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젠 웬만해선 어디 가서 맞고 오지도 않는데.
“아뇨. 본인의 추종자한테 무슨 짓을 한 건 디죠.”
“네?”
“디가 설치한 부비트랩에 꽁무니를 뺐거든요.”
“아.”
그제야 안심하는 디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졌다. 물론 그들을 약올려 가며 부비트랩까지 유인하는 동안 제법 날카로운 공격을 몇 번 받긴 했으나, 결국 그들은 선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아마 디의 생각보다, 나는 더 강할 거예요.
내심 속삭이던 선이 돌연 두 눈을 차갑게 빛냈다.
“설마 걔가 디를 다치게 했나요?”
“7구역 놈들이요? 그런 적 없어요. 저는 더 이상 어리지 않거든요.”
괜한 걱정이라는 어투였지만, 그 말에 깃든 함의를 선은 놓치지 않았다.
어릴 땐 다치게 한 놈들이 많았겠지. 광산 놈들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물끄러미 토끼를 내려다본 선은 별이 그려진 토끼 귀를 매만지며 이야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물론 걔는 뇌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원래 머리가 나쁜 것 같지만.”
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좀체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디는 제 귓바퀴를 타고 나긋나긋하게 흘러드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실제로 뇌 기능에 조금 문제가 있거든요.”
그렇다고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은 디가 굳은 얼굴로 선을 내려다보았다. 보지 않아도 걱정이 가득할 얼굴을 아는 선은 일부러 그를 마주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엔 산이 그려진 토끼 귀를 매만졌다.
“머릿속에 남은 기억이 몇 개 없어요. 아마도 외상에 의한 기억상실인 것 같아요.”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선을 꼬옥 끌어안은 디가 늘씬하고 긴 목에 입술을 파묻었다. 푸른 하늘빛을 닮은 산뜻한 비누 냄새가 폐 속 깊이 밀려 들어왔다.
“그런데도 디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차마 웃는 얼굴은 건드리지 못하고 포슬포슬한 토끼 꼬리만 매만지던 선이 속삭였다.
“말하고 싶지 않겠지만, 어차피 나는 다 잊을 테니까.”
“선.”
“그러니까… 말해 줘요, 디.”
유독 애틋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인 디는 싫다고 고개를 젓지도, 입을 굳게 다물지도 않았다. 선의 곁에 잠시라도 더 있을 수 있다면, 제가 기억하는 모든 과거를 다 이야기해 줄 수도 있었다.
“선생님이 나한테 이름을 줬어요.”
어느덧 마주 보고 누운 디가 제 팔을 베고 누운 선을 좀 더 가까이 당기며 등을 끌어안았다. 이미 빈틈없이 맞붙어 있는데도 충분치 않았다. 선의 체온은 오늘도, 한 달 전에도, 13년 전에도 늘 서늘했다. 특히 사경을 헤맬 땐 시체처럼 차가워, 디는 몇 번이나 심장이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디.”
“네.”
“내 이름을 지어 줘요.”
“…….”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럼 이 기억 또한 잃어버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뫼’, ‘밤’, ‘토끼 모양’.
이런 순간이라면 숭숭 뚫린 구멍 속으로 빠져나가 버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선(㦏).”
기뻐할 선.
“선으로 할래요.”
선의 요청에 놀라면서도 고개를 젓지 않은 디가 부끄러운 듯 속삭이며 웃었다. 그러다 저를 빤히 응시하는 눈동자의 흔들림을 알아보고 불현듯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뻐할 선이라니….”
겨우 흔들리는 눈동자를 갈무리한 선이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조심스레 선을 살피다가 안도한 디가 싱긋 웃었다.
“저한테 선은 그런 존재거든요.”
‘우리한테 너는 그런 존재란다.’
아아, 스승님.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된 선은 어설픈 표정을 짓는 대신 디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스승님… 정말 그 아이가 죽은 게 아니었나 봐요.
살아서… 살아서 이렇게.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꼭 살아 주렴.’
밤…. 아버지, 아버지….
“디.”
“네, 선.”
“나는 그때의 기억이 흐릿하기만 해요.”
언젠가 ‘선생님’이라 불린 기억만 편린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동굴은 습하고 서늘했다. 행여 축축한 공기가 선의 어깨에 닿을까, 옷을 가다듬어 덮이고 팔다리를 모두 사용해 하얀 몸을 꼬옥 끌어안은 디는 제 귓속을 간질이는 선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맞닿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왜 선은 떠나지 않은 걸까. 제가 탈피를 하다 죽든 말든, 선은 이미 해 주지 않아도 될 일까지 다 해 줬는데, 왜 떠나지 않고 다시 돌아왔을까. 발정기를 같이 보내면 정말 없던 정이라도 생기는 걸까. 그래서. 내가 갑자기 불쌍해지기라도 해서.
