 기본 제복을 갖추고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또 한참 시간을 보낸 디가 마당을 가로지르고, 수풀을 성큼성큼 넘어 보안대원들의 임시 벙커까지 직진한 건 순식간이었다.
방어벽 바로 앞에 선 디를 쳐다본 대원 하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였다. 눈살을 찌푸린 부대장이 고갯짓했다. 마침내 주변 배경을 반사 삼은 방어벽이 지직거리며 사르륵 사라졌다.
보안부대원 다섯을 마주한 디는 당황도 긴장도 하지 않은 채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의 위치 같은 건 다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선이라면 몰라도, 이깟 변경부대원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탈피를 마친 뒤 우성 알파로 각성한 덕이리라 짐작한 부대장이 입을 열었다.
“우성 알파가 된 걸 축하한다.”
“선이 아픕니다.”
“뭐?”
당연한 소릴 지껄이는 디를 쳐다보는 시선이 미심쩍어졌다. 속죄 주간을 거친 선이 며칠 사경을 헤맨 건 보안부대원들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러나 8일 전 아침을 기점으로 의문이 생겼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던 선이 스스로 자취를 감출 만큼 회복된 것 같다는 사실 하나. 우성 알파가 된 디를 마주함으로써 드디어 떠오른 두 번째 의문.
과연 망가진 오메가가 원형 알파를 탈피시킬 수 있는가.
“꼬리 말고 도망치는 걸 보니 대장군일 적만큼이나 팔팔해 보이던데?”
“제가 데려간 겁니다.”
“뭐?”
바보처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 부대장이 팍 인상을 썼다.
“누굴 장님 취급하려고-!”
“선이 죽어 가는 걸 당신들도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그뿐 아니라, 조금 전 선을 안고 돌아온 디가 8일 전 선이 사라졌을 때와 같은 수법으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걸 목격했다.
“발정기가 코앞인데 선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은신처로 데려갔습니다. 명색이 은신처인데 보안대원님들께 들켜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망가진 오메가를 데리고 발정기를 치렀다? 너는 탈피에 성공하고?”
“덕분에 선이 전보다 더 아픕니다.”
“그 꼴로 발정기 알파를 상대했다간 죽기 십상이었을 텐데?”
“잊으셨나 본데. 선은 우성 오메가입니다.”
“너야말로 잊었나 본데. 그 반역자 새끼는 일주일 만에 수천 번의 착상과 유산을 반복하다 수태 기능을 잃어버린 반푼이에 불과하다. 수태 기능이 없는 오메가가 우성 알파를 탈피시켜? 대가리에 총알이라도 맞았나? 우리 훌륭한 변경부대원께서 개소리를 다 지껄이시고.”
“탈피는 성공했고, 선은 아픕니다. 내 오메가를 다른 수컷한테 보이는 건 내키지 않지만, 별수 없죠. 직접 확인하실 수밖에.”
퍽- 불시에 날아온 주먹이 디의 턱을 갈기고 지나갔다.
“뭐? 내 오메가? 씨발, 감히 누구더러…!”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모아 뱉은 디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를 친 보안대원을 쳐다보았다.
“반역자 새끼. 수태 기능을 잃어버린 반푼이. 그게 내 오메가 아닙니까?”
힘껏 내지른 주먹에 휘청하기는커녕, 고개만 살짝 틀곤 꼼짝도 하지 않은 디를 지켜본 다른 대원이 다시 달려들려는 대원을 만류했다.
“반역자 새끼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거나, 네 놈이 다른 오메가를 숨겨 뒀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러니 직접 확인하라며 눈길을 준 디의 태도는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보안부대의 임무는 감시가 다였다. 설사 선이 멀쩡하게 회복해 달아난다 해도, 그를 붙잡아 ‘선생님’ 앞에 무릎 꿇리는 건 다른 부대의 임무였다.
“꺼져.”
“의사가 필요합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결국 더 참지 못한 대원이 다시 주먹질하려 하자 눈살을 찌푸린 부대장이 그만두라 손짓했다.
“우리 임무가 아니다.”
고개를 삐딱하게 튼 디가 픽 웃었다.
“무슨 수를 쓰든 선을 살리고 죽이는 건 내 몫이다, 이겁니까?”
“이 새끼가!”
“그만!”
이제야 디의 속셈을 알아차린 부대장이 내심 혀를 찼다.
변경 쪽 버러지라기에 어수룩한 줄만 알았더니. 배 속에 능구렁이가 두어 마리는 들어앉았다. 탐탁지 않았지만, 부대장은 원론 그대로, 디가 바라는 말을 해 주었다.
“선을 네게 하사한 건 ‘선생님’의 뜻이다. 그 오메가를 죽이고 살리는 건 너 하기 나름이겠지.”
“보안부 선생님들께서는 엘리트 코스만 척척 밟아 올라가신 분들이라더니. 과연 명쾌하십니다.”
결코 아부가 아닌 이죽거림에 발끈한 대원들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인 디는 느긋하게 수풀을 빠져나갔다.
“조져 버릴까요? 오메가 다섯을 생으로 회수했다기에 멀쩡한 놈인가 했더니, 다른 변경 버러지 새끼들과 다를 게 없잖습니까?”
“저 버러지 새끼한테 왜 그런 포상을…!”
“넌 좀 닥쳐야겠다. 저 역겨운 오메가 새끼가 변경의 버러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악질인 걸 잊었냐? 바로 우리 눈앞에서 ‘선생님’을 해하려 한 반역자 새끼다. 반동분자로 몰려서 뒈지고 싶은 거 아니면 입단속 잘하고 시키는 일만 해.”
“…네. 대장님.”
으득 이를 갈던 대원은 부대장의 경고에 허옇게 질린 얼굴로 부복 자세를 했다.
이윽고 그들 주위로 다시금 방어벽이 쳐졌다. 그들이 있던 자리엔 수풀만 무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