“내 스승님이자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형제들입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상실감에 디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모두 죽었습니다.”
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더 꽉 끌어안지도 않으며, 그저 그대로 가만있어 주었다. 불편한 침묵과 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함부로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
선이 손을 잡고 같이 일어서 주는 사람이라면, 디는 같이 쓰러져 주는 사람이었다.
“‘뫼’, ‘밤’. 두 분이 막내를 낳았어요. 감히 만지지도 못할 만큼 작아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마, 알겠니?’
“내 아이들.”
급히 방수천을 덮어 준 ‘밤’은 행여 산소가 부족할까 염려되어, 그 와중에도 실바람이 흘러들 만큼 가마 문을 열어 두고 갔다. 그 사이로 비친 학살과 살육의 기억. 침입자들에게 끌려간 ‘밤’의 목이 떨어져 연무장 바닥을 뒹구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했다.
“꼭 살아 주렴.”
그게 여태까지 선이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태어난 지 세 시간도 안 된 아이였습니다. 나는 그 아이를 안고 쥐새끼처럼 숨어 벌벌 떨기만 했습니다.”
‘냄새 나는 오메가 새끼, 여기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줄 알았다니까.’
“그들이 우릴 어떻게 찾아냈을까.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내 페로몬이 그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줬다는 사실을.”
디의 가슴에 얼굴을 붙인 채 나긋나긋 읊조리는 선의 뺨은 차가웠고,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그 아이는 죽고, 저만 혼자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
“나는 ‘뫼’와 ‘밤’의 친자식이 아니거든요.”
왼쪽 가슴, 심장을 가까스로 빗겨 간 칼자국을 바라본 선이 그 위에 이마를 붙였다.
“그 아이가 죽은 날이 내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밤’이 빚은 문진은 완성되지도 못했다.
“그 아이의 왼쪽 날갯죽지에 토끼가 있었습니다. 그 밤, 제 부주의 때문에 화상을 입었거든요.”
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저항 없이 걸어 들어간 디는 그제야 제가 밟고 선 곳을 깨달았다. 많은 걸 잃고도 끈질기게 붙잡은 기억의 조각들이 뭉쳐진 선의 피투성이 내장이었다.
“왼쪽 귀엔 산이, 오른쪽 귀엔 별이, 기쁠 선을 뜻하는 웃는 얼굴.”
“…….”
“디가 데리고 있는 토끼와 같습니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발설하고도 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거듭 겹치는 우연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하죠.”
가슴에서 이마를 뗀 선이 고개를 들었다. 이내 몸을 굴려 디의 허리에 올라탔다.
“나는 필연보다는 치밀한 계획을 믿는 사람입니다.”
말없이 선을 올려다보는 디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디. 정체가 뭐죠?”
“…….”
“내가 정말 당신의 ‘선생님’이 맞습니까?”
“…….”
“당신이 정말, 스승님과 ‘밤’의 아이가 맞습니까?”
“…….”
“디. 말해 주세요.”
“선.”
손을 뻗은 디가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선의 턱을 건드리다 가만 감싸 안았다.
“디라고 불러 주세요. 선이 준 내 유일한 이름입니다.”
“…디.”
“선이 아니면 나는 더 살 필요가 없어요.”
“…….”
“내가 의심스럽다면 바로 죽여요.”
턱을 타고 미끄러진 손이 선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내 목숨은 언제나 선의 것입니다.”
디를 내려다보는 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웃음기가 서렸다.
“디. 나는 디를 죽일 수 없어요.”
디가 그 아이라는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는 이상.
“누구에게도 토끼 이야기를 한 적 없거든요.”
끌려간 선의 손은 디의 목울대 위에 내려졌다. 그것을 본 선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요. 그게 정말일까요?”
정말 내가,
“디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내 기억이 이렇게 불완전한데.
“나를 믿어도 되는 걸까요?”
“…….”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걸까요.”
디의 목울대를 누른 손가락에 하나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스승님과 ‘밤’을 죽였습니다. 그 밤, 대장군 ‘뫼’의 일가를 몰살시킨 건 다름 아닌 ‘선생님’이었습니다.”